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303화 (303/369)

303화

<구운몽(리메이크 전 버전)>

시간은 다시 현재로 돌아간다. 나신 상태였던 서라는 허겁지겁 이불로 몸을 가렸다. 그녀의 비명에 민국은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주변을 훑어본다. 일어날 즈음이 되었는지 나머지 두 여인의 눈썹도 서서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서라가 몹시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혀, 형!”

“…….”

방법이 없었다. 차후 사정은 나중에 신경 쓰고 일단 서라가 여자란 사실을 감추어야 했다. 민국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국의 중요 부위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꺄악!”

덜렁거리는 코끼리 얼굴을 보고 다시금 비명을 지르는 서라. 민국은 혀를 내두르면서 그녀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누가 보면 반항하는 여자를 억지로 덮치려는 장면 같았다.

“으아! 형!”

“쉿! 조용히 해! 다른 애들 깨면 끝장이야!”

차후 사정은 둘째치고 그녀부터 수습해야 했다. 민국은 서라의 몸을 이불로 돌돌 말게 하여 가려주었다.

“일단 빨리 옷 갈아입고 이 방에서 나가. 그리고 집에 가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중에 따로 대화하자!”

“…….”

서라의 눈망울이 글썽였다. 여태껏 본 적 없는 그녀의 울상에 민국은 혀를 내둘렀다. 혹여나 허락 없이 그녀의 몸을 만진 건 아닐까 불길하기도 했다. 아니, 요 지경 요 꼴로 상황이 돌아가는 거 보면 진행됐을 과정은 불보듯 뻔할 지도 몰랐다.

“얼른 입어!”

“형은 어쩌게!”

“난 일단 상황 수습해야 하니까 너부터 나가!”

‘태극기 휘말리며’라는 영화 속의 음악이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아우부터 챙기려 하는 형의 처절한 애정! 민국이 주섬주섬 건네준 대로 옷을 입은 서라. 주름이 지고 엉망인 옷차림이었지만 몸을 가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빨리!”

그렇게 모텔 방에서 급히 서라를 내보낸 후였다. 쿠웅! 두 손으로 힘껏 문을 닫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등에 알게 모르게 푸르른 한기가 돋고 있음에 민국이 반쯤 뒤를 돌아보았다. ‘으응….’거리며 뒤척이는 한 여인이 보였다.

“…….”

“…….”

머지않아 눈을 뜬 그 여인과 마주치는 민국. 그대로 또 한 번 시간이 정지했다. 여인은 자신의 몸과 민국의 몸을 곧장 살폈으며, 머지않아 경기 어린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 은별아!”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변태야!”

은별은 어젯밤 술버릇은 기억에도 없는지 버럭 소리치며 베개를 들었다. 민국이 진정하라며 타일렀지만, 무시하고 버럭버럭 소리치며 베개를 던진다. 덕분에 옆자리에 누워 있던 유이도 눈을 뜨고 스르륵 일어나게 되었다.

“…음.”

“…….”

“…….”

퍽퍽! 민국을 때리던 것도 잠시, 옆자리의 유이를 발견한 은별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민국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유이를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을 일제히 받게 된 유이는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슬쩍 방안과 이곳저곳을, 두 사람과 자기 몸을 훑었다.

“…….”

탱탱한 가슴과 부드러운 피부가 곧이곧대로 노출돼 있었다. 침묵하던 유이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유이 씨! 그러니까 이건 말입니다!”

일단 두 사람을 타이르기 위해 해명하려고 했다. 허나 막상 운을 띄우니 무어라 설명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민국도 어젯밤에 있던 유이의 술 강요에 의해 도중에 기억이 끊겨버렸으니 말이다. 그 후의 일은 도무지 알지 못했다.

“…….”

우선 근처에 있는 이불로 몸을 급히 가리는 유이였다. 그리고 스르륵 일어나더니, 맨몸인 민국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민국은 아침부터 죽도록 맞을 것 같단 예감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등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에 차마 말을 담지 못하고, 처절한 비명소리만을 내뱉게 되었다.

…투다다다다다다다닥!

“으아아아아악!”

“…….”

광경을 응시하는 은별의 얼굴이 벙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일생일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투다다닥! 비참한 괴음과 함께 한참동안 공중에서 날아보이던 민국은 ‘쿵!’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노출된 전신으로 오로지 얼굴에만 푸르른 멍을 담고 있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으어억….”

