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이것이 남남이라고 말 까는 거 보소."
"진짜를 보여줬는데 굳이 이제 와서 예의를 차릴 이유는 없지."
강철남의 대답이었다. 그는 이미 착한 남자로서 변모하여 유이를 속였던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적은 유이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겨 주었었다.
"에휴, 슴가왕을 그렇게 만들어놓고도 아주 태연한 거 봐라. 이러니까 요즘 사내 새끼들이 문제라는 거야. 나 빼고."
"……."
정작 민국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속일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간 적은 없었다. 고로 강철남보다는 조금은 나은 대우를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강철남은 유이에게 정말이지 큰 상처를 안겨 주었으니까 말이었다.
"아무튼 네 그렇게 살지 마라. 바람을 피려면 나 당당히 바람피고 있는데 인정하고 둘 다 사귀어줄래? 라고 하던가."
"그런 말 하는 너도 제정신은 아니네."
"난 이미지가 원래 밑바닥이었으니 상관없지만 이미지를 천상계 꼭두머리로 만들어두고는 뒤통수 때리는 너보다는 낫다는 거다 한심한 새끼야."
민국의 말에 강철남이 홱 돌아보았다. 강철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민국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허공에 잽잽을 하면서 말했다.
"슉슉, 뭐 까부냐? 나라고 쉬는 동안 격투기 안 배웠을 거 같냐?"
"……."
"내가 스트레이트 한 번 갈기면 넌 하계로 떨어져 자식아."
이래봬도 유이에게 격투기를 배운 민국이었다. 그리고 그 배운 격투기 솜씨를 대물 흑형과 한 판 붙는데 사용했던 그! 이제 그가 두려워 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운동 쪽 최고의 유전자라 불리는 흑형과의 싸움에서도 결코 지지 않고 불알을 깨물었던 업적이 있었으니까!
"이 이빨 보이냐?이 이빨이 흑형의 불알을 깨문 영광의 이빨이다."
"……."
"까뿔면 너도 팍씨 이걸로 깨물어버린다 앙."
꽤나 불량하게 얘기하는 민국이었으나 그래도 매사에 막장스런 구석이 있는 이미지인지라, 당연히 일반인 입장에서 볼 때 무서울 리 없었다. 강철남도 민국을 쳐다보면서 '내가 이런 병신에게 들킨 건가….'하고 조금은 자괴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뭐, 두렵냐. 이제 와서야 나의 패기가 두려운 거냐. 이 모자르지만 또 모자른 놈아?"
"유이 씨는…."
여전히 주먹을 휘두르면서 폼새를 보이던 민국이었다. 그런 그에게 조금은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또렷또렷한 발음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강철남이었다. 그는 땅바닥을 쳐다보면서 얘기하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나?"
"……."
강철남의 물음에 민국이 주먹을 내리면서 쳐다보았다. 강철남은 죄 지은 죄인마냥 면목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민국은 그것을 얌전히 봐줄 놈이 아니었다.
"너 연기자 해볼 생각 없냐?"
"……."
"확실히 사람 속이는데 능력 있는 거 보니 사기꾼이나 해라."
민국의 비아냥에 강철남이 다시 화가 난 듯 째려보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본다. 하지만 민국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강철남의 눈빛을 피했다. 결코 한 대 맞을까봐 무서워서 피한 건 아니다. 맞는 즉시 불알을 깨물어버릴 테니까! 이 세상에 좀비보다 싸움 잘하는 놈은 없다.
"애초에 그렇게 속일 데로 속인 다음에 뻔뻔스럽게 굴어놓고 이제 와서 죄인처럼 연기하는 거 보소. 네가 그런 식으로 한다고 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일 거라 생각하냐? 멍청하고 아둔하구만."
"……."
"그런 게 아니면 이제 좀 뭔가 애꿎은 사람에게 잘못을 한 것 같아서 죄책감이라도 드나? 아서라 병신아. 어차피 태반의 사람은 선천적인 기질에서 벗어나질 못해. 사람 속이는 걸 즐겁게 여기던 놈이 또 다른 놈 속이는 게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냐."
"이 개색…."
"네 다음 진짜 개새끼."
"……."
