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304화 (304/369)

304화

4P사건이 있기 전 날이었다.

“마셔! 오함마로 찍어버리기 전에!”

“으아아! 마셔요! 마신다고요! 재촉하지 마세요!”

“어쭈! 잔이 비었잖아!”

“…마셨으니까 비지요 이 사람아!”

“어쭈, 감히 나한테 대들어? 내가 우습게 보인다 이거지?”

“…….”

민철과 철남은 개인 사정으로 먼저 집에 돌아갔다. 술집엔 민국, 은별, 서라, 유이, 이렇게 네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민국은 술에 취한 세 여인의 고약한 술버릇으로 엄청난 시련을 맞보고 있었다.

‘진짜 미치고 환장하겠네!’

“더 마셔!”

“예썰! 마네카썰!”

노기를 띠고 노려보는 유이 덕분에 쉴 틈 없이 맥주를 머금었다.

‘으윽….’

아무리 주량이 센 민국도 슬슬 취할 수밖에 없었다. 안주도 없이 술만 마구 퍼마시는데 안 취하는 게 비정상이었다. 본래 술이란 건 분위기를 타며 즐겁게 마셔야 하는데! 강요에 의해 억지로 마시는 건 정말 아니다!

“더 마시라고!”

셀 수 없을 만큼 마셨을 때였다. 민국은 슬슬 속이 울렁거리자 더 이상 못 먹겠다고 포기 선언을 하였다. 양손을 x자로 만들고 고개를 젓는다.

“못 마시겠…!”

“어쭈어쭈!”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유이였다. 민국은 이곳이 현실인지 환상 세계인지 점차 분간이 안 됐다.

의식도 흐릿해져가 잠에 취하려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겠단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쭈!’거리며 틈도 주지 않고 술을 권하던 유이는 금세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었다.

‘하자…. 하자고….’라며 제안하던 은별도 유이와 마찬가지로 잠에 든 모양새였다.

“오빠….”

그리고 은별의 반대편에 있던 서라. 그녀는 잠에 든 두 여인과는 다르게 눈물을 머금고 계속해서 흐느꼈다. 계산을 위해 일어났던 민국은 결국 중심을 못 잡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서라는 그의 옷깃을 붙잡고 다시금 하소연했다.

“내가… 내가 얼마나 오빠를 좋아하는데….”

“으음, 그래 그래.”

“정말 좋아하는데… 너무해….”

옷깃을 붙잡고 흐느끼는 여인의 얼굴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민국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은별아. 음냐… 나도 좋아한다….”

“…흐윽.”

어디까지나 취중진담이었지만, 술에 취한 그녀로선 상당히 상처가 됐을 대답이었다. 깜빡 졸았던 민국은 다시 한 번 의지를 발휘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계산을 마친 뒤, 일어날 기색도 없는 세 여인을 이끌고 치킨전문식당을 급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현 시각으로 돌아와서….

너무 갑작스럽긴 했다. 택시를 타고 이동 중에 서라의 마음을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

민국이 물었다. 10분이 지난 지금 서라는 많이 진정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근처의 한산한 공터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시커먼 밤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디찼다. 한참을 울었던지라 눈가가 퉁퉁 부은 모습으로 서라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예전부터….”

“예전부터 쭈욱?”

“…….”

평소 활발하고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그녀였다. 허나 지금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마음을 고백하고 부끄러워하는 여자로 바뀌어 있었다. 머지않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눈을 가늘게 뜨고 서라를 응시한다. 울먹이며 고백했던 기억이 몹시도 창피한지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왜 눈을 안 마주쳐?”

“…….”

그걸 꼭 말해야 알겠냐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솔직히 민국은 실감이 안 났다.

서라는 일반적인 여자 애들과는 다르게 비주얼이 굉장히 뛰어난 편이었다. 은별이나 유이 또한 수려한 외모를 담고 있지만 그녀만은 못했다.

맘만 먹으면 얼굴을 이용해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는 게 서라였다. 어느 연예인들도 감히 그녀를 상대로 외모를 평하지 못할 거라 예상되는데, 그런 그녀가 민국 자신에게 연모를 품고 있었다니.

“정말로 실감이 안 나는데? 서라가 날 좋아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

“술에 잔뜩 취한 채로 훌쩍이면서 ‘오빠가 너무 좋단 말이야 흑흑.’이러고 고백을 하다니. 아~ 실감이 안 난다.”

“그, 그런 건 아님.”

“뭐가 그런 게 아니야 이놈아.”

살포시 그녀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대로 품에 기대도록 만든다.

