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소설이란>
오늘도 신명나게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는 최유이였다. 그녀는 타자를 두드리다가 잠시 멈칫하면서 자신의 흔들리는 머릿결을 만져보았다.
겨울철이 지나고 서서히 봄이 찾아오는 때에 벌써 머리가 이토록 길어지고 말았다. …물론 유이의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기다란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관리를 소홀히 하여 그 이상으로 길었고 지저분한 느낌이 가득했다.
이리저리 삐쭉삐쭉 솟아 있어 거추장스러운 모양새였다.
"……."
머리를 깎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유이였다. 하지만 나머지 일정부터 소화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금 키보드 치는 것에 집중하였다. 평소 말이 없는 그녀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얼굴을 지을 때마다 묵직한 분위기를 풍겼다.
"……."
요즘 유이는 게임 개발에 헌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짜고짜 게임 개발이라면 의아해 할 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에 대한 언어도 습득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독으로 게임을 제작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여럿이서 팀워크를 짜서 진행해야 하는 것을 홀로 진행하다 보니 배로 시간이 걸리는 건 있었다. 그래도 인간 관계로 인해 감정적인 손실은 없었으니 차라리 이것이 편하단 생각이 그녀의 의견이었다.
"……."
몇 번이고 타자를 두들기던 유이였다. 문득 게임에 대한 겉치레적인 부분은 완성한 그녀였지만, 막상 제일 중요한 부분 한 가지를 간과했단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건 바로 스토리였다.
'스토리…….'
참고로 유이는 스토리를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설사 쓴다 한들 워낙 암울한 인생을 지내온 그녀였던 지라 본능적으로 참담한 스토리가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의외일 지 몰라도 유이가 적고 싶은 것은 굉장히 즐거운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게임.
그녀가 다짜고짜 그런 게임을 제작하려는 이유는 사실 별 게 없었다. 물질적인 욕구라고 하기에는 공짜로 배포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나중에 시청자들에게 자신이 제작한 게임이라면서 한 번 보여주고 싶은 충동도 있던 것이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정이라고 할까. 아무리 사람을 믿지 못하고 싫어한다지만, 선천적으로는 착한 마음을 지닌 그녀였기 때문에 그런 인간적인 선을 자꾸 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
하지만 이거…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소설이란 소설은 써본 적이 없고 읽어본 적도 없다. 그녀가 읽은 것은 그동안의 역사책이라던가… 공부에 필요한 교과서들이라던가… 그런 것이 전부였으니까.
'글 쓰는 걸 연습….'
이참에 글 쓰는 것에도 이의를 두어 연습을 해볼까 심도 있는 고민을 하던 찰나였다. 딩동, 어디선가 초인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초인종 소리였다.
"……."
딩동. 딩동딩동딩동. 한 번으로 끝나는 초인종 소리가 아니었다. 애초에 집에 들어올 택배도 없었고 찾아올 사람도 없었다. 아니… 찾아올 사람이라면 한 명 있을까…. 왠지 이 초인종 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들려서 거부감이 느껴졌다. 딩동 딩동! 이윽고 초인종을 누른 주인이 입을 열었다.
"계십니까 유이 씨."
"……."
"아니, 스승님. 오늘도 한 수 배우려고 왔습니다."
이젠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목소리였다. 아니, 사실상 만나는 사람은 그말고는 없었으니까 익숙해질 수밖에…. 어쨌든 유이는 혹시나 1층의 현관문 앞에 서 있는 그가 타자 두드리는 소리라도 들을까 키보드에서 손을 멈추었다. 그러나 귀신 같이.
"타자 두드리는 거 멈춘 거 다 압니다 스승님."
"……."
"엇흠! 절대 풍만한 마음씨 보려고 온 게 아닙니다. 저는 니거와의 싸움 이후 더 많은 깨달음을 얻어 스승님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찾아온 것이지요."
그런 거 필요 없다만…. 그래도 이미 유이의 루트를 전부 꿰뚫고 있는 남자(?)였다. 어쩌면 사람 마음을 속이는 간사한 강철남 따위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일 지도 모른다.
