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가족과 오붓한 저녁 식사 시간을 보내는 민국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족과의 식사 시간으로서, 어머니도 한 점 노력을 다했는지 오늘 식사는 진수성찬이었다.
웬일로 이렇게 음식을 차렸냐면서 물음을 던지자 언제는 안 그랬냐면서 호호 웃음을 짓는 어머니. 물론 그에 대한 민국과 아버지의 반응은 무반응일 수밖에.
'해영이 이 녀석은 아직도 그 일이 신경 쓰이나 보네.'
해영이는 식사를 하면서 상당히 홍조가 붉어진 얼굴을 짓고 있었다. 민국이 운을 띄우며 말을 걸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몰라하면서 노발대발할 노릇 같았다. 그 정도로 심신이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민국은 그냥 어머니 아버지와 재미나게 만담이나 까면서 노닥거릴 따름이엇다.
'이런 가족 간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지.'
항상 함께 하면 성인이다 보니까 늘 대립하고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겠지만, 이따금씩 가족의 집에 들어와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한다면 오붓한 분위기를 형성할 수가 있다. 이것이 자취방이 있고 없고의 현실적 차이이리라.
"잘 먹었습니다."
이윽고 식사를 마친 민국이었다. 겨울에다가 밤인 지라 날씨도 많이 춥겠다, 오늘은 더 이상 외출을 금하고 방에 들어가서 만화책이나 보다가 잠을 잘 생각이었다. 후두두두두두. 그리고 그때 바깥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구나. 하긴 장마철이라고 했지."
"아버지. 내일도 출근하는 마당에 고생하십니다."
어머니의 말에 뒤이어 민국이 아버지를 부르며 그리 말하자, 아버지는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그럼 이제 가서 잘 거냐?"
"그래야죠. 어머니 아버지도 안녕히 주무세요. 해영이 너도 딴짓하지 말고 얼른 자라."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딴짓'이란 단어가 유독 거슬렸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는 해영이었다. 그런 해영이의 언동에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부모님. 민국이 곧 피식 웃음 짓고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방문을 닫고는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마침 은별과 예나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연락 안해?]
[잘자 민국아]
은별과 예나의 메시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예나는 비록 연락을 하고 싶을 지언정 폐를 끼쳐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잘 자라는 인사만 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만일 잘 자라는 인사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간, 훗날 술에 취해서 예나가 무슨 오해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가 없어.'
흑화 소주건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하게 떠오를 만큼 매우 위력적인 사건이었다. 고로 민국은 항상 예나의 흑화를 방지해 최소한의 예의는 추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은별은.
'크흠, 메시지로 했다간 맞아 죽을 지도 모르겠군.'
은별은 확실히 일편단심 기질이 강한 만큼 집착성도 조금은 있었다. 물론 좋아하는 사이에서 집착성이 어떻게 없냐고 딴죽을 걸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병적으로 집착을 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연애를 하는 일반 여자들과 비슷한 정도였으니 민국도 맘이 편했다. 아니, 오히려 여자들이랑 이리저리 꼬이고 있는 민국의 현황을 감안할 때 은별은 화병이 도져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무지하게 관대했다.
'이래저래 다 봐주고 있는데 이 정도도 안 하면 난 굉장히 나쁜 놈인 셈이지.'
어차피 나쁜 놈인 건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자기 여자에겐 확실히 잘해주는 게 민국의 가치관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한담!'
잠시 고민을 하던 민국이었다. 이윽고 운에 맡겨서 민국은 동전을 던져 보기로 했다. 뒷면이 나오면 은별. 앞면이 나오면 예나. 이윽고 동전을 높이 던진 민국! 그리고!
'…앞면!'
이윽고 앞면이 나왔다. 그러자 망설임 없이 전화기를 들어 예나에게 연락을 하려던 민국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삼세판이라고 했다."
예나에게 연락을 했다가 혹여나 은별이 예나에게 먼저 연락을 하고 자기에게 연락을 하냐면서 딴죽을 걸면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고로 민국은 삼세판의 기회를 갖고 다시 운에 도전해보자고 감안했다. 그리고 다시 높이 던져진 동전은!
