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왠지 추천 못 받으면 그날 슬럼프에 걸려서 울적울적한 기분을 만끽할 것 같은 분이시군요."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보기보다 많이 착해서…."
그러하다.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이 씨, 받으시지요. 우리의 가슴 대마왕님."
"……."
직원이 대령하는 커피를 받아 유이에게 건네는 민국이었다. 유이는 가슴 대마왕이라는 호칭에 순간 뜸을 들였지만 결국엔 그 커피를 얌전히 받아서 홀짝거렸다. 홀짝거리는 유이에게서 직원에게로 고개를 돌린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가 운을 띄었다.
"여기 흑설탕 없습니까?"
"흰 설탕이라면 저기."
"저는 흑설탕 아니면 안 먹습니다."
유이를 따라서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민국이 맞은편의 그를 보면서 운을 띄었다.
"뭔가 취향이 독특하시군요. 흑설탕이나 흰 설탕이나 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흑설탕은 흑설탕 나름의 맛이란 게 있습니다…."
"호오, 예를 들면요?"
민국의 물음에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는 잠시 눈을 감고 스토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골똘히 생각하던 그가 마침내 감동적인 스토리 한 가지를 떠올렸는지 입을 열었다.
"왠지 이 흑설탕은 시공간을 멤돌고 결국엔 하나의 세계에 착지해서 괴로운 추억과 기억을 안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잔혹함과 씁쓸함의 맛이라고 할까요."
"왠지 엄청난 네타성 발언 같지만 공감은 되는군요."
저도 모르게 공감을 하는 민국이었다.
"그런데 지금 커피에 넣고 계신 흑설탕이랑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제가 집니다…. 단맛을 이길 수 있는 남자는 없으니까요."
유이는 순간 생각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저 남자 역시 제정신은 아니구나, 라고 말이다. 애초에 민국의 황당 무개한 발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맞장구를 치는 순간부터 이미 그에겐 비제이로서의 기질이… 다분한 걸지도 몰랐다. 맘에 드는 발언이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두 번이나 끄덕이던 민국이 말했다.
"언젠간 저도 흑설탕의 맛을 맛볼 수 있기를."
이건 이것대로 위험한 발언이다. 어찌 됐든 간에 두 사람의 조용한 대화는 이어졌다. 의외로 민국은 여자에게만 막대하는 것이 아닌, 남자에게도 막대하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적당 선은 지킨다는 점에서 필시 그게 매력으로 다가와서 많은 여자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이겠지.
"……."
그래도 유이는 크게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그저 커피만 홀짝이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만나게 된 중요한 목적인, 본론에 관련해서 언급하기로 선언한 민국이었다. 그런 민국의 선언에 맞은편의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떤 게임입니까?"
"유이 씨, 정확히 어떤 게임인지 설명해주실래요? 저도 그건 잘 모르니까."
민국이 유이에게 되물었다. 졸지에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유이였다. 하지만 유이는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예전이라면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는 게 몹시나 당황스럽고 어색했을 텐데… 이제는 뭐랄까… 민국과 조우한 뒤로 이런 경험을 한 두 번 한 게 아니라서 조금은 적응된 실정이었다.
"솔로 RPG…."
"그렇군요…."
"흠흠!"
"하지만 온라인으로도 가능한…."
유이의 덧붙이는 말에 순간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이었다. 표정 변화에 큰 차이가 없던 추천 받는 남자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라인?"
"헐. 그 게임이 온라인으로도 가능하다고요?"
유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온라인으로 진행할 수 있는 루트야 얼마든지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온라인으로 서비스가 가능하게끔 클라이언트부터 프로그램까지 전부 짜맞춘 것이었다. 이윽고 그 이야기를 들은 추천 받는 남자는 놀란 표정 그대로 할 말을 잃어버렸고 지켜보던 민국은 이런 소감평을 표했다.
