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인생잼>
겨울방학이 끝난 지는 오래고, 이제 봄방학이 찾아온 실정이었으며 봄방학도 끝나가는 지 오래였다. 하지만 민국은 남은 열흘의 봄방학을 뭐하고 보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방송이야 뭐 매일 한다고 하지만, 그거 말고는 할 것도 없고.'
애초에 방송에만 치중하자니 방송은 민국에게 일이었다. 당연히 프로 의식을 갖고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말을 함부로 하는 컨셉이라 어떤 말을 하든 크게 논란은 안 된다지만, 그래도 굉장히 수위 높은 발언을 하거나 그러면 논란이 되어 분명히 이미지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었다. 이래저래 피곤한 그의 방송이었다.
"훗… 인기야 많아지는 것은 좋다만 너무 많은 인기를 받아 몸둘바를 알겠군."
어찌 됐든 간에 민국은 극도로 심심한 상태였다. 은별도 이젠 다음 학기를 준비하느라 거의 집에 놀러오지도 않았고, 그건 예나도 매한가지였다.
아무래도 예나는 은별이나 민국처럼 방송으로 돈을 크게 벌고 있는 입장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뭐… 기본적인 공부의 머리는 그녀보다 탄탄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오죽하면 학창시절에 공부벌레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공부를 즐기던 그녀였다.
미래를 크게 걱정할 필요성은 없겠지.
"하지만 심심한 건 심심한 건데 으아아 뭘 해야 하냐!"
콩딱지… 그러니까 강서라도 요즘은 잠적 중이다. 민국은 왠지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느꼈다.
'이놈이 단 하나뿐인 사랑스런 오빠를 두고 대체 뭘 하는 거냐? 무지하게 덮치고 싶구만!'
300년을 향한 서라의 감정은 끝이 없었으니…. 하지만 민국은 이따금씩 흑설 공주가 무슨 이유로 그 300년의 기억을 잊게 해준 것인가에 대해 영문을 갖고는 하였다. 애초에 흑설 공주가 지금까지 보여준 과정의 실정을 돌이켜 볼 때, 그녀는 주위의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보는 것에 도가 지나친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300년의 기억을 잊게 해주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면.'
이전에 300년의 기억을 잊게 해주면서 자신에게 보내왔던 메시지…. 문득 자신의 옛날 기억을 떠올리게 해준 그 날에 대한 감사의 표현인가? 만일 그렇다면 흑설 공주에겐 대체 어떤 과거가 있는 것일까? 민국은 문득 궁금해지긴 하였다.
"후, 그렇다고 그 면상을 보고 싶지는 않구만."
굉장히 예쁜 얼굴이었지만, 까칠까칠하고 위험한 느낌이 나는 여자였다. 민국도 처음엔 몰랐지만 뒤늦게 감지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은별조차도 가까이 하는 걸 꺼릴 정도이니… 말은 다한 셈이었다. 뚜루루루루루!
"나이스!"
한참을 심심해서 침대를 뒹굴거리던 찰나, 기다렸다는 것처럼 휴대 전화가 울렸다. 그리고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민국은 곧장 전화를 받았다.
"어이구, 우리 은주 누나 아닙니까."
"드디어 날 애인으로라도 삼을 생각이 든 거니?"
"아니… 그건 아닙니다. 아직도 남자 친구 안 사귀셨습니까?"
"너 기다리느라 참고 있지."
통화를 한 사람은 김은주. 스폰서와 연결을 시켜주는 파뿌리 TV의 직원이었다. 직위는 거의 부장급에 속하는 인물로, 이전에도 한 번 계약서 관련해서 얘기를 나눈 전적이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때는 강철남 건으로 계약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한 판 붙은 일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잘한 일이지 싶다.
'비록 유이 양반에게 상처는 줬지만 그래도 더 다치게 하진 않았으니.'
자신의 그릇된 도리는 참지만 남의 그릇된 도리는 참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기적인 남자, 서민국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하신 겁니까?"
"너랑 그냥 통화하려고."
"끄억, 그만두시죠. 저에겐 카드캡터 젤리라는 피규어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그래? 아쉽네."