당돌한 행동에 일순간 서라는 경직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포근함을 느끼고 적응하는 태도였다. 민국은 씩 웃음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서라는 친 남매 같은 동생이었다. 실제 친 여동생처럼 투닥거리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느낌이 많이 비슷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서라를 여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민국 역시 서라를 단순한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니란 뜻이다.

“바람이 춥네. 넌 안 춥냐?”

“추, 추운 것 같기도 하고 좀 거시기 한데….”

“으, 난 너무 추워서 난로 좀 써야겠다. 이리 와라 내 난로야.”

서라를 와락 두 팔로 껴안았다. 꼬옥 안아 보이는 민국의 행위에 서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살짝 매료된 얼굴로 초점을 떤다. 민국과 서라는 잠시 눈을 감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추위를 달랬다.

“형….”

“그냥 아까처럼 오빠라 부르지?”

“아, 아님. 지금은 형이라고 부르겠음.”

조금 간격을 벌려 서라와 마주했다. 상기된 얼굴로 민국을 올려다보며 서라가 사과했다.

“미안함….”

“갑자기 왜?”

이유를 물었지만 답해오지 않았다. 살포시 민국의 몸을 밀어내는 서라였다. 그리고 슬쩍 뒤로 물러나 앉는다. 그 모습에 민국은 의문을 갖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유를 깨달았다.

“역시, 여자 친구가 있는데 이러면 바람 펴는 거겠지?”

“…….”

서라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만일 여기서 두 사람이 몰래 사귀기라도 한다면, 그건 은별을 향한 큰 상처가 될 것임을 말이다. 두 사람은 오로지 사랑이란 감정 하나에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비인도적인 짓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좋아하는 마음을 접을 것도 아니잖아?”

“…….”

“오, 아니면 어떻게든 한 번 잊어보려고?”

민국의 질문에 서라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님.”

“그럼 어떻게 하게?”

입술을 오므리고 피고를 반복한다. 신중히 고심 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민국이 피식 웃음 지었다. 이윽고 서라가 상당히 음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형은… 은별이 누나가 있잖음….”

“그렇지. 은별이가 내 여자 친구인 건 변함이 없지.”

그 말에 서라가 눈에 띌 정도로 고개를 푹 내려숙였다. 평소에 보여준 적 없는 행동에 민국은 신기함과 재미를 느꼈다. 더 놀려먹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하지만 놀려먹는 것은 나중에도 할 수 있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았다.

“나 서민국이야. 파뿌리 TV에서 막장으로 제일가는 비제이라고. 그런 내가 이번 문제에 대해 해결 방법을 하나도 생각 안 했을 거 같냐?”

“…….”

서라는 민국이 은별을 포기하고 자신한테 오길 내심 바라고 있으리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지극히 생기는 당연한 마음이니까. 허나 민국은 다른 방안을 생각 중에 있었다.

남들이 미친놈이라 삿대질하고 뭐 저런 등신이 다 있냐며 욕을 해대도, 민국은 그 미친 짓을 한 번 시도해볼 계획이었다. 세 여인이 있는 앞에서 말이다.

“서라야.”

서라를 불렀다. 어느 틈에 민국은 다시금 서라와 거리를 좁히고 앉았다.

“네가 허락만 한다면 난 한 번 내 방식대로 일을 해결해보고 싶어.”

“……?”

“물론 두 여자에게도 허락을 받아야겠지. 실패할 가능성도 많을 거야. 하지만 한 번 도전해보고 싶어. 난 원래 그런 녀석이니까. 다만 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너도 한 가지 각오를 해야만 해. 지금까지 숨겨 두었던 비밀을 밝혀야 한다 이 말이야.”

“…….”

“괜찮을까?”

스윽 서라의 손을 붙잡으며 부탁했다. 그녀의 초점이 강하게 흔들렸다.

심하게 갈등하고 있단 뜻이다. 사실상 일반적인 관점으로 볼 때 민국은 서라를 붙잡을 수 없었다.

비주얼 따위나 기본적인 스팩 관계없이, 민국에겐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서라도 그 사랑스런 여인에 포함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그를 가질 수만 있다면….

“응….”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 *

다음 날, 모처럼 찾아온 주말이었다. 민국은 은별과 유이에게 따로 연락을 시도했다. 어제 있던 일에 대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당연지사 두 여인은 곧잘 전화를 받아 보였다. 그리고 민국이 정해둔 장소에 한정된 시간까지 오기로 약속을 잡았다.

