소설리스트

왕의 표본-310화 (310/369)

310화

'자. 일을 정리해보자.'

민국은 일을 정리하기 위해 곰곰히 과거를 돌이켜보기 시작했다. 우선 유이와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의 팀워크로 결국엔 완성된 루트 1의 게임이 usb 안에 담겨졌다.

민국은 처음으로 플레이를 하는 플레이어로서 그 usb의 게임을 먼저 해볼 선택권을 가졌고, 집으로 유유히 돌아와서 컴퓨터에 앉아 게임을 곧장 작동시키려고 했다. 허나 급작스런 흑설 공주의 부름으로 그녀를 만나게 되었고, 그간 노예처럼 굳은 살림을 다 한 입장으로서 한 가지 해택을 받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10일간 어떤 것이든 병의 액체를 사용하면 실존하지 않는 캐릭터를 실존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었다. 요컨대 당신이 어떤 게임의 캐릭터가 맘에 들어서 실존하게 만들고 싶다! 그럼 모니터의 그 캐릭터의 면상에 약을 뿌려버리면 그만인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현실에 존재치 않던 캐릭터가 현실화 되고, 동시에 실존하는 인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약을 공중에 흩날렸지.'

그만 안방에서 말도 안 되게 발이 걸려 넘어져 버렸다.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흑설 공주의 귀한 병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도중에 예나가 와서 무슨 일이냐며 달래주긴 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실존하지 않아야 할 인물이 나타났다.'

민국은 갑작스레 자기 방에 나타난 한 여인을 돌이켰다. 그녀는 민국이 처음 보는 여인으로서, 도무지 정체를 모를 여인이었다. 물론 예쁘긴 무지하게 예뻤다. 고무줄 머리핀으로 땋은 머리부터 시작해서… 예쁜 속눈썹. 활짝 웃을 때마다 묘하게 섹시함과 발랄함이 담긴 모습!

"민국니임~."

"어, 아, 예. 안녕하십니까."

"민국님 왜 그렇게 말이 없어요? 설마 흥분하신 거예요?"

"……."

"어머머, 아직 밤도 안 됐는데 이러시면 섭하셔라…. 우리 좀만 기다렸다가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민국은 본래 성격이라면 '헉헉 시발 아침이고 밤이고 상관없어!'하면서 덮쳤겠지만, 이 상황은 천진난만한 그로서도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굳게 입을 다물었다.

'어떤 캐릭터가 나왔을꼬.'

병의 액체가 분명 어딘가에 흩날린 건 자명하다. 근데 이 액체가 대체 어느 은밀한 곳에 적중되어… 이런 정체 모를 캐릭터가….

'잠깐만.'

민국은 문득 usb를 돌아보았다. 병의 액체가 워낙 흡수력이 빨라서 usb에는 묻어 있는 물기나 액체 같은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자꾸 의심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크흠. 일단 잠시만 묻을 닫지요."

"민국 님도 참~ 일찍 가는 버스가 대중교통 때문에 막힌다는 거 모르셔라~."

한 쪽 손으로 입을 가리고 툭툭 민국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는 그녀. 하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그녀였기 때문에 민국은 일단 다른 사람이 들어올 것을 감안해 안방 문을 닫고 굳게 잠갔다. 그리고 컴퓨터 전원을 켜서 곧장 본체에다가 usb를 삽입…! 게임을 켜보는 민국이었다.

"……."

그리고 얼마지 않아 민국은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슈밤 역시!'

그러하다. 본래 이 usb에 있는 게임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함께 진행하는 스토리의 게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게임 속에 캐릭터가… 남자 주인공밖에 없었다.

'여자 주인공도 같이 있어야 하는데, 남자 주인공밖에 없단 뜻이지.'

고로 여자 캐릭터에 대한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고로 이 게임의 진도는 도중에 멈춘 상태였다. 아무리 게임을 진행하고 싶어도 여자 캐릭터가 없으니 마치 만들다 만 게임처럼 진행이 무리였던 것이다. 민국은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가늠했다.

'이 게임 캐릭터 속 여자였구만!'

