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새학년의 시작>
알콩달콩 즐거운 마지막 방학 시간을 보내는 민국이었다. 간만에 고향 집에 들려 부모님과 즐겁게 담소를 나눈 뒤, 해영이와도 좋게 헤어져 집에 돌아왔을 때 민국은 은별, 예나와 함께 호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씩은 강서라와 방송이나 하자면서 연락을 취하기도 했고 말이었다.
강서라와의 관계는 여전히 어중간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은별이와 예나에게 들키지 않은 것이 실로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이런 입장을 지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숨기고만 있는다면 강철남이 했던 짓과 뭐가 다르겠는가. 민국은 바람을 피워도 여친 앞에서 피워 싸대기 한 대를 맞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가치관 소유자였다.
"그나저나."
민국은 이전에 흑설과 대화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임신 문제로 먼저 만남을 갖기 위해 찾아갔던 서민국. 그리고 그곳에서 조우했던 귀티 나는 여인, 흑설 공주. 실명은 모르지만 술집에서 자주 불리던 그녀의 호칭이 바로 그것이었다.
민국은 그녀와 조우함으로서 자신의 기괴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니, 다소 기괴하다고 하기에는 모두에게도 적용이 되는 이야기였지만?
"에고고, 어디 악마의 여인이나 한 번 보러 가봅시다."
혼잣말을 궁시렁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는 민국이었다. 방송도 마치고 멋지게 기지개 한 번 핀 다음에 거실로 나온 민국은 현관 옆에 달려 있는 커다란 문짝을 향해 노크질을 하였다. 똑똑.
"들어오려무나."
'고놈의 말투 참.'
마치 애니메이션에서 '크큭, 각성한다.'하고 중얼거리는 중2병의 말투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런 중2병과 비슷하게 치부하기에는… 소유하고 있는 능력이 남달랐으니까. 민국은 그러고 보니 이 양반도 가깝게 지냈음에도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임을 자각했다. 서라의 300년 사건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조우한달까? 이윽고 문을 열어젖히자 화장대 의자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와인잔의 와인을 홀짝이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이구나."
"그러하군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온 민국. 원형 의자를 돌려 민국을 마주하는 흑설 공주였다. 이전에 입던 귀족 옷과는 달리, 몸이 조금 비칠 지도 모를 듯한 반투명한 레이스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흰 천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는데 입고 있는 속옷이 흐릿흐릿 보일 지경이었다. 민국은 '흠'하고 이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구면인 사이라 해도 그런 옷차림은 너무 그렇지 않습니까?"
"놀라운 일이구나. 내 속살이 비추면 마냥 좋아할 줄 알았는데."
"허허, 제가 아무리 나쁜 놈이라 해도 악마 급은 아닙니다. 악마 급은 되어야 그쪽 속살에 푹 빠지지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속내로는.
'으으, 허벅지 보소. 미치겄다!'
어떻게든 욕정을 참기 위해 노력하는 민국이었다. 흑설 공주는 실로 웃기다는 듯 가볍게 미소 짓다가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확실히 오랜 부자들을 만나보고, 그리고 각종 음지에서 돌아다녔던 여인이니 만큼 품고 있는 분위기가 다소 달랐다. 마치 사로잡으려고 달려드는 남자들을 도리어 사로잡아버릴 여인이라고 할까.
"아직도 옛일에 대해 생각을 하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건 다 이전의 일이고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만이 남지 않았느냐?"
흑설 공주는 예전 서라가 흑설 밑에서 일을 하다가 당할 뻔했던 일, 그리고 서라에게 주어졌던 300년이란 잔인한 세월. 그 건에 대해 아직도 앙금을 품고 있는 민국에 대해 질문했다.
"꼭 헤로운 과정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니죠. 그 과정으로 인해 감당해야 할 정신적 결과물도 있을 겁니다."
"은근히 마음이 따뜻한 사내구나."