‘좋았으.’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멋진 슈트 차림새로 집을 나왔다. 그리고 약속 장소로 향해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분위기의 커피숍을 찾았다. 테이블 한 석을 잡은 민국은 다시 한 번 두 여인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에, 자신이 있는 근처의 커피숍으로 와달라 부탁했다. …또각또각.

‘왔군.’

머지않아 두 여인이 일제히 커피숍으로 들어왔다. 함께 약속을 하고 온 것 같진 않았다. 우연히 시간이 일치한 것 같았다.

“와! 역시 은별 아가씨는 오늘도 눈이 부십니다! 태양보다 활활 뜨겁군요!”

“부자연스런 칭찬은 하지 말지?”

쌀쌀맞게 대하는 은별이었다. 어제 일로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민국은 씩 미소 지으며 은별의 복장을 차레대로 훑었다. 케주얼한 핑크색 꽃무늬남방에 타이트한 느낌의 푸른색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시상식 때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많이 신경 쓴 모양이다.

“와….”

“저기 얘 예쁘다….”

다른 테이블 석의 남자 일행들이 은별을 훑으며 소곤거렸다. 민국은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겨 당당히 가슴을 폈다. 한 미모 하는 여자 친구를 둔 것은 남자로서 뿌듯한 일이었다.

“유이 씨도 오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 가슴하시는 군요?”

“…….”

다음으로 유이를 훑었다. 그녀는 블랙 후드티에 흰 소매티를 있었고, 종아리 라인이 드러나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복장에 대해선 칭찬도 않고 오로지 가슴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니, 유이는 무어라 대꾸할 생각을 못했다.

솔직히 얼굴도 예쁘고 입은 옷도 예쁜 편에 속했지만, 가슴이 워낙 부각되다 보니 말이다.

“우와.”

“대박….”

벌써 몇몇 남자들이 유이의 가슴을 보고 의논 중에 있었다. 이따금씩 음흉하게 웃음 짓는 남자들을 보노라면, 유이는 마냥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윽고 민국의 저질스런 멘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은별이 찌릿 쏘아보았다. 민국은 피식 웃으며 비어 있는 옆자리를 가리켰다.

“은별아, 이쪽으로 와서 앉아.”

“흥.”

깔끔하게 무시해주고 민국의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유이 또한 은별이의 옆자리에 착석하는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두 여인 모두 민국에게 상당히 불만이 쌓인 모양이었다.

‘지금도 이 정도면 이따간 장난 아니겠는데?’

후에 있을 일을 떠올리니 절로 혀가 둘러졌다. 하지만 민국은 인제 와서 계획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자고로 남자란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맞부딪히는 근성과 끈기가 필요했다.

“일단 커피부터 시킬까?”

“됐어. 커피 마시러 온 거 아니잖아.”

은별이 지적했다. 민국이 당돌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지 그럼! 노래방에 가면 춤을 춰야하듯이, 클럽에 가면 노래를 불러야 하듯이, 커피숍에 가면 커피를 시켜야 예의지!”

“…참 멋진 예의시네요. 알았어, 그럼 뭐 시킬 건데?”

퉁명스런 은별과 유이에게 맛나는 커피를 시켜주는 민국이었다.

“역시 두 사람 다 예의 바르고 아리따운 여인들입니다. 이런 여인들과 같은 자리에 있으니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군요?”

“싸구려 멘트는 필요 없거든? 빨리 본론이나 말해.”

은별의 날카로운 지적이 있었고, 유이도 말은 안했지만 그러길 바라는 눈치였다. 민국도 더 이상 질질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듯

‘후우.’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당면의 두 여인을 번갈아 응시하며 말했다.

“어제 일로 참 많은 생각을 했어.”

“…….”

“그리고 오늘 아침, 결정을 내렸다.”

“뭔….”

은별이 뭐냐고 물으려 했다. 그 순간 민국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잠깐! 일단 내가 생각한 결정을 듣기 위해선 한 사람을 소개시켜줘야 돼.”

“…….”

“아마 많이 놀랄 거고, 배신감이 들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그 애 입장에선 정말 많은 고심을 하고 선택한 거니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줬으면 해.”

그 말을 끝으로 손뼉을 쳤다. 짝짝! 두 여인으로선 도무지 민국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커피숍 내부가 ‘오오!’하고 소란스러워졌다. 남녀 불문하고 사람들의 변화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하는 은별과 유이. 머지않아 그들이 향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린 은별이 눈을 크게 떴다.

“…….”

또각 또각. 척 봐도 어려 보이는 동안 피부에 굉장히 수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성이었다. 몸매도 나올 곳은 나와 있고 빠질 곳은 빠져 있는, 그야말로 천상미인. 하지만 은별이 놀란 것은 단연 그 때문이 아니었다.