"와, 임신시켜서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
"……"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쳐다보는 유이에게 질겁해서 그만 그렇게 말을 하고 피하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추천 받는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턱에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온라인 게임 스토리 제작이면 규모가 엄청날 테고 만일 게임이 대박이 나서 잘 되면 내 스토리도 유명해질 테고, 스토리가 유명해지면 나는 돈도 많이 벌 테고, 돈도 많이 벌게 되면 인지도도 생겨서 내 팬도 많아질 테고, 그렇게 되면 나는 여자들을 좌우로 쌍으로 끼고…."
"……."
"더는 옥수수 수염차를 한 병만 마시지 않아도 되고… 두 병이나 마셔도 될 지도."
그렇게 확신을 한 추천 받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유이는 굉장히 날카로워진 그의 눈매에 가만히 쳐다볼 따름이었다.
"무일푼으로 진행해도 되니 스토리 참여 좀…."
"……."
갑자기 비굴해지는 추천 받는 남자였다! 그래도 네 작품이나 출간했고 무려 연재도 잘하고 있으며 이북까지 출간 예정인 작가인데! 갑작스레 비굴해진 그의 모습에 유이도 순간 내색은 안했지만 당황스런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민국이 다시금 유이에게 물었다.
"근데 유이 씨, 온라인이라고 해도 총 몇 명의 사람이 참여 가능한 게임입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게임 인원수를 채우려면 서버라는 게 필요하고 그 서버 비용이랑 트래픽 비용이 장난 아닌 거로 아는데 말입니다."
"돈 걱정은…."
말하다 멈칫하는 유이였지만, 민국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유이는 돈이 많았다.
비제이로서 랭킹 1위를 먹고 있는 민국이나 그 아래의 강은별보다도 훨씬 많은 편이었다. 어떻게 돈이 그렇게 많냐고 한다면 복권 당첨이나 토토를 전부 맞춘 건 아니었다.
유이가 그렇게 돈이 많은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천재성 때문이었다.
"……."
무엇을 하든 인간의 심리적인 부분에 대해선 능력이 부족했지만, 이론적인 부분… 특히나 컴퓨터 계열이나 수학 계열에선 그녀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왜, 살다 보면 뉴스에서 천재 소년이나 천재 소녀라고 나오는 사람들 있지 않던가? 유이도 그에 속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들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다면… 굳이 많은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바로 바로 이해하고 실용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슴 대마왕이 아니라 천재 대마왕이었다니.'
민국은 돈은 크게 걱정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유이를 보면서, 괜히 가슴만 믿음직해지는 게 아니라 그녀 자체가 믿음직해지는 걸 느꼈다. 물론 초라함을 일말이라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인간적으로 따질 때, 평범한 사람은 천재의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괴로움을 느끼는 법이었다. 비록 민국도 평범함에 달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보다 높은 천재를 보니 허허 놀라울 따름이었다.
"스토리 좀…."
"……."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고 굽신거리는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를 보던 유이였다. 아무래도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는 진짜로 유이가 제작한 온라인 게임의 스토리를 제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의 스토리는 상당히 대규모에다가 퀘스트 같은 것도 일일히 짜맞춰야 하는데 과연 혼자서 진행을 할 수 있을까? 단순 스토리만 감안해도 몇 달은 걸릴 지도 몰랐다.
"오래 걸릴 지도 모르는 일…."
"괜찮습니다. 제가 막 쓰는 대신 분량 늘리기는 자신 있는 타입입니다…. 이번에 쓰고 있는 가슴왕의 표본이란 작품도 벌써 300편 가까이 되고 있는데 주인공이 히로인 세 명밖에 공략을 못했습니다…."
"……."
자랑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사람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뭔가 다소 비범해 보이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어찌 됐든 유이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스토리를 해준다고 하니까 고맙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 실망할 수도 있는 만큼 일단 자신의 게임 기반 틀을 보여주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감안해서 미리 준비해왔던 노트북을 꺼내드는 유이였다.
