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방송에 도전하다!>
민국의 마음은 지금 서라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로 가득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끝내 이루기에는 자신의 오래된 신념이 자꾸만 앞길을 가로막았다. 이미 슈퍼 개새끼가 되었는데 뭐가 두려울 소냐! 민국은 차라리 서라를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임신시켜서 자기 곁에 두는 걸 선택할까 고민도 했다. 그러나 끝끝내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촤하하하 하기 싫단 말이다!'
민국은 로리를 극도로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로리를 자신의 성스러운 액체로 오염시키는 건 결단코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미연시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리셋이 가능하고 다시 체재 변환이 가능했기 때문에 두려울 게 없었던 것이다. 실상이라면 전혀 다른 법이지….
'어찌 됐든….'
이러이러한 관계로, 결국 오늘 서라와의 만남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결과는 없는 것 같았다.
"야, 돌아가면 방송이나 켜라. 같이 합동 방송이나 하자."
"의잉… 나님 오늘은 방송 못함여. 집에 부모님 계셔여."
"이런! 너는 내가 널 사랑하는데 방송 하나 못 킨단 말이냐! 사랑한다고 이 여자야!"
"히이익!"
서라는 과장스럽게 눈을 크게 뜨면서 놀라는 척을 했지만, 사실상 민국의 그런 고백에 가슴이 이따금씩 벌렁벌렁거릴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민국에게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사랑 고백을 받는 건 생전 처음이었으니까 말이었다. 어찌 보면… 그 300년의 시간이 결단코 후회되는 일은 아니었음을 서라는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었다.
"내일 방송 킬 테니까 오늘은 혼자 열심히 하세여! 온니찡 화이팅!"
"후우… 에라이 예쁜 영계 같은 놈."
"헤헤."
그리고 눈웃음을 짓는 서라와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민국이었다. 민국은 정말이지 여러 고민들로 머리가 복잡할 지경이었다. 특히 앞으로의 미래는 천하의 대범한 서민국조차도 점칠 수가 없었다.
"……."
하지만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이 있다면, 분명 이 사실을 이실직고할 때가 찾아올 것이란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민국은 결코 피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흑화 소주건과 미연시 세계 건으로 민국은 누군가의 사랑을 회피했을 때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 직접 경험했으니까 말이었다.
"에구구구, 추워라."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끼이익 열어젖히는 순간이었다. 때 마침 집안에는 누군가 있었고, 열리는 현관문 소리에 그 누군가는 화들짝 놀라면서 이쪽을 쳐다보는 모습이었다. 민국이 말했다.
"예나야?"
"아… 민국아…."
예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민국을 보았다. 거실에서 그녀는 어떤 식재료들을 만지고 있었다.
"집에 허락없이 들어와서 미안해…. 근데 밥이 없는 거 같아서."
"아…."
예나는 현모양처 스타일로 항상 민국이 밥을 굶고 다니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알아채고 도와주는 타입이었다. 고로 민국의 어머니보다도 훨씬 어머니 같은 사람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었다. 민국은 이런 어여쁜 여자 친구 2호(?)를 왜 이때까지 외면했는가! 몹시 미안해졌다.
"안 그래도 추운데 굳이 하지 않아도 돼. 그냥 같이 음식이나 시켜먹자."
"으응…. 하지만 나중에 먹을 것도 필요할 거 같으니까 따로 만들어둘게."
현재 음식만이 아니라 나중에 먹을 음식도 중요하다. 안 그래도 겨울철이라 감기가 걸리고 몸상태가 많이 위독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로 예나는 민국의 건강 상태를 양호하게 만들 겸, 민국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음식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으어어, 예나 너는 참으로 좋은 여자야."
"……."
민국의 칭찬에 내심 부끄러운지 얼굴만 붉히는 그녀였다. 이윽고 그녀가 기분이 좋은 듯 희미한 미소를 그리면서 부엌으로 향했다.
"반찬들도 몇 개 사왔으니까 나중에 필요할 때 꼭 먹어줘…. 콩밥도 해둘게."