김은주는 확실히 당돌한 여자였다. 말을 당돌하게 하는 은별이랑은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할까? 남자에게 저돌적으로, 그리고 매혹적으로 스킨쉽을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비록 스물 아홉 살이 넘은 여자로서 살림살이를 차리고 싶어 안달이 난 느낌이긴 하지만… 그래도 민국은 가능한 한 김은주 앞에서는 자신의 쌩쇼를 선보이지 않았다. 때때로 김은주는 민국의 발언 하나 하나를 유혹으로 듣고 접근하는 기질이 있던 지라… 민국도 때때로는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뭐 내가 잘 생긴 게 한 몫하는 것이겠지만. 훗.'
결국 기승전결에서 결은 자신의 잘난척으로 끝매듭을 지은 다음에, 민국은 김은주가 연락한 것에 대해 다시금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스폰서 계약이 와서 그렇지."
"스폰서 계약이요? 제 아이디 쪽지로 이번 주는 한 번도 제안이 없던데?"
"좀 큰 건이라 그래. 바로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하고 싶은가봐."
"흐음. 그렇군요."
"올 거니?"
"가긴 가야죠. 파뿌리TV 비제이들이 가장 갈구하는 돈벌이 시초 중 하나인데."
스폰서 계약은 원래 가능한 한 하는 게 좋은 법이다. 물론 그 스폰서 계약의 보답에 대한 조건이 영 시원치 않으면 끊는 것도 올바른 방법이었지만. 그래도 요즘 파뿌리TV에서 그보다 잘 나가는 사람이 없는 만큼, 현재의 인지도를 이용해서 광고를 하고 싶어 하는 스폰서 사장들도 가득한 것이다.
이윽고 김은주와 통화를 마친 민국이 옷을 대충 갈아입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구멍을 기어 온 은별이 거실로 나오는 민국을 보면서 말했다.
"어디 가?"
"오, 은별 양. 공부하느라 나 같은 남자 내팽겨쳐두고 오로지 공부라는 애인과 바람을 피던 우리의 은별 양!"
"…무슨 소리람. 다음 학기부터는 중요하니까 더 철저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잖아?"
팔짱을 끼고 대답하는 은별이었다. 그녀라고 공부를 하는 게 좋을 리가 없었다. 예나처럼 공부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이었기에 할 뿐이었다. 민국은 마치 고독한 남자처럼 이마 근처에 손을 올린 다음에 말했다.
"훗.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나 같은 남자를 두고 공부라는 놈과 NTR을 찍다니. 나도 스폰서와 NTR을 찍으러 갈 것이다."
"네네, 다음 바보."
이젠 한 두 번 본 게 아니라 익숙해진 모습으로 은별은 민국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민국이 입고 있는 옷깃의 주름들을 잘 펴주기 시작했다.
"옷 주름도 제대로 안 핀 상태로 나갈 생각이었던 거야? 첫 인상 안 좋게 보여 이 바보야."
"뜨어억."
민국은 자기 가슴을 한 쪽 손으로 움켜쥐면서 충격적인 얼굴을 지었다.
"그만… 그만해라! 너에겐 이미 공부라는 애인이 있잖아! 왜 자꾸 스폰서랑 사귀기로 마음을 먹은 나를 흔들어…."
"자꾸 그러면 맞는다?!"
"넵."
이 이상의 개그는 통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은별은 민국의 주름 진 옷을 펴주고 머리를 좀 더 단정스럽게 손질해주었다. 아주 별 거 아닌 손짓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민국은 한층 단정스러운 면모가 되었다. 은별은 조금 물러난 다음에 뿌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이제 잘 갔다 와."
"앵? 고작 그게 끝입니까?"
"뭐가 고작 그게 끝이야?"
아니… 돌연 자기 방을 방문했길래 뭔가 다른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런 민국의 말에 은별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공부랑 NTR하는 걸 괴로워하는 거 같아서 너에게도 사랑을 주러 왔는데 스폰서랑 NTR하러 간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잖아?"
민국이 하던 대로 맞받아치는 은별이었다. 그런 그녀의 드립에 민국은 부들부들 떨었다. 은별이 피식 웃음 지으면서 민국을 쳐다보자, 이윽고 민국은.
"으오오옷!"
"…뭐, 뭐야?!"
와락하고 은별을 껴안아버린다.