"나도 개새끼이긴 한데 적어도 너보단 개새끼가 아니다. 난 바람을 핀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너처럼 상처를 주려고 노력하는 새끼는 아니란 뜻이야 인마."
확실히 민국도 제정신인 타입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강철남보다는 낫다고 확언할 수 있었다. 그 까닭은 필시 접근하는 방식과 해결하는 방식의 차이리라. 강철남이 남을 속이는 건 결국엔 자신의 득을 보기 위함이었고… 그런 사람은 간혹 남자든 여자든 어디서든 존재했다. 이름하여 자기합리화의 화신….
"엿이나 먹고 떨어져라."
"……."
민국의 논리 정연한 말에 강철남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상 돌이켜보면 자신이 개새끼라는 걸 피할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었다. 물론 민국은 슈퍼 개새끼였지만.
'크흠, 화가 안 풀리는군.'
민국은 오랜만에 만나서 강철남에게 욕을 한 바가지 하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까닭이 무엇일까 돌이켜 보니… 역시나 저번에 강철남에게 맞은 것 때문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때 맞은 거 존나 아팠어!'
대물 흑형도 그런 식으로 세게 때리지는 않았다. 고로 민국은 강철남을 더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강철남이 열불이 나게끔 할까… 한참을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호옷!'
민국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어차피 강철남은 더 이상 유이와 만나지도 못할 것이었다. 면목이 없는데 무슨 낮짝으로 보겠는가? 그리고 유이도 어차피 더 이상 강철남을 신뢰하지 못할 터. 그러니까 이참에 나쁜 짓이긴 하지만 강철남 엿을 먹일 겸….
"그리고 말이다, 더 이상 네가 유이 씨 걱정할 필요는 없다."
"……?"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가 하는 얼굴로 민국을 돌아보는 강철남이었다. 민국은 의자에서 당당히 일어나 자신의 가슴을 툭 건드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유이 씨는 나랑 사귀게 되었거든."
"……."
"푸하하하하, 부럽지 이놈아? 푸헤헤헤헤! 이게 바로 네토라레의 심정일 것이다!"
민국의 네토라레 발언과 더불어, 유이가 새로운 임자가 생겼다는 사실에 몹시 놀란 표정을 짓는 강철남이었다. 무엇보다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민국을 쳐다보는 게…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모습을 실제로 본 남자 같았다.
"무슨 소리…."
강철남은 진심으로 믿을 수 없단 얼굴로 쳐다보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기고만장하게 허리 쪽에 손을 얹고 있는 민국을 보면서 소리친다.
"너 여친 있잖아 새끼야!"
"훗, 여자 친구가 두 명이면 안 되냐?"
"……."
"두 명이나 세 명이면 안 되냐? 일부다처제가 괜히 있는 줄 아냐? 한국에서 일부다처제가 불가능한 건 줄 아냐!"
불가능하다. 했다간 뼈도 못 추릴 만큼 맞고 삿대질까지 당할 것이다.
"크흐흐흐흐, 영롱한 놈. 넌 몰랐겠지. 설마 내가 강간 씨와 사귀게 될 줄은 말이야. 하지만 강간 씨가 이렇게 얘기하더군! 당신이 바람을 펴도 상관없어요… 당신은 강철남처럼 사람을 속이는 타입이 아닌 걸요? 그러니까 저는 강철남보다 솔직한 당신을 따를래요! 으흐흐흐흐!"
"……."
근데 말을 하다 보니까 어쩐지 민국도 스스로가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300년의 기억으로 말미암아 서라도 사랑하게 되었고, 아직 서라와의 비밀을 은별이나 예나는 알지 못했다.
사실상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속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면 은별이가 뒷골을 잡고 쓰러질 지도 모를 텐데…. 여하튼 민국도 그 부분은 실로 걱정인지라 고민하는 상태였다.
"거짓말치지마라!!!!!"
강철남이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민국의 얼굴을 다짜고짜 주먹으로 때렸다. 퍼억! 느닷없은 펀치질에 길가던 사람들이 순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민국은 '어이쿠야!'하면서 순간 뒤로 넘어지는가 싶더니 그것을 속임수로 걸며….
"훼이크다 병신들아!"
