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스토리는…."
유이는 말을 하다 멈칫거렸다. 이번엔 서민국이 먼저 말을 끊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마땅한 스토리를 강구해두지 못한 최유이. 그래서 글 연습이라도 하면서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준비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었다.
"앵? 설마 최유이 씨."
"……."
유이가 멈칫거리면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 민국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혹시 저에게 스토리를 보여주시는 게 부끄러워서 글자들은 다 지워둔 겁니까?"
"……."
"아하하하, 제가 올 것을 감안하고 미리 스토리를 지워두다니. 그 정도로 저에게 스토리를 보이는 게 자신의 속옷 차림을 보여주는 것처럼 수치스럽고 부끄러우셨나 보군요."
그럴 리가…. 하지만 유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모니터만 쳐다볼 따름이었다.
"아니면 혹시 생각해둔 스토리가 없어서 그런 겁니까?"
"……."
황당한 얘기를 하다가도 이따금씩 정확히 비수를 꽂는 소리를 하는 민국이었고, 덕분에 최유이는 이번에도 입을 다물고 있게 되었다. 이윽고 계속되는 추궁에 유이는 결국 참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네…."
"흐흠! 의외로 유이 씨도 못하는 게 있었군요. 가슴도 크고 싸움도 잘하고 컴퓨터도 잘 다루는 양반이 글짓기에는 약하다니.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
"하지만 때때로 하늘도 불공평한 세상의 이치에 맞게 모든 것을 공평하게 주지는 않지요. 유이 씨는 유난히 뛰어난 바스트와 골반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반면 글에 대한 능력은 현저히 딸리게 태어난 모양입니다. 어쩔 수 없지요. 제가 도와주는 수밖에."
키보드를 두들기던 유이의 손이 순간 멈칫하였다. 이윽고 천천히 민국에게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하자….
"오오, 제가 도와준다고 하니까 그 기대하는 눈동자는 뭡니까? 너무 기대하시다가 실망하면 그거 꽤 민망합니다!"
"……."
아니, 그런 걸 생각한 게 아닌데…. 유이는 민국에게로 얼굴을 돌린 상태에서 고개를 느리게 저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느린 동작이 발동하는 딜레이 시간을 이용해 민국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설마 저의 비싼 도움을 받는 게 너무나도 황송하고 부끄러워서 거절하려는 거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이미 유이 씨의 게임 작품에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여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 마음은 에베레스트가 갑자기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굳건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같이 합시다 유이 씨!"
"……."
거절을 표명하기에는 이미 뒤늦은 사항 같았다. 워낙 말 하나는 조리 있게 잘하는 서민국이었기에… 그리고 이런 말솜씨를 보면 확실히 민국은 유이보다 글을 잘 쓸 것 같기도 했다. 유이도 그것을 어느 정도 짐작을 했기 때문에… 한 번 맡겨보는 건 어떨까 싶은 생각과 동시에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
자신이 개발한 게임 툴로 직접 제작한 게임…. 하루에 약 여덟 시간씩 집중하면서 노고를 치른 게임이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스토리는 많은 대중들이 즐겨 볼 수 있는 위주의 스토리면 좋을 것 같았다. 매번 1만명이 넘는 시청자들이 즐겨 보는 방송의 비제이 서민국이라고 하면 좀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우선 스토리는 말입니다, 흐음. 기다려 보십시오. 한 번 제가 침대에 걸터앉아서 생각을 해보기로 하지요."
"……."
"그런데 유이 씨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좋으십니까 아니면 액션 환타지 같은 스토리가 좋으십니까? 약간 게임 형태를 보니까 액션 환타지 같은 게 어울릴 것 같은데."
"감동적인…."
"감동적인 거라고요?! 허허, 유이 씨도 의외로 소녀 감성이 풍부한 때가 있군요. 상복부는 이미 소녀의 감성을 뛰어넘은 완전체인데 말입니다."
이제는 지속되는 성드립에 상처를 받기는커녕,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그만큼 민국의 인상은 이미 유이에게 '완벽 변태'로 낙인찍힌 것이었다. 결코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
"흠흠흠흠."
"……."
"흠흠흠흠흠흠."
"……."
"흠흠흠흠흠흠흠!"
"……."
