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309화 (309/369)

309화

"다녀왔도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온 민국이었다. 유이의 제작된 게임 루트1의 파일이 담겨 있는 usb를 들고.

"크흐흐흐흐."

할 것도 없는 지루한 인생! 드디어 생에 처음으로 서민국이 주인공인 게임이 나온 셈이었다. 물론 현대왕을 주인공으로 한 RPG 툴의 게임은 몇 번이고 나온 적이 있었다.

어지간히 인기가 많은 현대왕이었으니까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팬들이 만든 소소한 게임 말고, 새로운 툴을 기반으로 제작된 유이의 게임은 나중에 많은 사람들에게 유포될 것이었다. 그리고 기본 디자인 퀄리티만 봐도… 정말이지 인기를 못 얻을 수가 없는 게임이었다. 그런 게임에서 스토리상의 주인공이 되다니. 민국은 정말이지 자신이 대견해질 지경이었다.

"어쨌든 합시다."

라고 말하면서 안방으로 들어가던 찰나였다. 막 책상에 usb를 내려놓고 컴퓨터 전원을 키려는 그때, 우우우웅하고 휴대폰이 울려왔다.

"……."

민국은 그 휴대폰의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침묵했다. 잠시 후 그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고는 그냥 모른 척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동이 끊기자마자 다시금 울리는 휴대폰. 민국은 또다시 발신자가 같음에 징글징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밥에 빌어먹을."

기존에 약속한 게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뒤로 뺄 수는 없었다. 애초에 선물을 주면 자신도 꼭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진 여자였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살려주다 못해 시간까지 돌릴 수 있는 그 대단함을 비추어 볼 때… 자신이 그녀의 노예가 되어 몇 년을 고생하는 것보단 훨씬 갚어치가 있는 편이었다. 고로….

"예예, 갑니다요!"

결국 민국은 책상 위에 올려둔 usb를 뒤로하고 거실로 뛰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실로 뛰어나감과 동시에 현관문 근처에 달려 있는 문. 흑설 공주가 있는 그 문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여 왔습니다요."

"숨이 많이 차보이는구나."

숨이 찬 척 하는 것뿐이다. 고급스러운 침대에 편안히 앉아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있던 그녀를 향해 헉헉거리던 민국이 방금 들어온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집에서 1000m는 떨어진 곳이었는데 마님의 연락이 오는 순간 곧장 뛰어왔죠. 결코 받기 싫어서 안 받은 게 아닙니다."

"그렇구나. 대견스러우니 상을 줘야겠구나."

흑설 공주는 형언할 수 없는 산뜻한 미소와 함께 들고 있는 와인잔을 건네 보였다. 그러나 민국은 일절 양손으로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공주느님의 부드러운 손길이 담겨 있는 그 와인잔을 저 같은 머슴이 만지는 것은 세상의 어떤 범죄들보다도 추악하고 사악할 것입니다!"

"후후."

실로 재밌는 아이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런 흑설 공주에게 비위를 맞추고 있는 민국 입장에선 정말이지 죽을 노릇이었다.

'무슨 날마다 부르고 있냐!'

심지어 별 것도 아닌 일로 자길 불러서 일을 시키곤 하였다. 가령 안방에 있는 최고급 와인을 거실까지 갔다 주라던가, 집사를 대신해서 회사의 정리된 프린트 파일을 갔다 주라던가. 이건 이거 나름대로 고역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혹여 힘들면 말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어이구, 힘들긴요. 저 같은 하등 미천한 종족 입장에선 마님의 굵고 강직도 있는 명령은 따스함 그 자체입니다."

"후후."

흑설 공주는 웃음 지으면서 민국의 비위 맞추는 것을 구경했다. 정말이지 속내를 모를 여인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속으로 빠득빠득 이를 갈던 때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고생한 답례로 선물을 주려고 한단다."

"어이구 뭐 그런 것까지야… 앵? …선물이라고라?"