뭐, 그거야 서라가 감당했던 300년의 시간을 자신도 감당하겠다고 표명하는 순간부터 짐작해왔다. 두 사람의 끊을 래야 끊을 수 없던 의리라고 할까…. 그런 것을 보며 흑설 공주도 잠시나마 옛 추억을 되새겼던 것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떠오른 감정에 그만 평소 자신답지 않게 기억을 잊게 해준 것 뿐…. 그 감각은 아직 남아 있을 것이었다.
"후, 애초에 이런 얘기하려고 온 것도 아니었으니. 본론이나 얘기합시다."
"그러자꾸나."
그리고 그녀는 기존에 방에 없던 새롭게 들여놓은 2인용 원형 책상으로 향했다. 그녀가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자 그녀에게로 다가오던 민국이 '끙'하고 말을 이었다.
"그놈의 옷차림은 정말 어떻게 안 됩니까? 아무리 그래도 여자인데 옷차림은 중요시 해야지!"
"이 정도 비싼 옷으로 나를 가꾸었으면 충분한 옷차림 아니겠느냐?"
"이럴 수가. 병신 같지만 논리적이어서 할 말이 없다."
본래 흑설 공주에게 이런 식으로 막말을 한다는 건 일반인으로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민국이니까 가능한 일인 것이다. 흑설 공주는 해맑지는 않지만, 귀티가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몇 개월 전 흑마법사가 부탁했던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었다.
"자… 아무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봅시다."
"그러자꾸나."
원형 테이블엔 어느 덧 흑설 공주가 자주 마시는 와인병이 올려져 있었다. 그 와인병의 내용물을 와인잔에 쪼르르 따르는 가운데, 민국은 '그래서.'라고 운을 띄우면서 흑설 공주를 마주보았다.
"본래는 제가 이보다 더 일찍 죽었어야 한단 말입니까?"
"……."
민국의 본론, 그리고 오늘의 주제에 가까운 대사였다. 흑설 공주는 와인이 담긴 잔을 홀짝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주억거림조차도 정말이지 귀티가 나고 고급스러웠다.
"그렇단다."
"……."
"본래는 흑마법 여인이 치료해주기 전에 이 생을 마감하는 게 정상이었겠지."
흑마법사, 그녀는 민국의 희귀병을 다소 막장스럽게 치료해주었다. 여자의 가슴을 하루에 한 시간만 만지면 치료가 가능하게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생명력 보유 방식은 현재도 유효한 상태였다.
"생명을 유지한들 죽었어야 할 날짜가 늦춰진 건 사실이니."
"그러니까 계속 죽음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말이군요."
흑설 공주가 미소 짓는다. 긍정의 미소였다. 민국은 원래 흑마법사가 치료해주기 전에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살아남았고, 그로 인해 본래 죽었어야 할 기간이 그만 늘어나고 말았다.
"사람의 인생이란 건 정해져 있는 법인데 그것을 마법으로 어긴 것이니 말이란다."
"허허, 인생 참. 그럼 내가 지금까지 사고를 당해온 까닭도 전부 거기에 있던 거군요."
바캉스에서 돌아가다가 사고를 당했다던가, 300년의 시간을 경험하기 전에 돌연 택시 안에서 사고가 났다던가, 그에 대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민국이 죽었어야 할 날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누가 날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때가 되어서 죽어야 하는 건데 그게 자꾸 미뤄지니까 보복? 같은 게 오는 셈이라고 보면 되나.'
요컨대 운명이니 뭐니 하는 그런 말 말이었다. 민국이 현재 겪고 있는 건 그런 것과 비슷한 셈이었다.
"그럼 이번엔 피했으니 다음에는 한 5,6개월 후에 찾아오겠군요."
"반년마다 찾아오는 셈이라고 보면 되지."
바캉스 때는 여름. 300년의 시간은 겨울에 일어났다. 즉, 앞으로 반년마다 매번… 평생 동안 계속해서 일어나는 셈이었다.
그런 초죽음의 사건을 민국은 계속해서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아니, 설사 민국이 감당한들 주변에서 갑작스레 터지는 그의 사건을 보며 괴로움에 미칠 것이 자명했다. 민국은 결단코 그런 일은 원치 않았다.