"한 번 보시고 결정…."
"네…!"
마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일본의 부하가 총수를 보면서 '하잇!'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이윽고 유이가 작동시킨 노트북 화면 안의 게임 틀을 보면서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는 입을 쩍 벌렸다.
"문득 제가 쓴 소설에서 '작가님, 설마 유이 데려간다고 하지 않겠져?'라는 댓글이 떠오르네요…."
"?"
"아니… 아닙니다. 그냥 소설 캐릭터 중에 유이 씨랑 똑같은 이름의 캐릭터가 있어서요…."
참고로 그 캐릭터도 가슴이 큰 설정이라고 한다. 싸움도 잘하고… 그야말로 판박이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는 노트북의 게임 틀을 볼 때, 이것은 도무지 놓치고 싶지 않은 게임이란 걸 느꼈다. 고로!
"같이 해주세요…."
"……."
"돈 드릴게요…."
뭐, 이리하여 스토리 작가를 구하게 되었다. 그래도 책을 출간해본 작가로서 유이가 원하는 스토리를 원하면 곧장 쓸 수 있는 능력은 되었다. 다만 퀄리티는 장담할 수 없었기에 아마 어지간히 고생할 것 같았다. 일하는 방식은 굳이 유이 씨의 집에서 함께 하는 것이 아닌, 각자 집에서 준비한 자료들을 이메일로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그전에 계약은 해야 했지만… 무료 배포용으로 진행한다고 하니 딱히 계약서를 작성하기도 거시기했던 점이 있었다.
"와, 무슨 100억 부자십니까? 그 서버를 감당해야 하는 게임을 무일푼으로 운영한다니."
"……."
나중에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뒤,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유이의 내용을 들었던 게 떠올랐는지 민국이 그리 질문했다. 유이는 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유이는 큰 돈을 벌었던 이유가 신기술 도입 때문이었다.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신기술이라던가, 벤처 기업에서만 제작하느라 고생하는 것을 단순히 혼자서 제작을 했고 그것을 정부에 신기술이라며 판매를 했던 것이다.
당연히… 번 돈이 어마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녀에게 돈에 대한 악감정도 없었고 관심도 크게 없어서, 굳이 과시하면서 살아야 하는 까닭도 없었다. …누군가와 얽히는 것도 원치 않았고. 따지고 보면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일반인과 다소 달랐던 것이다.
성격부터 기본 생각까지도.
"아무튼 잘 되어서 다행입니다. 후후후, 어때요. 다 저 때문에 잘 된 거 아닙니까? 답례로 가슴 한 번은 만지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
확실히 민국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일이 술술 잘 풀린 건 있었다. 앞으로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가 어떤 식으로 스토리를 제작할 지에 대해서는 유이가 상상하고 진행해야 할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이번 건에 대해서 민국이 도와준 건 맞았으니까.
"그건…."
"된다고 해줘 이 양반아. 어디 한 번 그 큰 가슴을 주물럭거려보자. 으흐흐흐, 탐스럽게 한 번 만져보자꾸나!"
"……."
투다다다닥! 이번엔 새로운 기술이었다. 민국의 복부를 연방 발로 때리는 것이 아닌, 민국의 머리카락만을 노려서 발로 때리는 것이었다. 당연지사 민국은 다치진 않았지만, 그래도 머리 위를 스쳐간 엄청난 한기에 순간 무언의 위협을 느꼈다.
"슈, 슈벌… 이젠 위협하는 방식도 가지가지군요 유이 씨!"
"……."
아무튼, 폭력을 함부로 쓰지 않게 되는 것도 민국에게 점차 호감을 느껴서 일 지도 모른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둔해 빠지게 된 유이로서는 아직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래도 오늘 일에 대한 고마움은 확실히 있었다.
"……."
조금은 괜찮은 사람일 지도 모른다고, 아주 조금은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