민국은 순간 당황해서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왜냐하면 선물이란 것과는 일종 관계가 없을 줄 알았던 여인 같았으니까. 흑설 공주는 그 표정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을 도와줄 직원이기도 하고, 직원에게 일종의 해택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

앞으로도라는 말이 상당히 거슬렸으나 그래도 일단 기대해보는 민국이었다. 엎드려 절을 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민국은 대답했다.

"아이고야, 굳이 그런 해택까지는 필요도 없는…."

"그럼 괜찮은 것이느냐?"

"아니 그렇다고 해서 해택이 없다고 말한 적은 없지요. 그냥 필요없다고 한 번 튕겨봤을 뿐."

흑설 공주는 슬그머니 미소 짓다가 손에 쥐고 있는 무언가를 민국에게 건네는 시늉을 하였다. 민국은 아직 그 물건을 받지 않고 흑설 공주의 손바닥에 있는 그 물건을 보더니 곧 의문의 눈길을 지었다.

"이게 뭡니까?"

"신비한 액체가 담긴 병이란다."

신비한 액체가 담긴 건 눈으로만 봐도 알겠다. 뭔가 무지개 빛 색깔이 담겨 있는 액체였는데, 딱 봐도 독극물이나 염산 류 같았다.

"독극물이나 염산은 아니니까 안심해도 된단다."

"히익, 사스가 흑설 공주."

"후후. 이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끔 만들어주는 물건이란다."

민국은 그 말에 더 깊은 의문을 가졌다.

"그게 무슨 말이랍니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존재하게끔 만들 수 있단 뜻이란다."

"호옹이?"

민국은 다른 의미로 눈을 크게 떴다. 하기사 사람도 살리는 양반인데 그런 신비한 일도 못 만들어낼 리는 전무했다. 하지만 여러모로 신기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었다.

"다만 기간은 열흘. 10일이라는 유효 기간이 존재하지."

"호오, 10일 동안 제가 무엇이든 이 약을 이용하면 원하는 무엇이든 실존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단 뜻입니까?"

"그렇단다."

요컨대 이러하다. 모니터에서 나오지 않는 당신의 여자 친구도 흑설 공주가 준 약을 이용하면 언제든지 실존하는 인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다만 10일 한정이라는 기간이 있었다. 아무래도 실존하지 않는 인물을 실존하게 만드는 만큼 그 정도의 유효 기간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슈밤, 그럼 이거만 있으면 애니메이션 캐릭터도 다 소환할 수 있다는 거네.'

심지어 액체였기 때문에 한 방울 한 방울만 톡 떨어뜨려도 효력이 있었다. 요컨대 현대 과학으론 불가능한 굉장한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흑설 공주 딴에선 그것이 장난감이나 다를 게 없었으니, 돈을 버는 것이야 그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인 게 자명했다. 이윽고 민국이 그 병을 넙죽 받은 다음에 중얼거렸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사용법은 액체를 투여하기만 하면 된단다."

"넵, 마님. 역시 제 마님이십니다. 앞으로 평생을 함께 하겠습니다."

흑설 공주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고, 민국은 오늘 볼 일은 이것으로 끝이구나 싶어 문을 열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붙잡는 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음에 민국은 만세 삼창을 외쳤다.

"허허, 슈밤. 어찌 됐든 굉장한 아이템 득템했네."

흑마법사에게 아이템을 받는 것이야 몇 번이고 있던 일인지만, 설마 흑설 공주에게도 이런 식으로 대우를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다소 일을 하면서 노예처럼 부려진다는 점에서는 명확한 다른 점이 있었지만.

"일단 물건에 뿌리는 건 효과가 없다고 했고."

그러하다. 물건에 뿌려봤자 그 물건이 갑자기 실존하는 인물로 변해서 모에모에한 느낌을 주진 않는다.

물건엔 일말의 효과도 없었고 어디까지나 실존하지 않는 2D 인물이나 캐릭터에게만 효과가 있었다. 고로 민국은 어떤 인물에게 사용할까 하다가 곧 자신이 이전에 보았던 성인 애니메이션의 한 새끈한 캐릭터를 떠올렸다.