“쟤는….”

“앉아.”

민국이 말했다. 자연스레 은별의 시선이 민국에게로 조준됐다. 어느 틈에 민국의 테이블에 도착한 그녀는 비어 있는 그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

“…….”

은별과 유이가 차마 믿지 못할 눈빛으로 주시하는 가운데, 민국이 짐짓 웃으며 옆자리의 그녀를 소개했다.

“소개할게. 강서라야.”

“…….”

“시상식 때는 남자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실은 여자애야. 목소리만 조금 남자 같을 뿐이지.”

천상미인의 등장에 커피숍 사람들은 남녀 불문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나같이 민국의 테이블에 관심을 쏟는 모습이었다. 은별은 그 관심이 마냥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머지않아 그녀가 가늘어진 눈빛으로 맞은편의 서라를 쏘아봤다.

“역시….”

“…….”

어느 정도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는 눈빛. 민국의 집에서 만났던 기억과 화장실에서 만났던 기억을 통해 추리했던 것들이 결코 틀린 게 아니었음을 이제 와서 확신했다.

“그리고 인터넷에선 비제이 콩딱지로 활동 중이지.”

“…….”

은별은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유이로선 정말이지 큰 충격을 먹은 듯 벙찐 표정이었다. 은별은 몹시 불쾌함을 느꼈다.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이래봬도 은별 역시 서라에 비해 조금 부족할 뿐이지, 외모로 많은 남자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신세였다.

그녀가 불쾌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어째서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냐는 것.’

그 의문에 민국이 답했다.

“사실 어제 서라도 모텔에 있었어.”

“…….”

“다만 서라는 남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먼저 돌려보냈던 거야. 사실 모텔에 있었던 건 우리 세 명이 아니라 애까지 포함해서 네 명이었던 거지.”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 은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허나 초점은 강하게 흔들렸다. 질근질근 입술을 깨물던 은별이 천천히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흠흠!”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지만, 오히려 바라고 있었다. 짐짓 헛기침하던 민국이 당면의 두 사람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야.”

“…….”

“세 여자 모두.”

나쁜 짓을 하면 나쁜 놈이다. 미친 짓을 하면 미친놈이다. 민국은 차라리 나쁜 놈보단 미친놈이 되길 택한 것이다.

“내 아기를 임신해라. 내가 잘해줄게!”

“그렇게 할게.”

“정말?”

“응….”

은별이 부끄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유이 역시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눈빛이었다. 민국은 흡족한 마음으로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소파의 세 여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가자!”

“…어딜?”

“모텔로! 나의 위엄을 보여주지!”

과한 발언이었지만, 민국의 과한 행동이 결코 싫진 않은 모양이었다. 이윽고 세 여인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슬그머니 민국을 따라 커피숍을 나온 여인들은 모텔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해줘야 해? 한 번 경험했다지만 지금 내 입장에선 처음이니까….”

“알았어. 유이 씨도 준비됐죠?”

“…네.”

유이가 수줍은 얼굴로 흰 천을 들어 몸을 가렸다. 허나 풍만한 가슴이 부각되는 건 숨길 수 없었다. 민국은 씩 웃으며 나머지 두 여인을 훑어보았다. 은별은 어느 틈엔가 침대 위에 누워 라인이 살아 있는 종아리를 돋보이고 있었다. 서라도 옷을 벗더니 창피한 듯 두 손으로 몸을 가리며 은별의 옆에 누웠다.

“형….”

“왜 서라야.”

“살살해줘.”

기대 반 불안 반이 어린 눈동자로 주시하는 서라에게 흥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은 냅다 도약하여 두 여인을 덮쳤다.

“진정한 유토피아를 선물해줄게!”

“꺄앗!”

“아앙!”

“하하하하하! 너희들은 다 내꺼야!”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연예인 저리가라 할 법한 외모의 여인들이 민국의 아내가 된다니!

민국은 진정 이게 현실인가 실감이 안 났다. 하지만 서로 몸을 접촉하면 접촉할수록 이것이 비로소 현실임을 직감하고 흡족해하게 됐다.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

민국이 바라던 꿈은 바로 그것이었다.

“계속해봐.”

그러나 꿈은 꿈일 뿐 실현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민국의 제안을 아무 고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건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었던 서라는 가만히 앉아 있었고, 은별은 불같은 눈빛으로 팔짱을 끼고 매섭게 쏘아보았다. 유이는 굳이 대화를 나눌 가치도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민국은 살짝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에라이.’