이윽고 한참을 몰두하던 민국이 무언가 괜찮은 스토리를 알았다는 듯 손뼉을 짝하고 쳤다. 키보드를 두들기던 유이를 호명하는 민국이었다.
"유이 씨, 이런 스토리 어떻습니까?"
"……."
키보드를 두들기던 유이가 아쉬움을 느끼면서 멈칫하였다. 그리고는 찬찬히 민국에게로 고개를 돌려 보였다. 민국은 마치 자신이 상상한 스토리 중에 회심의 스토리라는 듯 이야기를 꺼내었다.
"주인공 이름은 일단 서민국입니다."
"……."
"그리고 세계에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난 것이죠. 몬스터가 출현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정부에서 비상계엄령까지 선언할 정도로 때거지로 몬스터가 나타났고, 그 몬스터들은 일반 현대 과학 무기로는 생채기 하나 주지 못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놈들인 겁니다."
"……"
"그리고 거기에 갑자기 능력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죠! 왜 갑자기 능력 같은 것이 부여된 건지는 이유 묻지 맙시다. 몬스터들이 갑자기 출현한 것처럼 능력도 갑자기 발생한 거니까요. 그리고 그 능력자들만이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고 몬스터의 시체를 돈으로…."
"……."
"와, 내가 생각해도 스토리 쥑이네! 그리고 주인공은 마침 찌질이에다가 가진 것도 없는 불쌍한 놈이었는데 갑자기 능력을 손에 넣은거죠! 그런데 그 능력이 다른 능력자들보다는 뭔가 특이하고 특별해서 높은 대우를 받고 때부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자 히로인으로 강은별부터 한예나까지, 그리고 강서라부터 최유이 씨까지. 아, 여기서 최유이 씨란 지금 제 앞에 있는 당신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소설 속에 나올 현존 인물과 관계가 없는 캐릭터입니다. 그 네 사람이 저를 사랑하게 되어서 저는 어쩔 수 없이 으쌰으쌰를 하고 가족을 꾸려서 아기와 함께 잘 산다는 대리만족 스패셜 이야기죠. 어떻습니까?"
"……."
"흠, 표정 보니 별로인가 보군요. 대중적으로는 인기 만점일 텐데."
유이의 표정은 거의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오래 안 사이라서 그런지 뭐가 싫고 뭐가 좋은지는 판별할 수 있던 민국이었다. 민국은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결국 다른 이야기를 생각해보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유이는 다시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게임의 나머지 빈틈이나 채우자고 생각했다.
"이 스토리는 어떻습니까?"
"……."
"이 스토리는요?"
"……."
"이 스토리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오는데, 크아. 내가 이토록 스토리를 잘 짰나? 소설가나 해볼까?"
민국이 제안하는 여러 스토리를 들으면서 유이는 그냥 침묵했다. 들으면 들을 수록 다 맘에 확 들어오는 스토리가 없었다. 결국 민국도 어느 정도 한계를 느꼈는지 '흐음'하다가 입을 열었다.
"결국 어쩔 수 없군. 비장의 스킬을 사용하기로 하지요."
"……."
비장의 스킬이라면서 다짜고짜 휴대전화를 꺼내드는 민국이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데….
"어, 서라냐?"
"……."
"어 다름이 아니라 네가 예전에 말했던 그 작가 있잖아. 그 출간한다는 작가였나 그 작가 말이야. 어 그래."
"……."
"내가 아는 바스트 큰 여인이 게임 제작을 하고 있는데 스토리가 없어서 협조를 받고 싶거든. 혹시 도움 받을 수 있나 해서 그러는데 어. …오 이 쉐끼, 유이 씨인 건 어떻게 알았대? 천재구만."
바스트 큰 여인에서 이미 최유이라고 답이 나왔지만. 어쨌든 통화하고 있는 내용을 보니 연락을 주고 받는 사람은 강서라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출간한다는 작가라니…. 최유이는 그에 대한 소식은 하나도 접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다소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훗. 유이 씨."
"……."
이윽고 통화를 끊은 민국이었다. 그는 회심의 일격을 가하는 주인공처럼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이 씨는 몰랐을 겁니다. 설마 제 친한 동생 강서라에게 아는 소설가가 있을 거라곤."
"……."
유독 '친한' 부분에서 강조를 하는 민국이었다.