“…….”

과감히 민국을 내팽개친 유이가 스윽하고 자기 몸을 훑었다. 뒤늦게서야 급격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젯밤 이 모텔에서 있었을 일을 상상하자니 저절로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지는 모양이다. 다시 한 번 때리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으어… 자, 잠시만… 유이 씨. 저 지금 뼈와 살이 분리되는 느낌입니다… 좀만 쉴 시간을….”

투다다다다닥! 유이는 냉정한 면에선 의외로 냉정했다. 두 번이나 하늘을 날고 나서야 민국은 두 사람과 대화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옷도 챙겨 입고 말이다.

“이건 말도 안 돼….”

은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세상에 살다 살다 이런 일이 스스로에게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민국과 첫 경험을 갖는 건 언젠간 일어날 거라 예감했다. 하지만… 3P라니…! 무려… 3P라니!

“…….”

“어떻게 된 건가요…?”

유이가 조신하게 질문했다. 아니, 겉으로만 조신할 뿐이지 속은 그녀 역시 많이 복잡한 상태였다. 유이도 남자와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잔 건 생전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심지어 벌거벗고 세 명이서 엉켜 자다니! 아니, 엉켜 잤는지 엉켜자지 않았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이 셋 중에 어느 누구도 없었다. 다들 술에 꼴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아침에 있던 결과물을 볼 때 과정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유이 씨랑 내가 너랑 같이 잔거냐고!”

“…….”

은별의 일갈에 민국은 텅텅 부은 눈가를 만졌다. 현재 그는 죄인 취급이었다. 두 여인 앞에 무릎을 꿇고 불쌍한 표정을 지은 게 그 증거였다.

‘이 여자들이 내가 하는 소릴 믿어주려나?’

민국은 어젯밤 유이에게 술을 강요당해 이성이 끊기기 전 모든 기억을 숙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보다 알고 있는 어젯밤의 내용이 많았다.

허나 문제는 과연 이들이 민국의 말을 믿어줄까 였다. 무엇보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아니, 다 합하면 세 명을 덮친 민국이었다.

덮친 증거가 마땅히 없다 한들, 한 가지 추측되는 흔적이 있던 것이다. 슬쩍 드러나 있는 이불 시트로 고개를 돌려봤다.

“…….”

피. 바로 저 붉은 피. 지금은 딱딱하게 굳어버렸지만, 인간의 혈액인 건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말이지….”

“솔직하게 다 말해. 안 그럼 죽을 줄 알아!”

“…….”

협박하는 은별과, 무언으로 협박하는 유이가 재촉했다. 천지신명에게 죽을죄를 지은 죄인마냥 ‘쩝….’하고 입맛을 다시며 민국은 슬슬 설명을 시작했다. 가능한 한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을 토대로 이야기한 것이었다. ‘이렇게 된 거야….’하고 이야기를 모두 끝냈을 때, 두 사람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마, 말도 안 돼!”

“…….”

은별은 버릇대로 고함치며 고개를 저었다. 유이는 침묵을 표했지만 눈빛은 믿지 않는 모양새였다. 민국은 또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이윽고 은별이 소리쳤다.

“내가…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아니야. 어제 진짜로 하자고 했다니깐? 나랑 섹스하자고 했어.”

“세, 세, 세세 섹…… 아니야! 하자고 했을 리가 없어!”

‘끄응, 미치겠네.’

이건 이것대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은별은 평소에 노골적으로 성드립 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방송을 할 땐 가끔씩 했지만, 어디까지나 방송 컨셉 때문에 선보이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육체적 성드립을 함부로 담지 않는 성격이었다.

성교나 교미란 단어만 봐도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었는데, 그런 자신이 ‘생수’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는 게 썩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은별도 자기 술버릇을 대충은 알고 있을 텐데? 민국은 스윽 고개 돌려 유이를 향해 말했다.

“유이 씨는 제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

침묵으로 일관한다. 믿지 못한단 의사였다. 확실히 그녀 또한 실감이 가지 않는가 보다. 평소엔 소심하기 그지없는 자신이 대놓고 민국을 향해 윽박지르며 술을 권했다는 게, 그녀 입장에선 보통 용기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술을 마시게 해서 무력하게 만든 다음에 억지로 한 거지?! 이 짐승!”

