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296화 (296/369)

296화

"여기선 이렇게 커넥션을 줘서 진행을 하면…."

"……."

"아 이렇게 하고 또 이렇게 해서…."

마침, 유이는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의 왈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현재 두 사람은 팀워크를 맞춰 게임을 제작해나가고 있었다.

민국이 소개시켜준 소설 작가,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는 스토리의 틀을 짜맞추고 있었고 유이는 그 틀에 알맞게끔 이야기를 설정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말을 하는 게 소극적인 타입인지라 뭔가 일을 추진하는데 문제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비슷비슷한 타입이라 그런지 크게 문제점이 없었다. 그리고 부담이 안 됐기 때문에 일하는 게 더 편하기도 했다.

"……."

만일 서민국 같은 작자와 이런 일을 진행했더라면 유이는 미쳐 돌았을 것이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윽고 유이에게 이런저런 스토리를 말하던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가 운을 띄었다.

"아, 잠시만요…."

"……."

"…어떤 놈이 제 작품을 불펌했다는군요. 우후후후후후후. 내가 분명 공지사항에 누누히 불펌하지 말라고 충고까지 했는데 우후후후후…."

부들부들 떠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자신의 작품을 불펌한 어리석은 영혼들에게 분노한 모양이었다.

"몇 번이고 참았는데 도덕성에 어긋나는 비야만적인 행동을 하다니…. 우후후후후…."

"……."

서서히 각성해가는 그런 그의 말을 들으면서 유이는 키보드나 놀릴 따름이었다. 그러던 찰나였다. 우우우웅, 하고 갑자기 유이의 책상 앞에 놓여 있는 휴대전화가 진동한 것이었다.

유이는 그 휴대 전화의 번호를 확인하다가 처음 보는 낯선 번호임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낯선 번호니까 받지 말자고 생각하고 이 결정을 이행했다. 어차피 유이에게는 소중한 사람도 없었고, 가족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우우우우웅.

"……."

그때 돌연 휴대전화의 연락이 끊기고, 이번엔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이는 메시지를 확인하는거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키보드 놀리는 것을 잠시 멈추고 메시지창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는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우후후후후후…."

"잠시만…."

음흉한 웃음을 퍼트리고 있는 추천 받고 싶어 하는 작가를 뒤로하고, 유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리고 1층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붙들었다.

"……."

사실상 이미 끝난 사이였다. 더 이상 그와 얽힐 이유도 없었고, 얽히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오래 전 추억 속… 최악의 상처로 남은 실정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낯선 번호로… 이렇게 연락을 해오는 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유이 씨. 저 강철남이에요.]

[대화 좀 해요.]

유이는 그 번호 역시 차단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그의 본래 번호를 차단해버리자 다른 사람의 휴대전화를 써서 연락을 해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유이는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한 법이다.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한, 자신을 본래의 자신으로 되돌릴 수 없게끔 만든 인간인데도 한 때 사랑했다는 기억 때문인지… 유이는 한 번쯤은 연락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엔…. 뚜루루루루….

"……."

"유이 씨?"

"네……."

결국엔 연락을 하고 마는 멍청한 자기 자신이었다. 컴퓨터의 해드셋에서는 스카이 라이프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의 분노 소리만이 들려올 따름이었다.

*  *

"엇흠, 유이 씨. 집에 계십니까?"

"……."

"설마 안 계시다고 할 예정은 아니겠지요? 제가 흥신소에 연락을 해서 유이 씨가 오늘 집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무려 300만원이란 거금을 들였습니다. 후훗, 저만한 스토커에게서 과연 자취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현관 앞에서 자랑스럽게 자신의 스토커끼를 드러내는 민국이었다. 그리고 평소라면 정적으로 자신을 숨길 유이가, 오늘따라 발걸음 소리를 내면서 현관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철컥하고 열리는 현관문 소리에 민국은 오오 하면서 맞은편의 서서히 드러나는 유이를 바라보았다.

"오오, 오늘은 빠르시군요."

"……."

"응? 근데 왜 이렇게 등에 지고 있는 분위기가 냉랭해 보이지?"

평소의 유이와 마찬가지로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어쩐지 달고 있는 분위기가 얼음장의 냉랭함 그 자체였다. 민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을 지었고, 이내 유이가 몸을 천천히 돌려서 복도로 향하기 시작했다. 민국은 일단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신명나게 들어갔다.

"엇흠, 오늘은 뭔가 분위기가 다르시군요 유이 씨. 설마 못 본 사이에 또 다른 인격이 생겼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요?"

"……."

이윽고 그때였다. 유이가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민국을 바라보았다. 이전이라면 마주치지도 않으려고 했을 그녀의 행색에 민국은 '오오'하면서 여러모로 감탄했다. 그때 유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철남 씨…."

"……."

"연락…."

그러면서 유이는 더도말고 자신의 휴대전화를 보여주었다. 모르는 번호로 온 연락이었으나 문자의 내용들을 보니까 강철남이 분명한 것 같았다. 민국은 유이가 왜 자신에게 그와 얘기한 내역을 보여주는 것인가 심히 의혹이 들었으나 얼마지 않아….

'!'

한 가지 불길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하다! 민국은 강철남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가짐 하나 때문에 유이를 자신과 사귀고 있다고 거짓말을 친 것이다. 심지어 임신했을까 안했을까? 하는 짓궂은 농담으로 유이를 더욱더…!

"엇, 엇흠 엇흠, 그러니까 말입니다 유이 씨."

"……."

"아니 애초에 그거 가지고 화내실 일도 없지 않습니까? 강철남 그놈이 너무 잘못한 것도 많고 해서 코 좀 납작하게 해주려고…."

그래도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는 건 결코 올바른 짓이 아니다. …두다다다다닥!