'뒷면!'
이번엔 뒷면이 나왔다. 고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은별에게 연락을 걸려는 민국!
"잠깐, 인생은 삼세판이라고 했지?"
은별에게 전화를 걸면 오늘은 편할 것이다. 하지만 은별에게 먼저 안부의 전화를 했단 사실이 훗날 예나의 귓속에 들어가면, 예나는 평소에는 내색하지 않아도 술에 취하면 극도로 예민해진 모습으로 무시무시한 추궁을 할 지도 몰랐다. 민국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삼세판의 마지막인 세 번째에 모든 운을 걸기로 했다.
"꿀꺽…."
이것은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유일한 선택길! 마음을 다진 민국이 있는 힘껏 동전을 위로 던졌다!
'과연!!!!'
그리고 결국….
"…왜 전화를 이런 식으로 하는데?"
"후후, 간만에 이렇게 세 명이서 통화를 해보고 싶더군! 하렘의 주인공답게 한 여자만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
"잘 때 눈에다가 고추장 발라버리고 싶네!"
"난 민국이가 전화를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전화를 하는 방식 중에는 아직 많이들 모르는 방식이 있었다. 그건 바로 여러 명이서 동시에 통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민국은 문득 TV프로그램에서 봤던 그 방식을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알아낸 다음에 곧장 응용했다. 고로 현재 민국은 한 휴대전화를 가지고 두 여자와 동시에 통화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했으니 훗날에 보복 당하거나 그런 건 없겠지 으헤헤헤헤!"
"……."
"민국이도 참…."
뭐 이런 병신이 다 있냐는 듯 할 말이 없는 은별과, 마치 자신이 언제 그런 해괴한 짓을 했냐는 것처럼 쑥스러워하면서 중얼거리는 예나. 어찌 됐든 결국 운 같은 건 수능 날에 엿이나 먹으라 하고 동시에 두 명과 통화를 한 민국이었다. 운에 사용한 동전은 주머니 속에 도로 넣고, 침대에 누우면서 천정을 보고 말한다.
"아무튼 둘 다 잘 자. 이번 새해는 정말 행복하자."
"줏대 있게 행동하는 남자는 평생 행복하겠지. 나도 이번 새해가 행복했으면 좋겠네?"
"허허, 은별양. 다음 해가 찾아온 만큼 우리 오늘만큼은 서로에게 착해집시다!"
그 말에 은별은 '치.'하고 어이없다는 듯 굴다가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이나 잘자."
"후후, 그러지요. 예나 너도 잘자."
"으응…. 민국이 너도 잘자. 새해 복 많이 받고."
이미 이전에 서로 복 많이 받으라면서 인사를 했던 민국과 예나였으나, 또 한 번 얘기를 건네는 예나였다. 민국은 그런 예나의 정겨운 예의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예나도 많이 받자."
"으응…."
민국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따뜻함이 묻어나는 것을 느끼면서 미소 짓는 예나였다. 그녀는 설사 이기적인 여자가 될 지 언 정… 그래도 민국을 사랑했다. 필시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윽고 통화를 마친 민국이었다.
"이제 한 살 더 먹은 셈이구만."
스물 한 살이었던 민국은 어느새 스물 둘이 되고 말았다. 은별도, 예나도 마찬가지였다.
'유이 씨는 그럼 스물 셋이 되는 셈인가?'
그리고 강서라는 이제 열 아홉! 고삼이 되는 셈이었다. 수많은 전국의 학생들이 죽을둥 살둥 버티면서 보내야 하는 고3! 민국도 그 고3의 심정을 차마 모르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일말의 격려도 할 겸 서라에게 연락을 하자고 생각했다. 뚜루루루루….
"띠용띠용."
"여."
"여긴 고3. 고3의 아지트 전화번호입네다. 지금 전화를 건 사람은 누구십니께?"
언제든지 연락을 걸면 장난부터 치는 서라였다. 민국도 이번엔 그 장난에 맞장구나 쳐주자고 생각하면서 손으로 코를 잡고 음성 변조를 하며 말했다.
"저는 고3을 망가뜨리러 온 11월의 수능 문제입니다."