“아니라니깐! 진짜 네가 먼저 나한테 하자고 제안했어. 막 몸이 뜨겁다면서 얼른 내 18cm 를 구멍 속에 넣고 싶다고. 뜨거운 너의 불기둥을 느끼며 달아오르고 싶다고! 네가 직접 말했다니깐?!”

“…꺄아아아아아아아!”

현실을 부정하고픈 은별이었다.

“안 믿어! 안 믿을 거야!”

“…….”

믿지 않아도 어떡하나? 그게 현실인데. 이래봬도 은별은 성욕이 상당히 충만한 여성이었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민국과 함께 있으면 매번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통감하는 것이다.

‘이럴 땐 좀 솔직하면 좋으련만.’

혀를 내두르면서 그리 생각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떻게 해쳐 나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결국 민국도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

“…….”

입을 다문 두 여인을 향해 민국은 권유했다.

“두 여자 다 제 애인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일도 깔끔히 해결. 문제도 척척! 오케이?”

“…….”

세 번째로 두들겨 맞는 민국이었다.

“끙.”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망신창이였다. 두 여인에게 얼마나 맞았는지 가뜩이나 때린 곳을 또 때려서 온 몸이 텅텅 부어 있었다. 만일 민국은 이 두 여인을 동시에 사귀게 된다면 몸이 편할 날이 절대 없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맞을 소리를 해서 맞는 것도 있었지만.

‘일단 어떻게 해결은 됐는데.’

솔직히 해결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거시기했다. 졸지에 외박을 한 두 여인은 급히 집으로 돌아간 처사였고, 오늘의 문제에 대해 나중에 다시 한 번 만나서 대화를 나눌 것 같았다.

‘그나저나 서라는 어떡한담.’

다행히 여자라는 사실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은별과 유이도 그녀에 대해 일절 거론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모텔에서 같이 잠을 잔 건 그녀 또한 포함이었다.

민국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은별과 유이는 그나마 다행인 쪽에 속했다. 그래도 둘 다 성인에 포함되는 나이였으니까. 하지만 서라는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어린 쪽이었다. 그러다 보니 술을 권유하는데도 좀 많은 고심이 필요했고, 모임이 끝나는 순간 그녀부터 곧장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으아! 진짜 미치겠네.’

무엇보다 세 사람 모두 민국과 합의 하에 치러진 성교가 아니었다는 게 난감했다. 술이 원래 사람을 짐승으로 만든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4P라니! 물론 남자라면 많은 여자와 잠을 자보는 걸 어렴풋이 꿈으로 소망할 지도 몰랐다. 허나 합의가 아닌, 술에 의해 치러진 4P는 절대 좋을 게 못 됐다.

“하아.”

결국 한숨을 내뱉으며 휴대폰의 현 시각을 확인했다. 오전을 가리키는 시간. 대학교 수업은 당연히 못 갔고, 마음도 너덜너덜했다.

‘서라는 진짜 큰일 났겠네.’

고등학생으로 수업도 못 받았고, 허락도 없이 외박을 했으니 아마 부모님에게 혼쭐이 났으리라. 그리 감안하며 앞으로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되나 골똘히 고심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땅히 처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에는 컴퓨터를 키고 만지작거린다.

본래 오늘 방송할 생각이었지만, 오늘 일로 도무지 일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한창동안 게임에만 몰두했다.

우우우우우웅.

“엉?”

휴대폰이 진동한 건 그로부터 다섯 시간이 경과한 후였다. 민국은 연락을 건 발신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경직했다. 강서라. 바로 그녀에게서였다. 민국은 순간 머릿속에 피어 오른 이런저런 근심에 고개를 내젓고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서라야?”

“형… 나 큰일 났음.”

운을 띄운 서라의 목소리는 몹시 불안했다. 그 음성에 덩달아 민국도 불안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무슨 일인데? 혹시 아까 그 일 때문이야?”

“응… 형…. 나 이제 어떡함?”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침묵하는데, 서라가 발언했다.

“나 임신했음.”

“…….”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줄 알았다.

“뻥임.”

하지만 생각해보니, 하루 만에 임신했단 소식이 들려올 리 없었다. 고로 거짓말임을 가늠한 민국이 혀를 내두르면서 핍박했다.

“이것아. 뭐하는 짓거리냐.”

“헤헤. 형이 너무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농담 한 번 해본 거임.”

썩 농담할 상황이 아니었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민국이 발언했다.

