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이번 새학기를 준비하며 은별은 여러모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앞으로의 학기가 취업과의 연관성이 있을 만큼 큰 부분을 차지했고, 은별은 가능한 한 좋은 성적을 내는 게 올해의 목표였던 것이다.
아무리 파뿌리 TV의 비제이로 인기를 가늠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은별은 상당한 노력파였다.
똑똑똑.
"뭐하십니까?"
"…공부."
"호오, 공부라."
집중하고 있던 찰나에 민국이 원형 구멍을 기어 들어오면서 물었다.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오로지 책상의 문제들에만 눈을 두면서 대답했다. 어느 덧 은별의 옆으로 다가온 민국이 책상의 서적들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말했다.
"몇 시간 째 공부 중이십니까?"
"다섯 시간 째?"
"허허, 내 은별 양이 노력파인 것은 알고 있으나 조금은 쉬시지요. 때때로는 마사지를 받으면서 쉬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법입니다."
"마사지고 자시고… 그런 거 없이 그냥 쉬어도 편하거든?"
어차피 다섯 시간 동안 집중하면서 공부를 했으니 머리가 뽀개질 만도 하다. 이쯤되면 조금 쉬어주는 것도 앞으로 공부를 하기 위한 자세이다.
은별은 그제야 펜을 놓았다. 민국은 기다렸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은별의 겨드랑이 쪽으로 두 손을 집어넣었다.
방심하고 있던 은별은 '응?'하면서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간질간질!"
"꺄앗~! …뭐하는 거야!"
느닷없이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는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면서 은별이 겨드랑이를 붙이고 방어했다. 민국이 겨드랑이를 만지는데 사용했던 두 손을 허공에서 움직이면서 중얼거렸다.
"흐흐흐, 너무 풀이 죽어 있을 땐 건전지를 채워주는 게 남자 친구로서의 면목."
"……."
"흐흐, 응? …킁킁."
이윽고 무슨 냄새가 났는지 겨드랑이를 만졌던 두 손에 코를 갖다대보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냄새를 한참동안 맡던 민국이 '오오'하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건 이것대로 색기가…."
퍼억!
"나가!"
결국 베개로 얼굴을 한 대 강타 당하는 민국이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두 사람은 옹기종기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남은 방학 시간도 얼마 안 되는 마당에도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보낸다는 건 실로 좋은 행위였다. 이윽고 민국의 재촉으로 그의 방에 당도하게 된 은별이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 방을 연결시켜버린 걸까…."
"은별이 네가 먼저 원했었잖아? 나와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말이지 후후."
"바보야! 그건…!"
은별은 말을 하다 멈칫거렸다. 사실상 이렇게 방을 연결시킨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예나 때문이었다. 한 때 은별과 예나는 굉장한 심리 접전을 벌인 적이 있었고, 흑화 소주 건 이후로 사이가 애매해져서 답이 안 나올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다.
그때 흑설 공주라는 정체 모를 여인의 등장과 더불어 진귀한 마법이 선사되었고, 그 마법이 바로 언제 어디서든 부르면 곧장 오갈 수 있게 설치된 마법의 구멍 통로였다. 민국과 은별, 민국과 예나, 이렇게 벽면에 설치된 구멍은 각자의 방으로 오갈 수 있는, 굉장히 유용한 통로로 활용되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민국이 예나와 어떤 접전이 있을 것만 감안하다 보니, 훗날 민국이 자신의 방에 만날 만날 놀러올 것은 조금도 생각지 않았던 은별이었다. 그런 자신의 크나큰 실수와 과오에 그저 한숨만 푹 내쉬던 은별이었다.
"너무 한숨 쉬면 이마에 주름 늘어납니다. 일찍이 할망구가 되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난들 마세요. 내가 할 일이거든요?"
어찌 됐든… 오늘은 민국과 은별, 단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었다. 예나는 예슬이와 함께 놀러간 지라 없었고 말이다. 두 사람의 따뜻한 시간을 방해할 훼방꾼은 없는 셈이었다.
"에고 잠깐만. 갑자기 화장실 급해지네."
"빨리 갔다 와. 방에 있을 테니까."
"헐! 설마 은별이 너… 나 오늘만큼은 널 덮칠 생각 추호도 없었는데… 훗, 예나가 없다고 이 틈을 노려서 간만에 욕정을 풀려고 하…."
휙!
"으악! 갑니다요! 갔다 올게요!"
침대에 있는 베개를 던지는 시늉에 벼락처럼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가는 민국이었다. 홀로 남은 은별은 던지려던 베개를 내리며 그저 숨만 내쉬었다.