"안 되겠어! 여기서 내가 다시 네 남자라는 걸 증명하고 나갈 테다! 공부라는 놈이 보는 앞에서 널 임신시켜버리겠어! 이것이 바로 진정한 네토라레!"
"…뭐래는 거야 미친 놈이! 빨리 가! 늦잖아!"
꽈악 껴안고 있는 민국의 얼굴을 밀치는 은별이었다. 하지만 민국은 지지 않고 은별을 계속 껴안으려고 노력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모에 모에 은별 모에!"
"…이 바보가!"
결국엔 은별에게 있는 힘껏 밀쳐지고 나서야 포기하게 된 민국이었다. 그러나 스폰서로 가는 도중 은별이 단정스럽게 해줬던 손길의 체온은 아직도 묻어 있었다. 민국은 얼굴을 붉히면서 인사를 하던 은별의 모습을 떠올리니 돌연 미소를 짓게 되었다.
'나도 진짜 나쁜 남자구만.'
지금 이 순간 확신하는 것은, 자신이 정말로 은별을 사랑한다는 것! 하지만… 흑화 소주건으로 인해 예나에게도 호감을 갖게 됐을 뿐더러 300년의 시간으로 말미암아 서라도…. …조만간 민국은 정말로 맞아 죽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 은주 누나."
"왔니. 저기서 기다리고 있으렴."
은주 누나의 말이었다. 오늘도 건물 안은 바쁜 직원들로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정신이 없는 사람 중 한 명에 속하는 은주도 이리저리 복잡한 상태 같았다.
'많이 바쁘신 모양이구만.'
어차피 시간이 되면 부르겠거니 생각하면서 민국은 근처 의자에 앉았다.
"민국아. 이리로 오면 돼."
"네, 갑니다요."
이윽고 민국은 은주 누나를 통해서 스폰서를 제안하는 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악수를 나눈 뒤 가볍게 계약에 관련하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의외로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데.'
민국은 스폰서 계약 도중 조건에 대한 이치가 맞지 않자 결국엔 거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씩 이런 스폰서들이 꼭 있었다.
스폰서 비용 대신 판매하는 컴퓨터를 선물로 주거나, 혹은 자신이 판매하는 곳의 물건으로 스폰 비용을 대신하고 싶다고. 물론 민국은 뉴튜브를 통해서도 버는 수익이 많았기 때문에 더 이상 스폰서에 얽메일 필요는 없었고, 한 번쯤은 이런 식으로 진행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죄송하지만 무리겠군요."
이런 식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사장들을 보면 민국은 불쾌한 맘에 곧장 거절할 따름이었다. 결국 오늘 스폰도 계약이 제대로 체결되지 못한 것이었으나 민국 딴에선 아쉬울 게 없었다. 오히려 이런 스폰서들이 접근할 때 바로바로 끊어버리는 행동을 하여 입소문이 퍼지게 한다면, 그것이 더 좋은 방도라고 생각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그래, 나중에 다시 연락 주렴."
은주 누나의 말에 민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올라오는 층수 칸을 바라보면서 있길 어연 10초. 돌연 옆에 누군가가 우뚝 섰다. 민국은 그냥 모르는 사람이겠거니 신경 쓰지 않고 가만히 있을 따름이었다.
"……."
그러다가 불현듯이 무언가 익숙한 기척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민국은 고개를 돌려 그 상대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자.
"……."
"……."
그 상대도 민국과 동일한 생각을 했었는지, 민국을 마침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로를 쳐다보게 된 사람. 하지만 좋은 추억이 있을 리 없다. 오히려 안 좋은 추억만 가득가득 쌓인 두 사람 입장에선.
"……."
마주한 상대는 강철남이었다.
캔 커피의 캔을 딴 다음에 강철남에게 건네는 민국이었다. 강철남은 파뿌리TV 건물 바로 앞의 의자에 앉아서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는 한 모금 마시려다가 멈칫하는 동작이었다. 그에 민국이 한 마디했다.
"침 넣고 싶었지만 캔 커피라서 방도가 없었으니 그냥 먹어 인마."
"…그렇군."
강철남은 그냥 한 모금 커피를 홀짝였다. 민국은 그런 강철남의 의자 옆 공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자신도 마찬가지로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면서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