민국은 상상의 날개를 이만 그쳤다. 예상한 전개였지만 바라던 전개는 아니었다. 그래도 끝까지 의견을 피력해보자고 결정했다.

“너도 내 애인이 되고 서라도 내 애인이 되고, 유이 씨도 내 애인이 되는 거야.”

“그래서?”

“나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거지! 세 사람 모두 내 아기를 임신하고! 나와 부유하게 사는 거야!”

은별의 눈빛이 한층 예리해졌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게 끝이야?”

“음. 결혼 할 때 주례를 누가 봐줄지 의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결혼 순서도 정해야 할 것 같고.”

민국의 장난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은별은 재촉하듯 얘기했다.

“또?”

“…….”

“계속해봐, 어디.”

휴화산이 등을 지고 있었다.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화산은 머지않아 뜨거운 용암을 분출할 것 같았다. 요컨대 은별은 한계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사랑합니다 은별 님.”

“…….”

“부디 내 청혼을 받아주세요.”

훗날 결혼까지 하자며 청혼을 한 것이다. 커피숍에서, 한 여인이 아닌 세 여인을 상대로 말이다. 당연히 여자 입장에선 지극히 어이가 없고 화가 나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민국의 여자 친구에 속하는 은별로선 한없이…. 은별은 천천히 서라를 돌아보았다.

“너는 저 제안을 받아들인 거야?”

“……."

서라는 침묵했다. 허나 그것이 긍정의 표시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은별이 살짝 사나워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미쳤어?”

솔직히 서라도 그의 제안을 완연히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한 남자에게 세 여자가 들러붙어야 한다니? 현실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서라가 민국의 제안에도 일체 반발하지 않는 이유는, 은별이 먼저 여자 친구로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빼앗을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안에 포함되겠다! 그것이 서라의 현 목적이었다.

“서민국. 너 제정신이야? 어떻게 그런 제안을 할 수가 있어?”

“허허. 왜 그러시나 은별 양.”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지금 뭐하자는 거야?”

유이는 흘긋 고개 돌려 옆을 보았다. 시야에 담게 된 은별이의 얼굴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아기를 임신하라고? …그래, 어차피 그런 노골적인 멘트는 네가 항상 쓰던 거니까 진부하게 넘어갈 수가 있어. 근데 뭐? 여기 있는 여자들을 다 네 여자로 만들고 싶다?”

민국도 진지하게 임하기로 결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엉.”

“엉이 아니잖아!”

은별이 버럭 소리쳤다.

“너 지금 장난해? 내가 바람 펴는 남자 질색이라고 구구절절 말했지!”

“그래서 바람 펴지 않고 진솔하게 표현하는 거잖아. 여기 있는 세 여자 모두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내가 일을 저질렀으니까.”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은별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변태적인 남자라 했지만 정말이지 이 정도까지 변태스러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싫어. 난 반대야.”

“왜?”

“왜고 뭐고! 애초에 내가 그런 제안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어? 천만해! 난 절대로 들어주지 않아! …선택해! 쟤야! 나야?!”

손까지 올리며 서라와 자신을 번갈아 겨냥하는 은별이었다. 민국으로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은별이 다시금 서라와 스스로를 번갈아 겨냥하며 소리쳤다.

“쟤야 나야?!”

“못 골라!”

“뭐!”

은별이 버럭 소리치며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쾅! 하고 테이블을 내리치며 민국이 벌떡 일어섰다. 느닷없는 그의 돌발 행위에 은별도 순간 눈을 크게 뜨며 얼떨떨해했다. 서라와 유이 역시 빤히 그를 올려다보는 가운데, 민국이 불끈 주먹을 쥐며 외쳤다.

“자고로 상남자란! 한 명의 여자는 고를 수 없는 법!”

“…….”

“나를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면 머뭇거리지 않고 포옹해야 하며! 내가 책임져야 하는 여자가 있다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바로 상남자로서의 가치관이다! 고로 나는 고르지 못해! 아니! 고르지 않아! 난 나를 좋아하는, 혹은 책임져야 하는 여자들을 내 여자로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어!”

참고로 타 테이블 석의 타인들도 민국을 주시하는 추세였다. 상남자의 표본을 몸소 보여주겠다는 듯 단호한 의지로 외치는 민국을 보며 은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유이나 서라 역시 그의 박진감 넘치는 행동에 무어라 소감을 표해야 하나 침묵하는 태도였다.

“…그렇단 말이지.”