“부모님에겐 뭐라고 했어? 학교는?”

“응. 친구 집에서 어쩌다 보니 외박하게 되었다고 말했음. 좀 추궁 당하긴 했는데 그래도 일단 잘 넘어갔으니까 다행임. 학교는 늦게라도 가서 수업 마쳤고, 선생님이 내가 결석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이해하고 넘어가주셨음.”

“휴우. 다행이네.”

진심으로 안도하는 민국이었다. 서라 또한 ‘응.’하고 웃으면서 대꾸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고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민국이 진지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서라야. 지금 잠시 만날 수 있을까?”

“지금?”

“그래. 아무래도 아까 일에 대해서 얘기 좀 나눠야 할 것 같아서.”

일단 제일 어린 서라부터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게 먼저였다. ‘음!’하고 잠시 뜸을 들이던 서라가 수락했다.

“오키도키! 어디서 만날 거임?”

“일단 너희 집에서 만나는 건 좀 그럴 테니까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그때 밖으로 나와.”

“알았음. 그럼 기다리겠음!”

그렇게 연락이 끊겼고, 민국은 다시금 저도 모르게 한숨을 쏟았다. 진지한 눈빛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던 민국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외투를 입었다.

생각을 정리할 여지도 없이 밖으로 나와 곧장 택시에 탑승했다. 서라가 살고 있는 동네로 가달라 요구한 뒤, 뒷좌석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차창의 화면을 주시했다.

“…….”

정말이지 오늘 한 짓은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유이의 술 강요로 인해 차마 뜻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정신을 올곧게 다잡고 있었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이런 큰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어라?’

그리 한숨을 쏟으며 고심 중에 있던 순간이었다. 돌연 어젯밤, 유이의 강요로 술을 퍼마시던 기억이 어른거렸다. 민국도 일순간 왜 이런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르나 싶었는데, 곧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내가 오빠를… 얼마나 ……하는데….'

“…….”

갑자기 떠오른 기억. 그리고 서라가 자신에게 했던 말. 치킨전문식당에서 서서히 의식이 끊겨가기 직전 들었던 소리가 뇌리 속을 관통하자 민국은 띵하고 충격을 먹은 사람마냥 잠시 얼빠지게 되었다.

'얼마나… ……하는데….'

‘잠깐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민국은 냉철해진 눈빛으로 당면을 응시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어디까지나 자기 암시를 통한 착각 따위가 아니라면? 어젯밤 서라가 했던 소리가 꿈이 아닌 현실에서 들었던 발언이라면…. 현 시각 서라에게 찾아가던 까닭은 어디까지나 그녀와 이번 일을 해결하고 사과를 하기 위함이었으나, 그 기억이 떠오름으로서 민국은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랬구나.’

저도 모르게 씁쓸하게 속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입술에 친근한 미소가 달아올랐다. 대충 서라를 만나게 되면 어찌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 *

“도착했어. 내려와.”

택시를 타고 서라의 동네에 도착한 민국은 연락을 취했다. ‘오케바리!’하고 애써 활발하게 소리친 서라가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저택 근처에서 마주하게 된 두 사람. 서라가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오! 아까랑은 다르게 노출이 아님!”

“…민망하니까 그 이야기는 하지 마 인석아.”

아침에 전신 노출을 선보였던 민국이 그리 야단치자 서라가 ‘데헷.’하고 웃음 지었다. 민국은 쓰게 미소 짓다가 곧 서라를 향해 말을 이었다.

“서라야.”

“왜 부름!”

“내가 오늘 일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았는데 말이야.”

서라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허나 다음으로 들려온 민국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없었던 일로 하자.”

“…….”

순간 경직.

“잘 생각해보았는데, 이건 내가 도무지 책임 질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

“…….”

“그리고 난 은별이랑 사귀고 있잖아? 너도 알지? …일단 지금 그 건 때문에 은별이랑 살짝 마찰이 있지만 일단 걔는 네가 있었던 거 모르니까.”

단 한 번도 이토록 무책임하게 행동한 적 없다. 허나 오늘은 달랐다. 때문에 서라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결정한 거야. 그냥 오늘 일은 서로 없었던 걸로 치자. 알았지 서라야?”

“아….”

잠시 벙찌는 서라였다. 마치 큰 충격을 먹었다는 얼굴. 허나 머지않아 애써 납득한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음!”