"휘유."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민국이었다. 은별은 다리를 꼬고 침대에 걸터앉아 창문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옆으로 다가온 민국이 운을 띄었다.
"낭자, 무슨 연유로 창문을 보고 있는 것이오? 밖에 나가고 싶소?"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기분이 울적해서 그래."
앞으로 할 일이 산더미 같다 보니까 말이었다. 그리고 은별도 내색은 하지 않았고,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민국에 관련하여 걱정하는 일이 있었다. …이전에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들이닥쳤던 미래의 서민국.
'나는 죽어.'
그가 했던 발언이 아직도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너를 두고 죽게 될 거라고.'
은별은 그 말이 부디 거짓말이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그것은 거짓이 아닌 엄연한 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민국은 현재의 민국과 은별이의 사이가 안 좋아지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은별은 오기로 거부했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한들, 민국이 그리 일찍의 나이에 사망을 하게 된다면 은별도 슬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암담한 결말은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은별은 가능한 한 현재의 민국이 오래 살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만일 우리 둘의 사이가 안 좋아져 헤어지게 된다 하더라도 말이었다.
'나도 참 바보야.'
은별도 이런 점에선 스스로가 하염없이 착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짓궂고 나쁘게 굴어도 된다고 생각했으나, 생각대로 몸이 행동해주지 않았다. 마음이란 건 항상 남을 위하는 법이었다. 그녀는 그랬다.
"허허."
그리고 민국은 그런 은별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민국도 역시 여러가지 잡다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캉스 사건부터 300년의 사건까지, 모두 사실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던 셈이었다. 그 사건들엔 전부 연관성이 있었고, 결말은 항상 민국의 죽음이었다.
'바캉스 건은 결국엔 나 때문에 일어난 셈이니.'
만일 그 바캉스 사건 때 민국 혼자 가게 되었고 혼자 사고를 당했더라면, 민국이 사망하고 일이 끝나는 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다른 여인들이 민국 대신 죽음을 맞이했었지. 흑마법사의 기적으로 용케도 살아남았지만, 그래도 민국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더욱 책임감과 미안함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없이 창문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창문 너머로는 쨍쨍한 햇볕이 비추고 있었다. 이제 겨울이 끝나고 있음을 알리는 광경이었다.
"겨울이 가고 있소 낭자."
"그러네."
겨울이 가고 있다. 드디어 새로운 학기가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고 우역곡절이 있었어도 결국엔 즐거운 한 해를 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
그러나 자꾸만 스쳐 가는 안 좋은 기억들이 은별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결국 한참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은별은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거칠게 고개를 홱홱 저었다. 그녀의 갑작스런 신경질적인 행동에 민국이 얼떨떨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은별이 작심한 얼굴로 민국의 옷깃을 붙잡으면서 운을 띄었다.
"서민국."
"왜 그러십니까요 마님."
"나가자."
"앵?"
은별의 갑작스런 제안이었다. 평소 제안을 하던 것은 민국이었다.
밖을 나가자고 하는 것도, 놀러 나가자는 것도 항상 민국이 해왔었다. 은별은 항상 튕기면서 보채는 민국을 달래는 역할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은별이 이번엔 입장을 바꿔서 먼저 나가자고 제안을 해온 것이었다.
민국 입장에선 실로 신선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은별아. 너 혹시 정신질환 약 먹고 있냐?"
"다짜고짜 사람 정신병원 환자로 만들래? 나갈 거야 안 나갈 거야?"
표독스러워진 눈빛으로 되묻는 은별이었다. 그런 식으로 반응해오면 당연히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얼떨떨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은별은 기다렸다는 듯 침대에서 일어나 민국을 끌고 현관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민국이 소리쳤다.
"어어, 잠깐 은별아. 날씨 많이 추울 테니까 옷을 조금이라도 입는 게."
"됐어. 어차피 근처에 나갈 거니까."
옷차림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적당하게 입은 상태로 은별은 민국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후우웅…! 아직은 겨울임을 증명하듯 매서운 바람이 두 사람의 살결을 스쳤다. 민국이 '으어엇'하면서 오돌오돌 떨었고, 은별도 순간 소름이 쫘악 돋았지만 그래도 차라리 이게 기분을 전환하기에 나았다.
"가자."
"으어어, 어디로 가려는 거요 낭자."
"밖이야. 그냥 밖에. 그거면 충분해."