"정 유이 씨가 제 스토리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인맥을 동원해서 소설가의 스토리를 끄집어 낼 수도 있는 법이지요! 음하하하하, 이제 조만간 연락이 올 테니 기다려 보시기 바랍니다."
기다려 보라는 말에 무섭게 곧장 휴대전화가 울려왔고, 민국은 다시 연락을 받게 되었다. 강서라가 소개시켜준 소설가와 직접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 갑자기 경어를 쓰면서 대화하고 있었다.
유이는 그런 민국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모니터로 돌려서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확실히 소설가의 스토리라고 한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유이가 만족해 할 만한 게임 스토리가 나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스스로도 조금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맥이 없는 자신은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민국에게 무의식적으로 듬직함을 느낀 것도 있었다.
"오케이, 됐습니다. 유이 씨, 그거 다 끝나는대로 나갑시다."
"어디를…."
"훗, 스케줄 잡았지요. 이 작가도 어지간히 백수인지 오늘 바로 약속 잡자네요."
"……."
"아무튼 끝나는대로 나가면 됩니다."
다짜고짜 잡힌 약속이었지만, 그래도 실제 책을 출간한 작가라고 하니 유이도 조금은 흥미가 생겼다. 그쪽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하는 공부의 호기심. 이윽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였고,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남은 문제들을 보완하는 그녀였다.
* *
"훗. 무려 책을 네 작품이나 출간하고 전자책 출판을 비롯해서 연재 사이트에서도 연재를 하고 있는 작가라고 하는군요. 그런 작가를 제가 연락해서 단숨에 불러낸 겁니다. 유이 씨, 너무 그렇게 반했다는 감정을 담아서 저를 쳐다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어헛! 거기서 그만 말을 멈추십시오. 저란 남자, 너무 말을 많이 하는 여자에게는 질리는 법입니다. 그랬다간 당신을 버릴 지도 몰라요!"
"……."
유이는 생에 최초로 말이란 걸 많이 해보고 싶어졌다. 끼이익, 아무튼 그 순간이었다. 두 사람이 있는 오붓한 커피숍 안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로 향하는 한 남자의 모습에, 민국과 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민국이 그 남자를 보면서 웃음 짓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
유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긴 했으나, 그래도 예상했던 인상은 완벽히 무너졌음에 조금은 당황했다. 도무지 초면인 사람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후줄근한 복장…. 거기에다가 사방팔방으로 삐쭉삐쭉 튀어나와 있는 머리카락들…. 잠을 못 자고 평생 글만 쓴 사람처럼 눈 밑에 깔려 있는 어두운 다크서클…. 뭔가 넷상에서 보던 소설가들의 전형적인 모습 같았다.
"하하, 첫 인상치곤 굉장히 익숙한 모습이군요."
"네… 추천을 덜 받아서 그렇습니다."
"추천? 그게 뭡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왠지 말하는 투도 뭔가 기묘했다. 마치 시체처럼 죽어 있는 사람 같달까. 이윽고 민국과 유이가 있는 맞은편 자리에 앉은 남자였다.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민국답게 먼저 운을 띄었다.
"저희 쪽에서 부른 거니 커피는 저희가 쏘도록 하겠습니다. 커피 뭐로 원하십니까?"
"저는 쿠폰이면…."
"쿠폰? 그건 뭡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저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는 그냥 녹차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유이 씨는 뭐로 하실 래요?"
이윽고 유이가 마실 것도 알아낸 뒤 직원을 불러 주문하는 민국이었고, 이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세 사람이 각자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럼 서라가 비제이인 건 아시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중요한 비밀이니까 저도 말하는 걸 꺼리고 있습니다."
"허허, 마치 언젠간 터트릴 거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라는 느낌이 물씬 드는 말이 아닐 수 없군요. 저는 서민국입니다, 비제이 이름으로는 현대왕이고. 이미 서라에게 다 들으셨겠지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민국의 악수를 받았다. 다음 차례는 유이였다. 민국이 고개를 돌려 유이를 바라보자, 유이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면서 맞은편 남자에게 인사했다.
"이 사람은 가슴의 왕, 최유이 씨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였고, 이제 다음 차례로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였다.
"저는 종이책을 네 작품 정도 출간했고… 전부 양산형이라서 욕을 엄청나게 먹었지만… 욕을 많이 먹어서 오래 살고 있는 작가…."
"……."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라고 합니다…."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