이내 '좋아!'하고 결심한 듯 굳게 고개를 끄덕이는 민국이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의미하는 바를 알고 싶구나."
"훗. 제가 당신한테 부탁할 게 뭐겠습니까? 당연히 살려달란 뜻이지!"
요컨대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서 수명 좀 늘려달란 의미였다. 흑설 공주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지켜보다가 말했다.
"평생 발을 핥아주겠다면 생각해보겠구나."
"크흠! 진짜 핥는 겁니까? 그럼 저도 꽤 긍정적인 생각을…."
"말이 그렇단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무슨 의미인지 알 것 아니느냐."
흑설 공주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없단다."
"……."
"어떤 방법도 없단다. 서민국 그대는 계속해서 죽음을 눈으로 봐야 할 테고, 그때마다 어떠한 조건으로 내가 살려줄 수 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죽음을 피하고 피해도 결국엔 그보다 더 큰 죽음이 찾아올 거란다. 그때는 내 마법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테지."
그렇다. 흑설 공주는 그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오랜 경험들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절대로 사람의 정해진 운명에선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마법으로 살리고 살려도 결국 어느 순간부턴, 살릴 수 있는 기회조차도 사라져 버리고 마는 법이다.
"허허."
흑설 공주의 직설적인 얘기를 듣게 되자 민국도 허탈한 웃음만이 나올 따름이었다. 아니, 실은 인간으로서 조금은 떨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선고를 깊이 듣게 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민국은 본래 더 일찍 죽음을 맞이했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흑마법사의 애정 어린 팬심으로 용케 살아남았고, 흑설 공주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한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럼 흑설느님이 절 앞으로 몇 번은 살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년수로 계산할 때."
"10년이겠구나."
그렇다. 딱 10년이다. 아마 그 이상은 늘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민국은 '10년? 호오.'하면서 감탄사를 취했다.
"의외로 많군요. 난 또 이제 일 년밖에 못 산다느니 그러면 많이 좌절할 것 같았는데."
"실질적으로는 좌절할 상황이란다. 그대에겐 지켜야 할 여인들도 있지 않느냐."
그렇다. 강은별부터 예나까지, 그리고 어쩌면 이젠 서라까지. 서로의 마음이 공유된 상태에서 떠나보내는 건 굉장히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안에 또 어떤 일이 생길 지도 몰랐고, 만일 그 안에 뭔가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면.
"뭐, 기대라도 한 번 해보렵니다."
민국은 희망을 갖기로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직 기간은 많았고 그 안에 방도가 나올 지도 모를 것이었다. 다만 무책임한 자신이 되지는 않도록 항상 마음을 다지고 또 다질 계획이었다.
"어찌 됐든 그럼 남는 기간 동안은 지구에 남아서 나 좀 살려줘요. 죽는 날 알게 된 것도 괴로운데 죽는 걸 여러 번 경험하는 것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동정으로 움직이는 내가 아니란 걸 잘 알지 않느냐."
"이런. 그랬었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면서 묻는 흑설 공주에게 민국은 '훗'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쩔 수 없구만요. 그럼 진짜로 발을 핥아드리지요."
"그것도 끌리는 제안이지만, 필요한 용건이 생기면 그때 의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요컨대 민국의 제안은 승낙한 셈이었다. 아니, 애초에 민국 때문이 아니라 그녀에게 찾아왔던 흑마법사 때문에 제안을 승낙한 것이었으나 말이었다. 민국도 이야기를 다 끝마친 상황답게 조금은 맘을 놓은 듯 숨을 뱉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흑설 공주가 심적으로 나쁜 짓을 하여 폐를 끼친다 한들, 민국은 그녀에게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말곤 현재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말이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지요. 좋은 몽정 꾸시기 바랍니다."
깎듯이 인사를 한 뒤 방을 나가는 민국이었다. 쿵. 홀로 남은 흑설 공주는 조금 남은 와인을 내려다보다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부질 없는 소망은 일찍이 접어두는 게 좋을 터인데.'
흑설 공주는 눈을 감았다. 싱긋하고,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미소조차 어찌나 씁쓸하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