“알아들었어?”

“…응! 형 말대로 하겠음!”

여전히 웃는 척이다.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음! 형은 은별이 누나랑도 사귀고 있으니까, 내가 거기에 끼어들면 두 사람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는 거 아님?”

“그렇지.”

“그러니까 형 말대로 하겠음! 그게 나에게도 좋을 것 같고!”

웃으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주하며 서라가 웃자 민국도 덩달아 웃는다. 그 모습에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싶었는지 서라가 곧장 뒤로 몸을 돌렸다. 얼굴을 안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나 먼저 들어 가볼게! 부모님이 집에 라면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어서….”

“라면? 맛있는 건 안 해 주시고?”

“우리 엄마가 해준 라면은 초특급 라면이라서 제일 맛있음!”

말도 안 되는 조크에 민국이 살짝 웃어준다. 마주하길 꺼려하는 서라는 그대로 손을 들어 인사하며 저택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어, 그래.”

그리고 민국도 마찬가지로 인사하고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척하면서 다시 서라를 바라보았다. 저택의 현관으로 차츰 이동하는 그녀의 뒷모습에, 민국은 머지않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야.”

“…….”

“너 왜 거짓말 치냐?”

품에 안긴 채로 뜸을 뜰이던 서라가 밝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님이 무슨….”

“어제 기억 다 떠올랐거든? 네가 술 취해서 나한테 했던 소리도 다 떠올랐어.”

서라는 그때 술에 잔뜩 달아 올라있던 상태라 모르겠지만, 민국은 전부 기억한 상태였다. 어제 그녀가 진심을 담아 내뱉었던 고백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너 나 좋아한다며.”

“…….”

“좋아하는데 왜 자기 맘을 모르냐고 막 울었잖아.”

“…….”

그런 적 없다고 시치미 때려 했다. 하지만 민국의 따뜻한 품에 계속 안겨 있자니 서라는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당사자에겐 기억나지 않는 취중진담이었지만, 그 소리가 결코 거짓이 아님은 서라 입장에서도 느꼈다.

“다 기억했어 자식아. 그러니까 모른 척 시치미 때는 것도 끝났어.”

고등학생이고 뭐고,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나이 불문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서라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윽고 그녀가 ‘핫!’하고 살짝 웃음 짓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형! 무슨 소릴 하는 거임? 내가 왜 형을….”

“자꾸 거짓말 치네. 그럼 여기서 놔줄까?”

“…….”

“놔주길 바란다면 놔줄게.”

여기서 놓는다면 서라와 민국은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친근한 남매 사이는 무리일 터였다. 처음엔 아무 일 없던 듯 친근하게 굴겠지만, 결국은 오늘을 떠올리며 사이가 멀어지리라. 그것을 직감했는지 서라 또한 언뜻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민국은 얄밉게 재촉했다.

“말하지 않으면 놓는다?”

“…….”

“놓으라는 거지?”

결국 민국이 안고 있던 서라에게서 손을 회수하는 순간이었다. 덥썩하고, 서라가 민국의 옷깃을 꽉 부여잡았다. 완고하게 쥐어 잡는 그녀의 작디작은 손을 바라보던 민국이 그대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틈엔가 민국을 바라보는 서라의 얼굴은 울상이 따로 없었다.

“좋아해.”

“…….”

“오빠를… 좋아해….”

“…….”

“너무 너무… 좋아해….”

결국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서라였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서글프게 흐느끼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민국. 머지않아 포근히 그녀를 품에 안으며 중얼거린다.

“그렇게 얘기하면 좋았잖아.”

“흐윽… 흑흑!”

울고 있는 그녀를 껴안은 민국은 상냥했다. 결국엔, 두 여인이 동시에 민국을 연모하고 있던 것이다. 한 여인은 다툼을 통해 비로소 연인 관계가 되었지만, 나머지 여인은 그로 인해 버림받은 신세. 결국 민국은 숨기고 있던 또 다른 여인의 진실한 마음을 깨닫고 포옹해주었다.

‘좋아.’

두 여인의 속내를 알게 된 민국이었다. 이제 앞으로 어떡해야 될까? 하지만 어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얼마지 않아 의지가 깃든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민국은 작심했다.

‘결정했어.’

============================ 작품 후기 ============================

아직도 습작이 안 됐네;

내일 무료 전환 다시 요청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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