허나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은별이었다. 그녀는 그늘진 얼굴로 으득 이를 갈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뜸 옆자리의 유이를 비껴 지나 커피숍 밖으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저돌적인 그녀의 행동에 일어서서 의견을 피력하던 민국은 화들짝 놀라 후다닥 뒤쫓았다. 그리고 금세 바깥에 나간 은별이의 손목을 굳세게 잡으며 외쳤다.

“어디가?”

“놔!”

민국이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

“…….”

은별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맺혀 있는 눈동자가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넌 정말 최악이야….”

“…….”

“헤어져.”

은별의 마지막 발언이었고 민국은 ‘헐!’하고 소리쳤다. 이윽고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가려 하는 은별을 다시 끌어당긴 민국이 외쳤다.

“안 돼!”

“헤어져!”

“싫다니깐!”

“나도 싫어!”

‘내가 더 싫어!’라고 외치는 민국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보면 ‘이 무슨 초등학생 싸움도 아니고…’ 라며 궁시렁 댈 터였다. 허나 은별과 민국은 의외로 심각한 주제를 논하며 다투고 있었다.

“너 정말 최악이라고!”

“그래! 나 최악이야! 하지만 넌 책임져야겠다!”

“왜? 나 말고도 많잖아! 저기 두 사람만 책임져도 충분하겠네!”

“아니 처녀를 내가 가져갔는데 어떻게 책임을 안 져!”

은별의 얼굴이 화악 하고 붉어졌다. 하지만 주렁주렁 맺힌 눈물의 눈동자는 여전히 적의 가득이었다.

“책임 안 져도 돼. 난 바람 펴는 남자랑 연인하고 싶지 않으니까.”

“바람 펴는 게 아니야. 책임 있게 행동하려고 하는 거야.”

“책임 있게? 네가 뭐 어떻게 책임 있게 행동할 건데!”

기세를 잡기 위함인지 은별이 다시금 버럭 소리쳤다.

“네가 돈이 있어? 물질적으로 부유해? 아니면 뭐 다른 능력이 뛰어나? …그래, 만일 결혼한다고 쳐! 저기 두 명 포함해서 나랑 연인이 된다고 쳐! 그럼 네가 먹여 살릴 수나 있을 것 같아? 집안도 평범하잖아!”

“흠….”

“애초에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을 해야지! 너 또 아무 생각도 없이 대뜸 얘기한 거지? 이래서 내가 너랑 사귀면서도 불안불안 했던 거야!”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하며 어떻게든 민국을 몰아내려고 들었다. 허나 민국은 은별이가 왜 그런 식으로 사납게 구는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해하고 험담이 끝나길 너그럽게 기다려주는 모습이었다. 머지않아 은별이 ‘하아, 하아.’거리며 격분을 쏟아냈을 때, 과묵히 입을 닫고 있던 민국이 질문하였다.

“부유한 남자라…. 그럼 내가 부유한 남자가 되면 되나?”

“…뭐?”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반문하는 은별에게 민국이 팔짱을 꼈다.

“너도 책임 질 수 있고, 저기 두 여인도 책임질 수 있는 능력 있는 남자가 되면 그때 너도 나한테 오겠다 이 말이지?”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좋았어! 그럼 내가 부유한 남자가 돼주도록 하지!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을 거야. 부유한 남자가 돼서 다시 한 번 너에게 고백을 하겠다!”

“…….”

정말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은별이 입술을 오므렸다. 민국이 대답을 기다리며 재촉했다.

“어때? 그렇게 하면 되는 거지?”

“너… 진짜….”

“왜? 부유한 남자가 되면 되는 거잖아. 남들이 척 봐도 ‘우와! 저 사람 부자다!’라는 소리가 나도록 억만장자가 되면 되는 거지? 그럼 너도 순응하고 다시 내 애인이 되어주겠다 이 소리잖아?”

은별은 울컥했다. 억만장자가 돼보겠다고? 헛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직 현실을 모르는 어린애들이나 하는 소리!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감히 억만장자가 되겠는가?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이미 지난 지 오래다.

“내가 빠른 시기 안으로 억만장자가 되어줄 테니, 그럼 그때 나한테 다시 오는 거다?”

“맘대로 해!”

은별은 윽박을 지르며 몸을 세차게 돌렸다. 약속이 성사된 순간, 민국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은별의 뒷모습을 주시하였다. 인파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그녀의 등을 지금은 차마 잡을 자신이 없었다.

‘이해해.’

표현은 안 했지만 이해하고 있었다. 한 남자에게 세 명의 여자 친구가 생긴다니? 어느 여자 친구든 간에 그런 관계는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대한민국은 일부다처제가 아닌 일부일처제였고, 순애한 사랑을 갈구하는 쪽이었다. 민국의 제안은 진정 미치광이들이나 할 법한 제안이 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주겠어.’

