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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307화 (307/369)

307화

<세계 왕의 표본>

그러니까… 세상이 꼭 한 가지일 필요는 없다.

평행 세계라는, 또 다른 나의 세계가 0.01초마다 존재하다고 가정하면….

그런 세계가 흑마법사의 말대로 실존한다고 가정하면, 굳이 또 다른 세계가 등장하는 것도 융통성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몬스터들이 현대에서 난리 부르스를 치며 사람들을 해치는 세계도, 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평생을 함께 하는 달콤한 세계도, 혼자 평생 동안 고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지옥 같은 세계도, 결코 개연성 없고 거짓된 것은 아니란 뜻이다.

고로 내가 앞으로 겪게 될, 혹은 겪고 있을 세계도, 절대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내가 사랑하던 여인들이 사라지고, 애초부터 그녀들은 없던 세계.

그리고 본래의 '나'조차도 없어진 세계.

그 세계가 절대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그 세계가 사라지고, 또 다른 세계가 나를 빨아들여 나의 본래 모습을 잊어버리게 했을 때, 그 슬픔을 잊어버린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모두, 거짓말이다.

*

- 따르르르릉!

자명종 시계가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이불에서 부비적거리다가 눈을 떴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눈을 부비던 나는 시끄러운 자명종 시계를 끄고 다시 자리에 드러누웠다.

"……."

나는 평범한 남학생이었다. 뭐 그냥 교내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그런 남학생 말이다. 나이는 스물 한 살의 대학생이었고, 현재는 자취를 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지방에서 일을 하고 계셨으며, 나는 힘들어하는 부모님도 모른 채하고 너저분하게 청춘을 보내는 볼 일 없는 놈이었다.

"아앙~."

"……."

"거긴 만지면 안 되요오~ 아앗? 자는 척하시면서 자꾸 저를 매혹하시다니~."

그리고 그런 나에게는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것이었다.

"아앙 너무 만지는 센스가 남다르세요오~."

"자꾸 그러면 진짜로 덮친다?"

"아앙… 백남 씨에게 만지작거려질 수 있다면야~."

"……."

나는 내 손을 자기 얼굴에 갖다대게 한 다음 부비부비거리고 있는 여성을 보았다. 얼굴을 몹시 붉게 물들이고 변태처럼 느끼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아침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 지경이다. 나는 안 그래도 좁은 1인용 침대에 나를 얼싸안고 있는 그녀 덕분에 땀이 진득할 지경이었다.

"일단 이거 놔봐…."

"안 돼요~ 못 놔요~."

"으아아, 놔봐 조옴."

가까스로 그녀에게서 벗어나는 나였다. 얼마나 유혹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는지 그저 달라붙는 것만으로도 이곳저곳 감촉이 느껴질 지경이다. 아찔한 상상을 하다가 침대에서 떨어진 나를 보고는 상체를 일으키는 그녀. 곧 한 손을 입가 근처에 갖다대며 '후훗'하고 웃는다.

"무슨 생각을 하신 거예요? 정말~ 백남 씨도 차암."

"……."

이게 뭔 애니메이션스러운 이야기냐고 따질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말하는 컨데 오타쿠의 상상도 아니고, 누군가가 지어낸 거짓된 가짜 이야기도 아니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현실 속의 나는… 지금도 침대 위에 앉아있는 한 여인에게 청춘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아앙 백남 씨 자꾸 그렇게 쳐다보면 껴안게 되잖아요!"

와락!

"우왁! 저리 비켜 인마!"

나에게로 껴안기는 그녀에게 질겁을 하면서 가까스로 밀쳐낸 나는, 잽싸게 화장실로 튀어 나갔다. 그런 나의 모습에 '어멋!'하면서 놀라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짓는 그녀…. 아침부터 미칠 지경이군.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람.'

그래, 원인을 찾자.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가정 교육을 남다르게 받아왔다.