그리고 계단을 내려간 은별은 마침내 밖에 당도했다. 민국의 집 앞. 차도 이따금씩은 다니는 조용한 곳. 사람 한 점 없는 이곳에 우두커니 서게 된 두 사람은 한참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
은별은 말없이 그저 쨍쨍한 햇볕과, 추운 바람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민국은 그런 은별에게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다가 똑같이 정면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은별아."
"…왜."
막상 밖으로 나오고 나니 춥다기 보단,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기분 전환을 하고 있던 은별은 민국의 호명에 대꾸했다. 이윽고 정면을 바라보던 민국이 말했다.
"잘 지내줘서 고마워."
"……."
"그리고, 이해해줘서 고맙고."
필시 이해해줘서 고맙단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었다. 실로 한심한 남자지…. 어쩌다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마냥 잘 생겼고 키도 크니까 좋아했던 것인데, 지금은 다른 까닭이 컸다.
"……."
필시 어떤 일이 생기든 목숨을 다해서 구해주던 그의 책임감에 마음이 반짝인 것이겠지.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은별은 팔짱을 끼면서 튕기듯 말했다.
"이해해준 건 아니거든…?"
"……."
"애초에 그런 걸 이해해주는 여자가 일반적으로 있을 리가 없잖아."
지금껏 자신이 참아주는 게 몹시 용하다. 여러 사건들이 얽히고 얽혀서 결국엔 참는 입장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예나와의 사이를 인정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언젠간 헤어지길 비는 은별이었다.
그런 은별을 바라보던 민국이 그래도 괜찮다는 듯 씨익 미소 지었다. 이윽고 은별의 머리를 쓰다듬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그의 항상 느껴온 손길에 이번에도 가만히 있을 따름이었다.
세상은 변한다.
사람도 변하고 사이도 변한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음 하는 것도 세상엔 당연히 존재하는 법이다.
그것이 지극히 자신의 욕심에서 우러나온, 이기적인 욕망이란 걸 모를 리가 없다.
애초에 세상의 원초적인 현상들을 자신이 이래저래 제지하고 강압한다는 건 불가능이었으니까.
결국 그 욕망은 자신의 살결만 파먹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민국은 살고 싶었다.
은별은 그런 그를 살리고 싶었다.
이기적인 욕구라 해도, 세상의 합리와 이치에 맞지 않는 틀린 행동이라고 해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옳고 틀리고를 따지기 보단, 자신이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적어도 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서로 닮아가고 있었다. 애인으로서 당연한 것처럼.
'시작이네.'
새학기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넵.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기다리고 기다렸던 화요일입니다.
실은 어제 이벤트를 진행했어야 하는데, 오늘까지 에피소드 확실히 마무리하고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더라구여.
그래서 휴식 편에 가까운 지금까지의 에피소드를 마치고 이벤트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사실상 본 에피소드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뭐 지금까지 중요한 에피소드들도 많이 나왔지만, 앞으로 더 막장스럽고 황당한 전개들이 많이 나올 것이며!
심지어 지금까지 나온 적 없는 인간 관계의 꼬이고 꼬임도 선보일 예정입네다!
신 캐릭터들도 마구마구 출현할 예정이고, 통쾌함도 있지만 암유발도 좀 있을 겁니다여.
어쨌든!
이전에 공지를 한 적이 있는데 무료 이벤트를 하겠습니다!
약 4일간 진행을 하구여! 정확히 수요일로 넘어가는 시점부터 현대 왕의 표본을 H씬을 제외하고 무료 연재로 전환, 4일간 연재를 하고 다시 노블레스로 바꿉니다!
이유야 선작도 있고 관심도 더 받고 싶은 맘도 있지만!
무료로 한 번은 연재해야 작가 이미지도 으흐흐흐흐....
아!
그리고!
제가 아마 며칠 정도 연재를 안할 예정입니다.
솔직히 시즌 끝마치자마자 바로 글을 쓰느라 휴식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대신 글을 올리긴 꼭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래!
리메이크 전 버전을 올리자고 생각하게 되었슴다 ㅎㅎ
캬!
역시 나의 천재적인 두뇌!
어쨌든 그리해서 쉬는 동안은 리메이크 전 버전을 올립니다.
분명 리메이크 후 내용이랑 비슷해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아닌 부분도 있을 겁니다.
아마 중간 부분부터 올라올 것인데, 기존의 서라 파트도 나올 예정이니 그냥 좋게 좋게 봐주세여.
리메이크 전 파트 유포하신 분 있던데 고소하려다가 참았으여. 지금은 지우셨더라구여.
그냥 연재란 통해서 보세여. 올릴 테니까여.
그럼 4,5일 정도는 리메이크 전 파트를 올리면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즐감하세여! ㅂ2ㅂ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