그러나 민국은 책임질 여자가 있으면 자기 한 몸 희생해서라도 책임지려 하는 헌신적인 타입이었다. 세 여자가 뜻하지 않게 자기에게 처녀를 빼앗겼는데, 민국은 결코 못 본채 도망갈 생각은 안했다. 욕은 먹더라도, 일반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제안이라도 해보는 것이었다.

“아!”

그런데 그때였다. 갑작스레 오늘 중대한 일이 있었단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잠깐만 가스…!”

가슴을 발음하다 말고 멈추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이미 완전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민국은 혀를 내두르면서 ‘큰일났네.’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단 후에 있을 계획을 생각하면 오늘은 괜찮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만장자라.’

그녀와 약속한 억만장자에 관련하여 곱씹으며 민국은 커피숍으로 돌아왔다. 테이블 석에 남아 있던 두 여인은 돌아오는 민국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웃차.’하고 소파에 앉아 보인 민국이 유이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유이 씨는 어떻게 할 겁니까?”

“…….”

민국의 제안은 어찌 보면 달콤한 것이었다. 처녀를 가져간 대가로 평생 동안 책임지며 살아주겠다는 것 아닌가? 허나 그것이 단지 말만 번지르르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애초에, 유이와 민국은 서로 각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특별한 애정을 지닌 사이도 아니었고, 구면이었지만 초면에 가까운 관계였다. 몸속에 담고 있는 대화를 깊이 나눠본 적도 없으며, 몸을 섞었다지만 그에 관한 기억은 일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저는….”

그래서 유이는 몹시 고민했다. 마음 한켠에선 민국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숨기고 있는 마음을 드러내라 요구하고 있었지만, 아직 그녀는 스스로의 마음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괜찮…아요….”

“…….”

결국 유이는 거절했다. 민국의 입장에선 의외의 대답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요?”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 진솔하게 말해서, 무언가 다른 거라도 내놓으라 요구할 줄 알았다. 하지만 유이는 일절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술 때문에 발생한 일이니까, 그리고 그 날 밤 있었던 이야기로 가정할 때 자기에게도 아예 잘못이 없던 건 아니니까, 너그럽게 넘어가려는 것이었다.

‘진짜 의외인데?’

허나 민국으로선 실로 감개무량한 대답이면서도, 왠지 아쉬운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진정으로 세 여인을 먹고 살릴 작정으로 이 커피숍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 여인 한 명은 헤어지자며 작별 선언을 하였고, 또 다른 여인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으니… 이거 어쩌겠는가.

“…….”

결국 남은 건 서라 한 명이었다. 허나 애초에 서라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탐탁치 못한 모습이었지만 은별과 민국의 사이에 끼어든 상황이니 인내하겠단 태도였다. 하지만 상황에 이렇게 돌아간 이상….

‘참….’

졸지에 더욱더 나쁜 짓을 해버린 것 같단 생각이 드는 민국이었다. 은별이에게도, 유이에게도 말이다. 차라리 진솔하게 사과를 할 걸 그랬다고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유이 씨.”

“…….”

그리고 민국은 곧장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애초부터 이렇게 사과하고 시작하는 게 올바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술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지만, 그래도 역시 죄송한 건 죄송한 거니까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 아니….”

‘아니에요….’라고 중얼거리려 했으나 입술이 뜻대로 놀려지지 않았다. 결국 문장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입을 다무는 유이에게 민국이 허무하게 미소 지었다.

‘진짜 큰 잘못을 했네.’

반성하는 민국이었다.

그로부터 커피숍에서 작게 담소를 나눈 민국은 두 사람과 헤어졌다. 유이와 먼저 헤어진 후, 서라와 개인적으로 은별이와 관련하여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서라는 은별이와 졸지에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탓이 아닌 가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었다.

허나 민국은 절대 서라가 잘못된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잘못됐다면 스스로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처사였다.

‘그래도 반드시 한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를 지닌 민국은, 어떻게든 은별을 수긍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인파가 많은 그 바깥에서 은별이에게 약속했던 대로.

‘내 반드시 억만장자가 되어주겠어!’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각별한 특기를 가지고 세계에 진출할 생각은 아니었다. 민국은 두뇌가 우수한 편에 속하는 천재도 아니었고, 어느 특별한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도 아니었으니까. 남들이 보면 우스운 소리한다고 핀잔하겠지만, 민국은 자신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지.”