애초에 현재 눈앞에 있는 그녀에 대한 이목구비나 기타 설명 같은 것들, 모두 기존에 읽어 보았던 여자 주인공 캐릭터 설정집에 적힌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약으로 인해 실존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으음, 역시 여자 주인공답게 예쁘긴 하지만.'

"왜 그렇게 쳐다보아요? 민국 님 너무 예쁘시다고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럽사와요~."

민국은 왠지 모르게 뿌듯함을 느끼면서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왠지 이런 캐릭터 개성… 지금껏 보았던 여자들 중에는 없던 것 같다. 뭔가 2D 캐릭터에게만 존재할 듯한 성격이라고 할까.

'그럼 이 캐릭터가 날 좋아하는 이유도 간단하겠군.'

민국은 다시 고개를 돌려 모니터 쪽을 돌아보았다. 이 캐릭터, 그러니까 이름이 최설화다.

최설화가 민국을 좋아하는 까닭은 간단했다. 본래 남자 캐릭터 주인공의 이름은 백남. 이목구비도 성격도 키도 모두 민국과 달랐었다. 하지만 민국의 계속되는 때쓰기로 결국 유이는 민국을 이 게임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름부터 시작해서 이목구비, 성격, 키 모두 일치로 해서 말이었다.

"민국니임~."

그래서 지금 이렇게 민국에게 느닷없이 안기는 것도, 가슴팍에 볼을 대고 웃음 짓는 것도, 모두 게임의 주인공이 민국과 판박이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판박이가 아니라 애초에 서민국은 게임의 주인공이었으니.

'근데 이 여자는 게임 속에서 나온 걸 알고는 있나?'

민국은 불현듯이 떠오른 의문에 자신에게 안겨 있는 여자의 어깨를 천천히 밀었다. 가능한 한 껴안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은별과 예나에게 뭔가 큰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저기요 잠시만 뭐 좀 물읍시다."

"뭐예요 민국 님? 설마 제 바스트 싸이즈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와… 이 여자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금방 알아버리시네."

"후훗, 민국님에 대한 건 수첩에 하나 하나 써두니까요. 민국 님에 대해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민국의 볼에 손을 슬며시 갖다대는 수준이다. 민국은 꿀꺽하고 숨을 삼켰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자기 자신을 타이르면서 그녀에게 묻는다.

"혹시 자신이 게임 속에서 나온 캐릭터라는 건 아십니까?"

"네 알아요 민국 님."

"헐, 알고 있는데 상관 없으세요? 게임 상 주인공이랑 나랑 다를 텐데."

그 말에 그녀가 곧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민국 님은 민국 님이잖아요?"

"……."

"현실 세계의 민국 님이든, 가상 세계의 민국 님이든 저에겐 다 똑같은 제 사랑이랍니다~."

"으오오오오!"

민국은 순간 저도 모르게 모에함을 느꼈다. 밝은 눈웃음과 함께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급속도로 흥분한 민국은 차마 껴안지는 못하고 안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오늘따라 유난히 맑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2D 최고!!!!!!!!!!!!!!!!!!!!!!!!!!!!!!!!!!!!!!"

근처에 얼씬거리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필시 취향은 존중하지만 정상은 아니란 의견이 나올 대사였다.

"크흠, 어찌 됐든."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위 없는 현자 타임에 들어간 민국은 팔짱을 끼면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앞에는 무릎을 꿇고 슬그머니 웃고 있는 그녀가 앉아 있었다.

"잘 들으십쇼. 당신은 이곳의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게임 세계, 그러니까 다른 세계의 인물이지요."

"네 그래요~."

"그러니까 게임 세계의 주인공이랑 제가 같다고 해서 굳이 게임 세계의 주인공처럼 저를 대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민국 님?"

"더 사랑해주시면 됩니다."

그 말에 '민국니임~.'하면서 민국을 꽈악 껴안는 설화였다. 민국은 순간 안기는 찰나 그녀의 풍만한 바스트가 자신의 면면을 비비자 '으헤헤헤'하고 저도 모르게 헬렐레한 얼굴을 지었다. 그러다 곧 고개를 젓고는 중얼거린다.