"그래 그래, 난 자장면이나 주문해둘게. 같이 먹자."
"으응."
그리고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을 손질하는 예나를 뒤로하고 민국은 음식을 주문했다. 이건 거의 신혼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오묘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여전히 어색한 공간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민국은 오랜 시간 예나와 신체적 터치를 자제하고 있었다.
흑화 소주 건의 충격인지… 아니면 오랜 소꿉 시절을 친구로 알아와서 그런지, 신체적 터치라는 게 참으로 거리낌이 느껴지는 실정이었다.
* *
그렇게 민국은 예나와 함께 자장면을 배달 받아 옹기종기 식사를 치렀다. 이 방안에서 두 사람 간에 흐뭇한 분위기를 꽃피우며 식사를 하는 건 실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이윽고 식사를 마친 뒤 민국은 곧장 컴퓨터로 향해서 전원을 키기 시작했다. 예나는 그것을 보더니 뜸을 들이다가 질문했다.
"방송…하려고?"
"아, 그렇지. 매일매일 해줘야 하니까."
예전에 비해 확실히 방송의 성실도가 높이 올라갔다. 무엇보다 요즘 들어 시대가 인터넷이 대세인 시대로 변모하다 보니, 민국의 방송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혹자들도 굉장히 많아진 실정이었다.
뉴튜브 구독자 랭킹 3위권에 드는 민국이었고, 심지어 파뿌리 TV에서만 해도 그의 팬층이 장난 아니게 많아진 실정이었다. 이 와중에 어떻게 방송을 허투루 하겠는가? 이젠 아예 방송 쪽으로 직업을 정해도 될 정도였다.
"흠, 오늘은 혼자 방송하기에는 컨텐츠가 좀 부족한 거 같은데. 아는 사람이라도 불러볼까."
"……."
"아니다, 방법이 있었지."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민국은 예나에게 잠시만이라고 한 뒤 다른 집의 방과 이어진 구멍으로 향했다. 그가 기어 들어간 곳은 은별의 방이었다. 이윽고 예나가 잠시 거실로 나오자 두 사람의 옥신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노크도 없이 방에 들어와!"
"으앗! 나는 네가 날 상상하면서 '으앙, 가버려… 하지마… 하면 안 돼애애….'하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냐!"
"닥쳐어어어어!"
은별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시끄러운 소리가 한 차례 들린 뒤 잠잠해졌다. 이윽고 소곤소곤 대화를 나눈 뒤 민국이 다시 구멍을 기어 자기 거실로 돌아왔다.
"휴우, 하마터면 죽는 줄 알았네. 그래도 간만에 위로의 천국을 보았으니 이득인 셈이로군."
"……."
"아, 예나야? 왜 거실에 나와 있어?"
"으응…."
예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왠지 씁쓸하긴 했지만, 차마 표현은 하기 뭐한 예나였다. 이윽고 아무것도 모르는 민국은 그런 예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자장면 그릇을 봉지에 담아서 현관문 바깥에다가 둘 따름이었다. 이윽고 컴퓨터로 향하는 민국을 보면서 예나가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난 가볼게…?"
"아, 벌써 가게?"
"응… 예슬이도 잠시 봐야 하니까."
민국은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 구멍까지 배웅(?)하였다.
"그럼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아니, 구멍이 있으니까 바로 들어오면 되겠다."
"으응… 고마워 민국아…."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하면서 예나는 구멍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순간 낑하고 멈춰버린다.
"미, 민국아…!"
"훗… 또 끼었군."
"……."
예나의 골반이 워낙 큰 편에 속하다 보니 별 수가 없었다. 예나는 분명 저번에 흑설 공주를 통해 오갈 수 있는 구멍 사이즈를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왜 골반이 조금씩 끼는가 의문이 들었다. 이윽고 얼굴을 붉히고 울상을 짓는 예나를 향해 민국이 두 손을 놀리면서 말했다.
"예나야! 온 힘으로 밀 테니까 앞으로 빠르게 기어가!"
"으, 응…!"