"히이익! 다음 해까지 아직 10월은 남았는데 수능 문제가 벌써 출시라니! 부들부들!"
경기를 일으키는 서라의 반응에 민국은 피식 웃으면서 질문했다.
"뭐하고 있었냐? 설마 벌써 수능 공부?"
"온니찡. 지 같은 아이는 수능 공부를 남들보다 일찍 시작한답니당! 또래 애들과 비교하지 말아주시지여?"
"오오, 그러냐? 그럼 언제부터 시작했는데?"
"아까 1분 전에여."
그러하다.
"그럼 이제 막 공부를 하는 셈이군. 근데 어차피 밤인데 자고 나서 내일하면 되지 않냐?"
"실은 그러하지여. 근데 내일은 아노되여. 내일은 준비한 방송 컨텐츠가 대형이라 공부를 못해여."
고3이긴 하지만 서라도 방송 프로인 셈이었다. 물론 실체를 가리고 방송을 하기 때문에 진정한 프로라고 하긴 뭐했지만, 그래도 요즘 뉴튜브를 통해서도 수익을 벌고 있는 그녀였고 인기도 여간 많았으니까. 학교 또래 애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많이 알려지게 된다면 대학교를 가서 취업을 해도 벌기 어려운 수익을 서라 혼자서 벌고 있음에 많은 학생들이 열등감이 폭발할 것이었다.
"그렇구만. 아무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히이익! 온니찡 갑자기 왜 그럼? 우리 사이같지 않네여!"
"우리 사이가 뭔데 이놈아. 이놈이 친절하고 상냥한 이웃 오빠처럼 대해줘도 뭐라네."
"온니찡! 우리 사이는 말이지여! 300년 동안 어둠 속에서 껍씹다가 나온 사이에여!"
그러하다. 서라와 민국은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자명했다. 무려 300년이란 어둠의 세계에서 노닥거리다 온 두 몸이었으니까 말이었다. 비록 그 기억들이 온전하지 못할 지 언 정, 그런 일이 있었다는 감각은 아직도 몸을 통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사이인데 우리가 고작 새해 복 소리를 해야겠어여?! 아니지여!"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
서라가 실제로 보이지도 않으면서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만수무강 잘하세여 영감."
"오냐, 할멈도 만구무강 잘하시와요."
"근데 영감. 영감이랑 바람 피우던 아지매는 어디로 사라졌슈?"
"그거 사실 할멈이요. 몰랐슈?"
"히익, 나 기억상실증 걸린 거유? 어랏? 거유? 거유라니… 변태 영감이구만유!"
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여자인 법! 은 얼어죽을.
"그만하자."
"넹."
"아무튼 잘 자고, 복 많이 받아라."
"온니짱도 복 많이 받고 꿈속에서 저 상상하면서 몽정 많이 해여."
"으윽. 이놈이 안 그래도 하고 있는데."
"헐."
진짜로 할 줄은 몰랐는지 소름 돋는 서라였다. 그러나 뭐 사실상 두 사람에겐 이제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 오랜 시간이 남겨준 감정이 서로를 다 알게 만들었으니까.
"잘자세여."
"오냐."
그렇게 뚝하고 통화를 마친 민국이었다. 다시금 찾아온 정적. 민국은 이번엔 유이에게 연락을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유이에게는 연락하지 말고 그냥 메시지를 남겨두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일을 하느라 연락도 받지 못할 테니까.
[이번 해에는 그대의 가슴이 F가 아니라 G가 되기를.]
그렇게 자신의 소망을 그녀의 새해 복 기원으로 적어 보내면서, 민국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하아."
다시금 천장을 바라보면서 민국은 지난 시간들을 되새겼다. 나쁘지 않은 추억들이었다.
뭔가 괴롭고 씁쓸한 일들도 가득했고, 흑설 공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얽혀 있는 일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앞으로도 산더미처럼 풀어 나가야 할 문제들이 꾸역꾸역 넘쳐났지만… 민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지켜낼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자신이 더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해도 열심히 해보자."
그리고 마음을 다지면서 민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향 집에서 느끼는 간만의 향기는 민국을 편안히 잠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