"꾸웨에에에엑!"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면서 천장을 열심히 날아 보인 민국이었다. 잠시 후 민국은 엎드려 절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진심으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

"아니 진심으로 그런 와해된 루머를 퍼트리려고 한 건 아니구요. 물론 유이 씨의 가슴을 만진 건 사실이고 그 크기도 제 촉감으로 추정하긴 했지만, 그래도 유이 씨를 임신시킨다거나 임신시켰다거나 그런 루머를 퍼트린 건 저도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설마 그 강철남 찌질이 자식이 당신에게 다시 연락을 해올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도 안 좋게 헤어진 사이라고 해도 그런 잘못된 소문은 퍼트리지 않는 게 옳았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의미로 제 얼굴 보게 해드릴게요."

"……."

유이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민국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흐음, 그런데 그 자식도 참 유분수지. 어떻게 유이 씨에게 다시 연락을 할 깡이 생겼답니까?"

"……."

"어지간히도 이기적인 놈일세. 역시 내 촉이 맞았어. 한 번 그런 성질이 있는 놈은 절대 안 바뀐다니까."

"철남 씨는……."

유이는 말을 하다가 흐리면서 민국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라보는 유이의 떨리는 눈길에서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민국은 '쩝'하고 입맛을 다시면서 대답했다.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스폰서 계약이니 뭐니 하는 문제로 다시 파뿌리 TV회사 건물에 왔던 모양이더군요."

"……."

"전에 초인종 가지고 장난칠 때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크게 상처를 입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유이 씨에 비하면 말입니다."

그렇다. 자신에 비하면 하염없이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강철남이었다. 그런 그에게 상처를 받아 이렇게 살고 있는 자신이 이토록 어리석고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말이었다.

"후우, 유이 씨."

"……."

"제가 누누히 말해왔지만 굳이 강철남 그 자식에게 아직까지 얽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유이 씨를 병들게 만드는 일일 뿐이에요. 그 족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게 제일입니다."

민국의 그런 충고는 몇 번이고 들어 왔었다. 이 세상에 나쁜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좋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유이의 인생은 항상 깡끄리 깨뜨려 왔었다. 마치 세상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이었다. 모두들,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서 항상 최유이를 이용하려고 했었으니까.

"쩝."

민국은 사실 아직도 그런 유이를 보는 게 불편했다. 필시 이런 유이의 불쌍함이 민국을 자꾸만 움직이게 하는 걸지도 몰랐다. 강철남 건을 몰랐더라면 평생 동안 그냥 어찌 되든 신경 안 썼을 사람일 텐데.

'나도 생각해보면 참 착한 사람이란 말이지.'

물론 나쁜 면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민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좋습니다 유이 씨. 백화점에 갑시다."

"……."

그의 느닷없는 말에 유이가 천천히 고개를 올려 보였다.

"백화점에 가서 유이 씨가 요즘 가슴을 당당히 피고 다니는 된장녀들보다 한층 세련되고 아리따운 여인이란 걸 증명시켜드리지요."

"……."

"아, 돈은 유이 씨가 많은 것 같으니 유이 씨가 다 쓰십시오! 저는 그냥 자신감 있게 해주는 법만 가르쳐 주겠습니다!"

그게 뭐야…. 다소 어이없긴 했지만, 유이가 막 제지하기도 전에 민국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순간 유이의 심장이 두근하는 느낌이 들었으나, 유이는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민국을 따라서 막 입을 열려는 찰나에….

"일이…."

"이것도 일입니다. 유이 씨의 인생을 새롭게 꽃피우게 만들어줄 일!"

말을 끊겨 버리면서 결국엔 민국을 따라 나가게 되는 유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백화점 쇼핑이 시작되었다.

"자, 보십시오 유이 씨. 지금 유이 씨가 입고 있는 옷을 봐요. 얼마나 하염없이 처량하고 불쌍한 성냥팔이 소년 같습니까?"

"……."

"참고로 성냥 팔이 소년은 소녀랑은 다르게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합니다. 걔가 사기꾼 기질이 좀 있었거든요. 성냥을 싼 값에 해외에서 밀매한 다음에 국내에서 비싸게 팔아 넘겼죠. 한창 라이터도 없고 불이 중요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잘 먹혔습니다."

무슨 느닷없는 소리인가 싶지만, 어쨌든 유이는 민국이 백화점 거울 앞에 세워 맞은편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국은 그런 유이를 이리저리 바라보면서 손가락으로 이곳 저곳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이 씨는 하염없이 처량하고 불쌍한 옷차림에 비해서 굉장히 볼륨 있고 뛰어난 골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골반으로만 따지면 예나를 이길 수가 없지요. 은별도 아무리 운동을 해서 라인이 좋다고 하지만 예나는 아기를 숭풍숭풍 낳기에 좋은 타입이거든요. 아, 그렇다고 해서 유이 씨의 골반을 욕 보이게 하는 건 아닙니다.

유이 씨도 충분히 아이를 잘 낳을 만큼 골반이 큽니다."

이거는 성희롱으로 분류해야 하는 건가 충고로 분류 해야 하는 건가. 유이는 알 수가 없어 일단 이야기만 들어갈 따름이었다.

"자, 그럼 유이 씨에게 알맞는 옷차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전에 초면에 저를 만나러 왔을 때 입었던 원피스 같은 거? 땡! 유이 씨에게는 그보다 더 알맞고 좋은 패션이 있습니다. 저보다 은별이가 패션에 대해서 더 잘 알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남들보다는 뒤쳐지지 않지요. 오늘 제가 유이 씨를 새로운 유이 씨로 만들어서 강철남 그 자식에게서 벗어나게 해드리겠습니다."

"……."

"에헤이, 그런 표정 짓지 말고!"

그런 표정이란 게 어떤 표정일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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