누군가가 건드리면 가급적 싸우지 말고 이야기로 설득하라고 부모님에게 교육을 받아왔고, 누군가가 나쁜 짓을 해오면 그때야 말로 올바르게 힘을 사용하라고 배워왔다. 부모님의 그런 교육 방식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다만 너무 쓸데없이 정의를 따지는 그 교육 방식이 나에게 한 가지 부작용을 안겨주었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구걸을 하는 거지 신세의 사람을 봐도 그냥 못 지나친다. 그 정도로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었다.

모른 채하고 지나가면 괜히 엄청난 죄를 지은 것 같아 하루동안 죄책감에 자꾸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지하철 길바닥에 누워 있는 거지만 보아도 많이는 못 줘도 500원은 주고 갔었는데….

"에휴."

그런 내 마인드가 기어코 이런 부작용을 일으킨 셈이다. 나는 폭우가 내리는 공터 한 가운데에 비를 맞으며 앉아있는 여자를 발견했었다. 어디 한 번 사건이 있던 날로 돌아가볼까?

'학생, 거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대학교를 마친 나는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가던 실정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집 근처의 공터에 홀로 앉아있는 여자 아이를 발견했었다. 학생 교복을 입고 있었고, 옷이 홀딱 젖어 속옷이 보일 지경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그 장면에 고개를 돌려 길을 지나려는데, 문득 그 여자 아이의 곁에서 이런 저런 말을 건네고 있는 한 아저씨가 눈에 거슬렸다.

'아저씨가 혼자 살거든. 같이 가서 재미나게 놀자. 심심하지 않게 해줄게.'

'…….'

딱 봐도 그 아저씨는 여자 아이의 몸을 탐닉하고 싶은 욕구로 가득 찬 짐승이었다. 그런 짐승의 눈길을 가진 악마가 같잖지도 않은 유혹을 계속해서 던지는데… 신기한 건 여학생은 대꾸도 없는 것이었다.

'…….'

다시금 여학생을 주시하니, 그녀의 초점은 마치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끝끝내 놓아버리고 허망해진 모습이라고 할까…? 나는 그런 여학생을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만 무시하고….'

이윽고 아저씨가 대꾸도 없는 여학생에게 작정을 한 듯, 소매를 잡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저씨의 모습에 결국 참을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에게 어릴 때부터 배워온 교육은 나의 그릇된 행위에 대한 정의감을 꿈틀거리게 만든 것이었다.

"아저씨!"

"히이이익!"

그러나 내가 불러서 놀란 게 아니었다.

- 쿠웅!

갑자기 땅이 크게 진동했다. 덕분에 여학생을 일으키려던 아저씨는 소매를 놓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 역시 순간 비틀거리다가 근처 벽을 붙잡고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뭐지…?

'이건 설마…?'

불행은 적중했다.

- 크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악!"

몬스터의 출현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누구든지 당연하게 볼 수 있는 몬스터. 그러나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몬스터의 등장이 결코 달가울 리는 없었다.

공터 한 복판에 느닷없이 출현한 그 몬스터는 무려 여덟 개의 기다란 촉수를 가지고 있었고, 거대한 눈동자가 이목구비의 전부였다. 치아는 상어의 그것처럼 날카롭고 커다라며 언제든지 사람을 씹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위압감이 강렬했다.

"사, 사람 살려어!"

여학생을 유혹하던 아저씨는 언제 자신만만하게 행동했냐는 듯, 경기를 일으키면서 줄행량을 쳤다. 공터에 혼자 남게 된 여학생은 눈앞에 몬스터가 등장한 것도 모르는지 그저 죽은 초점으로 계속해서 자기 발치만 바라볼 뿐이었다. 뭐하는 거야! 나는 우산을 바닥에 던지고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 크르르르

"……."

- 크아아아아!

천천히 여학생에게로 다가가는 괴물. 여학생도 그제야 기척을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강렬한 포효를 내지른다. 그 기백은 정말이지 근처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몬스터라고 해서 죽을 위기에 놓인 사람을 못 본 채 넘어갈 수는 없다.

나는 그렇게 배웠으니까.

- 캬아아아아!

"……."

이윽고 멍을 때리는 여학생을 향해 여덟 개의 촉수가 직선적으로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나는 제한 시간 내에 여학생의 옆에 도착하여 몬스터를 가로막고는, 중얼거렸다.