"아니, 이게 아니지."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찌 됐든 당신은 10일 후면 다시 게임 세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고로 이곳 실존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저에게 너무 이러실 필요 없다는 겁니다."

"이쪽의 민국 님은 대범하지만 약간 겸손하시네요~."

"그렇습니까? 하하, 원래 잘난 사람이면 대범하고 겸손도 해야죠."

또다시 칭찬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좋아라 하는 민국이었고, 한 쪽 입을 가리고 '후후'하면서 재미난 듯 웃는 설화였다. 다시 정신을 차린 민국이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민국 니임~. 저는 어느 세계든 민국 님은 민국 님이고, 민국 님이 어디 있든 그저 따라갈 것이랍니다."

"예. 그러니까 저쪽 민국 님이 있는 세계로 돌아가시면 된다 이 말씀입니다. 자, 돌아가십쇼."

10일 동안 예쁜 2D 캐릭터를 실존시켜서 노닥거린다면 재밌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것은 민국이 의도치 않은 사고였기 때문에 정리 할 필요성이 있었다. 비록 약도 다 날려 먹었고 아깝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은별이나 예나에게 보여준다면 뭐라 설명할 방도가 없었으니.

"어떻게요?"

"앵?"

"어떻게 돌아가나요 민국 님?"

민국도 몹시 당황했다. 설마 소환된 캐릭터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설마 스스로 못 들어갑니까?"

"??"

설화가 곧 '쿡쿡'하고 귀엽다는 듯 웃음 짓다가 말했다.

"민국 님~ 모니터에 들어갈 수 있는 일은 불가능해요~."

"……."

아니, 그 불가능을 이룩시킨 캐릭터가 바로 여기 있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민국은 결론을 도출했다. 이 캐릭터, 최설화는 게임 세계로 돌아갈 수가 없다. 자의적으로, 원해서 진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10일 동안은 이 캐릭터를 데리고 살아야 한다. 은별과 예나에게 들키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은별과 예나에게 들키지 않고!!!!'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난이도의 퀘스트였다. 예나는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은별은 어떻게 넘어간단 말인가! 몇 번이고 연거푸 언급되었던 그놈의 촉! 그 촉 하나 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기가 막히고 매서운 은별이었다.

그런 은별에게서 과연 이 여인을 어떻게 숨길 수 있단 말인가! 그냥 확 소개시켜주자니 또 엄청나게 으르렁거릴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최설화 라는 캐릭터는 현재 이 세계에서만큼은 어디 오갈 데도 없는 인영 아닌가?

"민국 님 그렇게 고민하시는 거 보니 귀여워요~."

"끄응."

귀여운 거로 따지면 최설화도 만만치 않았지만. 일단 민국은 결론을 내렸다.

"우선 제 여자 친구들에게 얘기하러 갑시다."

"네? 여자 친구요?"

그 말에 즉각 놀란 눈빛으로 반응하는 최설화였다. 민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피한다 한들 답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숨겨보려고 해도 못 숨길 테고, 숨기다가 들키면 더 크게 혼날 것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당장 두 사람에게 가서 엎드려 비는 게 최우선일 것이다.

그 후가 좀 걱정되긴 했지만.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민국의 행세에 설화가 의미를 모르겠단 얼굴을 지었다.

"예. 그쪽 세계 주인공은 아다지만 저는 후다입니다."

"……."

"그리고 여자 친구도 무려 두 명이나 있는 하렘왕이지요 엇흠."

하렘왕보단 개새끼가 어울렸지만 말이다. 어쨌든 민국의 그 말에 쿠궁! 하고 날벼락을 맞은 듯한 얼굴을 짓는 설화였다. 그러더니 곧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다. 민국은 갑작스런 그녀의 변화에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찰나, 설화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뻐했다.

"여자 친구 두 분에게 새로운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주시려는 거죠?"

"……."

"설마 민국 님이 다른 세계 민국 님이랑은 조금 다를 거라 생각은 했지만~ 육식계의 능력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가상 세계의 민국은 아다에다가 초식계 캐릭터였으니 말이었다. 어찌 됐든 설화는 완전히 자기 뜻대로 착각하는 파인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