이따금씩 얀데레의 분위기도 물씬 풍기는 게…. 어쨌든 찾아오기로 연락을 했던 이상 유이도 마냥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윽고 드르륵 의자를 밀고 계단으로 내려온 유이가 현관문을 천천히 열었다.
"오세…."
"오우, 유이 씨. 오늘 머리카락이 굉장히 이리저리 삐죽삐죽 튀어나온 게 크리스마스트리같군요!"
"……."
"그나저나 유이 씨는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저는 양다리 걸치고 데이트하다가 양볼에 주먹 맞은 자국 생길 뻔했는데."
참 좋은 자랑이다…. 유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늘 하듯이 특유의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보냈…."
"아아~ 이런 이런, 유이 씨. 아무리 유이 씨가 저의 싸움의 스승님이라 해도 인간 관계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한 거 아닙니까? 인간 관계에 대한 건 오히려 저에게 배워야 할 노릇입니다."
"……."
"정 뭐하면 싸움을 배우고 있는 답례로 제가 인간 관계란 어떻게 습득하는 것인가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남녀의 인간 관계란 말이지요, 일단 서로가 서로의 살결을 맞대서 옷 없이 흐흐흐…."
스윽! 다가오는 민국의 기척이 느껴지자 곧장 발을 올리는 유이였다. 그것은 일종의 무언의 협박이었다. 민국도 그 위협을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으어엇'하면서 물러날 따름이었다.
"폭력 반대! 더 이상의 폭력은 아이를 힘들게 합니다!"
"……."
어찌 됐든… 오늘도 변함없이 찾아온 인물, 서민국이었다.
서민국은 어떤 남자와의 혈투 이후 유이의 집에 몇 번이고 찾아오게 되었는데 한 달에 작게는 네 번, 많게는 여섯 번 정도였다. 물론 의외로 적은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 번 왔을 때 머무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꽤나 많은 시간을 그와 보낸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제는….
'으아아아! 심심하다고요! 은별이랑 예나는 요즘 바빠서 놀아주기도 어렵지! 난 방송 끝나면 할 것도 없지!'
'…….'
'서라 이놈도 조온나 로리라서 아직 부모님에게 간수를 받는 실정이랍니다! 고로 난 혼자라고! 혼자야 으헤헤헤헤헤!'
'…….'
'심심해 놀아줘어어어어!'
사실… 흑인과의 싸움 이후 깨달음을 얻어서 찾아온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민국은 애초에 혼자 있는 시간이 지루해서 유이의 집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 은별, 예나, 서라말곤 거의 없을 뿐더러 유이는 가슴이 컸으니까….
"큰 가슴은 보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일이랍니다. 혹시 제 말을 듣고 열불이 나신 대한민국 여성 분들이 있다면 정말로 죄송하단 인사를 드리며 허리를 숙이겠습니다."
"……."
왠지 그 말에 더 화를 낼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간에 그러한 까닭으로….
"놉시다."
"저 일…."
"뭐요? 일보다 제가 더 중요하다고요? 아잉~."
"……."
가만히 지켜보자 민국도 난감한 듯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였다. 그리고 정색하면서 다소 진지하게 묻는 그였다.
"뭐하시는데 그럽니까?"
"……."
"그러고 보니 유이 씨, 혼자서 사는데도 집도 좋고 잘 나가시지요! 부모님이 혹시 돈이 많으신 분입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면 유이 씨가 하는 일이 막 엄청나게 돈 많이 버는 부유한 프로젝트?"
내심 궁금했던 것을 질문해보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유이에게는 부모님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겐 어릴 때부터 부모란 존재가 존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를 민국이었고, 유이도 차마 그 사실을 민국에게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건으로 화낼 자격은 없었다. 그래서 유이는 굳게 입만 다물고 있었다.
"혹시 로또라도 당첨되셨습니까?"
"……."
"사스가, 역시 로또 1등."
비아냥 같지만 특유의 그만의 농담이었기에 유이는 이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표현은 안하지만 그녀도 이젠 민국의 행동거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실정이었다. 다만 스스로가 그 사실을 쉽사리 자각하지 못할 따름이었다.