결국 방법은 딱 하나였다. 민국도 아예 생각 없이 그런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나름의 방법이 있던 것이다. 다만… 이게 과연 뜻대로 돌아갈지는 확신이 안 생겼다.

‘성사만 해주면 좋을 텐데.’

전철에 탑승하고 집에 돌아가며 민국은 휴대폰을 들었다. 현재 그는 혼자였다. 서라를 집에 데려다주고 유유히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처사였다. 뚜루루루루루, 뚜루루루루루. 연거푸 발신하는 신호가 울렸다.

하지만 번호의 주인은 도무지 전화를 받을 생각을 안 한다. 혹시 연구 중인가? 아니면 역시 한 번 쓰다 버릴 번호? 허나 그 순간이었다. 몇 번이고 신호음만 나던 휴대폰에 정적이 난 것이다.

번호의 주인이 전화를 받았음에 민국이 꿀꺽하고 긴장을 삼켰다. 운을 띄우길 순간 머뭇거리고 있자니, 번호의 주인이 먼저 운을 띄어왔다.

“왜?”

한 음절이었지만 음성으로 추정컨대 민국이 찾던 사람이 맞았다.

“흑마법사 맞죠? 내 열성팬.”

“지하철에서 열성팬이란 단어를 거리낌 없이 말하는 거 보니 현대왕이 맞는가 보네.”

“…….”

그렇다. 민국이 찾은 사람은 다름 아닌 열성팬인 흑마법사였다.

희귀병을 없애주고, 대신 가슴을 만져야 살 수 있는 조건을 인생에 붙여주었으며, 은별이와 자신의 관계를 다시 복구시켜준 고마운 인물. 하지만 마냥 고맙다고 인사하기에는 뭔가 위협적인 느낌이 있는 인물. 민국은 유난히 이 사람을 상대할 때만 몸이 긴장됐다.

“왜 전화했어? 그것도 내 쪽이 아닌 네 쪽에서 먼저 말이야.”

용기내서 대꾸하는 민국이었다.

“지금 시간 되세요?”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면 만들어야죠.”

비릿한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곧 흑마법사가 말을 이었다.

“날 재밌게 해줄 일이야?”

“…….”

이게 재밌는 일일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흑마법사 쪽에서도 나쁘게 여기진 않을 것 같았다.

“중요한 일이에요.”

“그래?”

흥미가 끌린다는 목소리였다. 이윽고 민국이 질문했다.

“오늘 만날 수 있어요? 아니, 꼭 만나야 할 것 같은데. 이 일 외에도 또 다른 일이 있어서.”

“집에 도착하면 있을 거야.”

그 외에 어떤 말도 없었다. 뚝하고 전화가 끊겼다. 민국은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그것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다음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았다. 집에 있는 정거장에 도착하길 기다리는 민국이었다.

“하아, 하아.”

이윽고 사는 동네에 도착한 민국이 허겁지겁 뛰어 집 앞에 도착했다. 2층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마침내 현관문에 도달하니, 순간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

현관문이 열려 있던 것이다. 혹여나 도둑이 침입한 것은 아닐까 경찰에 신고하려는데,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단 생각에 안으로 들어갔다.

“참 많은 일이 있었나 보네.”

“…….”

“방송도 그동안 별로 안 하고, 덕분에 심심해 죽겠더라.”

컴퓨터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열 다섯 살의 어린 소녀. 키도 그다지 큰 편이 아니었고 이목구비도 어린 티가 팍팍 났다. 하지만 그 눈매만은 지금까지 만난 여타 여자들보다도 성숙하고 도도했다. 또한 알게 모르게 위협감이 팍팍 풍기고 있었다. 민국은 꿀꺽하고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래, 무슨 일이야? 재밌진 않지만 중대한 일이라는 것에 살짝 흥미가 끌렸어.”

“재밌는 일이기도 할 거예요.”

자신하듯 민국이 소리쳤다. 그 소리에 ‘호오.’하고 흑마법사의 눈이 더욱 도도해졌다. 비릿한 웃음이 입가를 머금는다. 따라하려고 해도 못 따라할 것이다.

“어디 들어나 볼까?”

“…흠흠.”

이윽고 민국이 짐짓 헛기침을 했다. 마음을 다듬기 위한 일종의 심호흡이었다. 이내 안정을 취한 민국이 냅다 이렇게 소리쳤다.

“마법 좀 가르쳐주세요! 님 제자하겠습니다!”

“필요없어.”

============================ 작품 후기 ============================

이벤트 실패한 제가 불쌍하다고 님들은 생각하고 있지여 후후

그런고로 추천이나 주셈여

부르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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