"하나 둘!"
그리고 있는 힘껏 예나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고 민 민국이었다. 예나는 그 추진력으로 간신히 끼었던 구멍에서 벗어나 자기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민국이 구멍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면서 물었다.
"잘 들어갔어?"
"으응… 고마워 민국아."
"아니야, 흑설 인간한테 다시 사이즈 조절 좀 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
"……."
희미하게 미소 짓는 예나였으나 그래도 한 편으론 씁쓸했다. 이윽고 민국과의 대화가 끝난 뒤 방에 홀로 남게 된 예나는 1인용 침대에 천천히 걸터앉았다.
"……."
민국과 은별은 방송 비제이였다. 그것도 방송 계에서 꽤나 소문이 난, 인기 만점의 비제이들. 요즘은 안 그래도 방송이 인기가 더 많아진 탓에 이런저런 제안이 들어와 한층 바빠진 실정 같았다. 예나는 민국이 그런 식으로 잘 나가는 걸 보니 내심 뿌듯하긴 했다. 하지만 한 편으론.
'은별 씨도… 서라도 전부 방송을 해서 민국이랑 대화할 거리가 있는데….'
돌이켜보면 예나는 민국과 항상 얘기를 할 때 공통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고작 한다고 하면 대학 과제 이야기? 그러나 방학이 찾아오면서 그 대학 과제 이야기도 할 게 거의 없었다. 요컨대, 예나는 항상 민국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을 뿐 실질적으로 같이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내가 너무 취미가 없는 걸까….'
물론 취미가 없는 건 아니다. 공부를 하고… 영어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교양 지식을 키우고… 예나도 나름대로 취미가 있었다. 다만 그 취미가 차마 남들이 취미라고 하기에는 다소 공부스러운 점이 있던 것이다.
'…….'
어찌 됐든, 예나도 민국과 뭔가 공통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취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
"저기… 민국아…?"
"응? 왜 그래 예나야?"
다음 날, 민국의 집으로 다시 놀러온 예나. 식사 중에 있던 예나는 자기 방에서 가져온 배트민턴 채를 꺼내들면서 말했다.
"혹시 배드민턴 안 칠래…?"
"앵? 왠 배드민턴?"
"으응… 그게 부모님이 쉴 때마다 항상 배드민턴 치러 가시곤 하거든. 그래서 잠시 빌려서 밖에서 같이 쳐볼까 하고…."
"흐음…."
민국은 창문을 돌아보았다. 후우우우웅….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오늘따라 바람이 유독 세기도 했고, 딱 봐도 엄청난 추위가 느껴지는 날씨였다. 민국은 웃음 지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어렵지 않을까? 워낙 추운 날씨라서…."
"그…렇지?"
"응. 날씨만 좋았어도 같이 쳤을 텐데. 아쉽다."
민국의 말에 예나는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겨울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한 번 거절 당했다고 포기할 예나가 아니었다.
"민국아… 혹시 같이 요리 해보면 안 될까…?"
"앵? 요리?"
"으응…. 왠지 같이 요리해서 음식 만드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서…."
민국은 예나를 한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예나는 그런 민국을 차마 미안하단 듯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나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 조금은 이해한 민국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그러자."
"고, 고마워…!"
그리고 시작된 요리. 투다다다다닥. 민국은 아주 노련하게 야채를 썰고 밥도 선뜻하고 있었다.
"……."
예나는 이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민국은 자취생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예나 자신보다 요리는 못한다 한들, 그래도 자기 요리는 손수 할 만한 능력이 되었다. 그런 민국의 요리 실력을 간과했던 예나는 결국 자신이 의도했던 즐거운 요리 시간은 가지지 못했다.
"왜 그래?"
"아, 아니야…."
이상한 예나의 모습에 질문하는 민국이었으나, 예나는 이번에도 어색하게 웃음 지으면서 넘어갈 따름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예나에게 남은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 방송해보면 안 될까…?"
"……."
"……."
은별이도 잠시 민국의 집에 놀러왔을 때였다. 예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렇게 질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