"일하고…."
"무슨 일인데요. 저는 보면 안 되는 일입니까?"
"……."
지겹게 추궁하는 민국이었다. 유이는 그런 민국을 보다가 그냥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민국은 올라오라는 의미인지 아닌지 몰라 '으음'하면서 잠시 심도 있게 고민을 하다가 천천히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사실상 거절을 당하면 그냥 1층 거실에 앉아서 유이의 가슴이나 상상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
그러나 그런 민국의 음모(?)를 알고 있었다는 듯 유이는 계단을 마저 다 올라온 다음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불이 꺼져 있는, 그리고 특유의 서적들이 널브러져 있는… 이상하게 넓은 방임에도 불구하고 좁디 좁은 느낌의 향이 나는 방이었다.
"이 방은 전에 봤을 때와 다를 게 하나도 없군요."
"……."
"역시 유이 씨의 일관성이란."
책이 널브러져 있으나 이상하게 먼지는 하나도 없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먼지만 쏙쏙 빼서 청소하는 것일까? 만일 그런 청소 방법이 있다면 한 번 싸움 말고 그에 대한 방법도 전수받고 싶은 계획이었다.
"앵? 이게 뭡니까?"
"게임…"
이윽고 민국이 켜져 있는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서 질문을 던졌다. 유이는 즉각 대답했다. 민국이 고개를 돌려서 다시 유이를 쳐다본다. 유이는 다시금 대답했다.
"게임…."
"게임? 게임이요? 자체 제작?"
그 말에 유이는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이 '호오'하면서 모니터를 보고는 말한다.
"저도 한 때 RPG툴이나 게임 제작 툴로 게임을 제작했던 경험은 있지요. 이거 보니까 어릴 때 게임 제작했는데 플레이어들에게 욕 오진장 먹어서 부모 잘 계시냐고 안부 묻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참 좋은 추억이었는데."
"……."
"그런데 이건 무슨 툴로 제작한 겁니까?"
"툴도…."
보통 게임 툴을 사용하면 사람들이 많이 쓰는 툴을 사용할 따름이다. 하지만 유이의 대답은 의외성 no1이었다.
"툴도 제작…."
"……."
"……."
유이는 애초에 게임 툴도 자신이 직접 제작해서, 그 툴 안에서 게임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민국은 순간 듣고도 못 믿겠단 얼굴로 유이를 바라보았다.
"툴을 직접 제작했다고요?"
"……."
"헐, 미친, 이럴, 수가."
감탄사를 몇 번이고 내뱉던 민국이 다시금 모니터와 유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말한다.
"뻥치지마 이 양반아! 가슴 크다고 그런 거까지 다 용납해줄 거라 들어?!"
"진짜…."
하지만 유이는 명백했고, 더불어 민국은 할 말을 잃었다. 설마 자기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은 여자 양반이 이토록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대단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비제이 현대왕이라고 합니다."
"……."
"나중에 제가 게임 사업 좀 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개발자로 좀."
"……."
악수를 건네면서 제안하는 민국이었고, 어차피 농담이었기 때문에 넘어가는 유이였다. 이윽고 컴퓨터에 앉는 유이를 뒤에서 지켜보면서 민국이 말한다.
"크아, 그래도 대단하군요 유이 씨. 설마 유이 씨에게 가슴 말고도 이런 대단한 능력이 있을 줄이야."
"……."
"저는 당신의 가슴만으로도 족했는데 당신은 그 이상을 가슴 속에 묻어두고 있었군요. 역시 당신은 내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야."
유이는 그에 대해서 그냥 대답하지 않기로 하고 키보드만 놀렸다. 그렇게 유이가 일하는 광경을 가만히 구경하던 민국이었다. 불현듯 모니터의 게임 화면에서 뭔가 빈 걸 확인한 듯 민국이 물었다.
"왜 게임 스토리에 대한 건 하나도 안 적혀 있습니까?"
"……."
그렇다. 게임의 기본적인 부분들은 전부 완성이 되어 있었지만, 게임의 가장 주된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증거로 글자라 표시되는 것들이 거의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