그렇게 소리치면서 들고 있던 커피 캔을 맞은편의 강철남에게 던져버렸다. 순간의 화를 억제하지 못하고 터트렸던 강철남은 그 커피 캔이 자신의 코에 적중함과 동시에 내용물이 눈을 적셔버리자 눈을 감아버렸다.
"크으으으!"
"선빵필승 작전을 쓰다니. 얍삽한 놈."
다짜고짜 맞은 인중이 굉장히 아팠다. 그래도 다행히 치아가 나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유이에게 배운 게 확실히 효과는 있던 모양이다. 어지간히 싸움을 못하는 민국이었지만… 그래도 싸움의 신에 가까운 유이에게 배운 것이었으니까. 실력이 안 는다면 다소 거짓말이겠지.
"이 새끼…!"
강철남이 소매로 커피 내용물을 닦아낸 뒤에 다시 눈을 부릅 뜨면서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민국은 예전처럼 화를 내지 않고 여유롭게 상대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도 유이에게 배운 효과 덕분이었다.
'몸싸움에서 밀린다면 아이템을 사용해라.'
민국은 입고 온 코트를 벗은 다음에 녀석에게 던져 버렸다. 덕분에 주먹을 날릴 생각만 하던 강철남이 눈을 크게 뜨면서 그 코트를 치우려고 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덮친 그 코트와 더불어 민국은 뒤에서 녀석을 붙잡았다.
'뒤를 공격해라! 마치 아름답고 커다란 비누를 줍는 상대를 범하듯이!'
뒤에서 그대로 몸을 붙잡고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민국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여자들의 필살기를 따라해라! 여자들의 필살기는 보기에만 추할 뿐, 실질적으로 굉장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민국은 강철남의 머리카락을 한 뭉치 잡아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늘어지는 자신의 머리카락에 강철남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악!"
"에라이 엿 먹다가 수능 못 볼 놈아! 이것이 바로 내 패왕색이다!"
"이, 이 새끼가아아아아!"
변칙적이다 못해 아이템 사용이 필수인 민국은 당연히 일반적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타입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주변에서 웅성웅성거리면서 두 사람이 싸우는 자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걔 중에는 카메라를 키거나 휴대폰을 켜서 셔터를 찍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으아니 씨부랄.'
민국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미지가 낮아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혹여나 이 사진을 누군가 보고는 학교에 퍼트리거나 그럴 수도 있는 것이었다. 고작 강철남에게 분풀이하겠다고 그런 식으로 대망신을 당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국은 마지막으로 강철남의 귓속에다가 이렇게 속닥이는 거로 그의 화를 폭발시키게만 하자고 생각했다.
"유이 씨 가슴 크더라."
"……."
"푸헤헤헤헤, 넌 못 만졌지만 나는 만져봤지! 폭풍 임신은 했을까 안했을까?"
강철남이 부글부글 끓는 심정인 모양이었다. '야이 씨발!'하면서 코트를 치우면서 민국을 돌아보려고 한다. 하지만 민국이 발로 쳐서 빵하고 넘어뜨렸고, 그 다음에 바닥에 널브러진 코트를 주운 다음에 후다닥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갈 따름이었다. 웅성웅성.
"이 씨발 새끼야! 거기 안 서!"
"너 같으면 서 겠냐! 입장 바꿔 생각해봐라!"
그렇게 말하고는 사람들 속으로 완전히 도망가면서 민국은 '푸헤헤헤헤'하고 미소 지었다. 그러던 도중 앞에 사람이 있는 걸 눈치 채고는 확 멈춰 서는데.
'어머나.'
민국은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키가 훨씬 작은, 여자임을 확인하고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 같았다. 아니, 얼굴은 보이지도 않고 머리가 굉장히 꽤재재하며 옷차림도 다소 초라한 여자였다.
그 여자가 보이긴 하는 건지 의혹이 드는 머리카락 사이의 눈으로 민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국은 그 여자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이상하네.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야 이 씹새끼야!"
"이런!"
일단 도망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민국은 그 여자를 피해서 다시 멋지게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강철남이 다소 붉어진 얼굴로 휴대폰 사진으로 찍히는 와중에도, 민국은 코트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힘껏 도망갈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