"무기 저장."

- 무기를 저장합니다.

- 스킬 발동

- 카앙!

스킬을 발동하자 마나가 소모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완벽히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만일 이 공격을 막지 못했더라면 여학생의 몸은 촉수로 뚫리고 말았겠지. 나는 제한 시간 내에 도착했단 사실에 긴장이 풀린 얼굴을 하면서 정면을 노려보았다.

정면의 몬스터는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음에 더욱 강렬하게 포효를 내질렀다.

- 캬아아아아아!

이윽고 녀석이 여덟 개의 촉수를 빠른 속도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캉! 카앙!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 주변에 생기는 한 개의 방패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촉수를 방어하기 시작했다.

방패의 무게는 무려 500kg에 달한다. 아무리 거대한 덩치의 괴물이 내리치는 촉수라고 할 지 언 정, 그 단단함도 이루 말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녀석의 공격이 무효화되는 건 불보듯 뻔했다.

- 캬아아아악!

계속되는 강철 방어에 녀석이 더욱 흥분하면서 포효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건 꺼려하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있는 힘껏 내리치는 촉수가 500kg의 단단한 방패에 가로막히는데, 오히려 지 손이 안 아프면 거짓말인 셈이다.

나는 이제 포기해도 될 때는 되지 않았냐는 눈빛으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 포기는 이르다는 듯 더욱 크게 포효하면서 달려들었다.

"큿!"

난 결국 하는 수 없다는 것처럼 다음 스킬을 발동시켰다.

"무기 저장."

- 두 번째 무기를 저장합니다.

- '칼'이 발동됩니다.

서걱 서걱!

날아들던 무수한 촉수들이 순식간에 허공에서 잘려 나가기 시작한다. 혈액을 흩뿌리며 떨어지는 촉수들에 몬스터가 괴로운 듯 비명을 질렀다. 나는 또다시 체내에서 마나가 극심히 소모되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 나는 스킬을 사용하기가 싫은 것이다. 이 감각이 싫어서.

"……."

하지만 내 스킬은 정말이지 사기였다. 애초에 하늘을 통해 선택된 나의 직업은 전 세계 70억 인구의 인류 중 오직 나 하나밖에 못 가진 것이었으니까.

'크레이지 암즈.'

나의 능력자 직업은 정확히 그것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스킬을 발동하면 몸에 무기가 저장되고, 저장된 그 무기는 나를 공격하거나 혹은 내가 위험하게 판단한 녀석이 있을 시, 재깍 재깍 허공에 등장하여 빛보다 빠른 속도로 방어 혹은 공격을 이행한다.

그것은 소환하는데 드는 마나가 극심하여 나를 녹초가 되게 만들지만, 그래도 실전에서 페시브 형태로 사용될 때에는 최고의 스킬인 셈이었다.

- 캬아아아악!

촉수의 뒤를 이어 빠르게 녀석의 몸이 썰리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썰릴 때마다 흩날리는 무수한 핏물들이 나의 몸에 닿지 않도록 방패가 방어해주었다. 다만 코끝을 스치는 피비린내는 차마 방어할 수가 없었다.

구역질이 맴도는군. 가까스로 참으면서 잠시 동안 지켜보고 있자, 몬스터는 어느 덧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시체가 되어 분질러져 있었다.

"능력…자…."

"……."

그리고 그때였다. 그저 죽은 표정으로 앉아있던 여학생이 처음으로 운을 띄운 것이다. 나는 다시금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학생은 정확히 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

"……."

"저기예요! 저기에 몬스터가…!"

"핫!"

이런! 나는 문득 들려온 사람의 소리에 잽싸게 여학생의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여학생은 나의 완력에 내 쪽으로 끌려 왔고, 나는 부리나케 공터를 벗어나 그녀와 함께 집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발각되어선 안 된다. 이 세계에서 능력자라는 건 다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직업이었지만, 그것은 정부에 허가된 자들만을 기준으로 삼았다.

나는, 적어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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