"크흐흐흐…."

생각만 해도 절로 침이 나옴에 소매로 닦는 민국. 은별에게 들키면 맞아 죽겠지만 그래도 어디 한 번 도전은 해보는 게 남자로서의 철부지 같은 야망 아니겠는가.

"좋아! 한 번 해보는 거시다!"

이윽고 신명나게 안방으로 들어가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그때 민국은 차마 알지 못했다. 안방에서 자신이 어이없이 넘어질 것이라는 걸.

"우와아악!"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약을 하염없이 공중에 흩뿌리게 될 것이라는 걸. …넘어짐과 동시에 손에 힘이 풀린 민국은 그 약을 그대로 공중에 던져 버리고 말았고, 전원이 꺼져 있는 모니터 쪽으로 있는 힘껏 날아간 그 병은 액체들을 공중분해시키면서 소비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어이없이 바닥에 넘어진 민국이 '아이고 내 다리야.'하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찰나였다.

"헐."

곧 눈앞에 들이닥친 참담한 광경에 할 말을 잃는 민국이었다. 마치 로또 2등에 당첨된 종이를 까마귀가 물고 하늘로 가져갔을 때의 표정 같았다. 이윽고 처참해진 표정으로 막연히 앉아있던 민국이 머리를 부둥켜 쥐면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아노돼애애애애!"

안타까움에 절규의 외침을 지르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돌릴 수 있는 타임리프라던가, 그런 능력은 민국에게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그저 비명을 지르며 책상으로 뻗어 떨어진 액체들을 어떻게든 담아내려고 하는 수밖에.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한 번 흩날린 액체는 금세 시들어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흡수력이 굉장히 빠른 것만 같았다. 이윽고 민국이 절망하면서 다시 머리카락을 꽉 쥐면서 소리쳤다.

"으아아아아!"

오죽하면 구멍 너머 방에서 공부하고 있던 예나가 반응할 정도였다.

"민국아… 무슨 일이야?"

"으아아…."

"……."

계속해서 들려오는 민국의 절망과도 같은 신음 소리에 예나는 결국 구멍을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안방에 있는 민국에게로 걸어간 예나가 그의 참담한 뒷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국아…."

"……."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민국이 괴로워하면 예나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민국은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따뜻한 곳이 필요한 때. 울상을 짓던 민국이 이윽고 예나의 가슴 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으헝헝 예나야!"

"미, 민국아…?!"

예나가 순간 당황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한 듯한 그의 모습에 예나는 얼굴을 붉히던 것도 잠시, 침착하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부모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으응… 다 괜찮을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괜찮아질 거야."

"으헝헝헝."

역시 이유는 묻지 않고 그저 민국을 배려해주는 예나였다. 이런 예나의 장점은 오로지 예나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예나의 배려로 조금 진정된 민국. 이윽고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 자기 방에서 공부를 시작한 예나를 뒤로하고, 민국은 흑설 공주의 방과 연결된 문을 돌아보았다.

'다시 받으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애초에 물건 잃어버렸다고 다시 달라고 하면 어느 가게 주인장이 그런 걸 허락하겠는가. 민국은 왜 하필이면 안방에서 넘어졌냐면서 자신을 향해 깊은 분노를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리 분노하고 고뇌해도 결과적으로는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크으으."

아쉬움과 한탄이 섞인 신음을 내뱉으면서 민국은 저벅저벅 천천히 안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안방에 도달해서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

민국은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안방엔 분명 혼자만 있어야 할 터인데… 본 적 없는 처자가 안방에서 멋지게 몸을 돌리면서 웃고 있던 것이다.

"호호호호~."

"……."

"앗? 민국 님?"

그녀는 핑크빛 드레스에 예나와는 조금은 다른, 활발한 느낌이 넘치는 요조 숙녀 같았다. 동시에 머리는 예쁜 머리핀으로 땋아 말린 모습이었고… 현실에 맞지 않는 노란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민국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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