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또다시 흑막이 찾아왔다.
2백년의 기억을 안고 나머지 백년을 감당할 시간이었다.
남들보다 일찍 시간을 초월한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꿈속으로 진입하기 전 무수한 추억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가족, 내가 사랑했던 남자,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
어쩜 죽음보다 이게 더 잔인한 일은 아닐까, 포기하고 싶은 맘도 몇 번이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이곳에 있으려고 노력했다.
시즌 3 마지막 에피소드 : 당신을 기다립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움도 사라진다. 증오도 사라진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는 생각만이 들 뿐이다.
나에게 글자라는 것과 윤리, 도덕에 대한 기초 역시 보잘 것 없을 뿐이다.
사람으로서의 인간성이 메말라갈 뿐이고,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리라.
‘안녕하세요 현대왕입니다!’
오늘은 그와 함께 방송에 참여했다. 무려 백 년만의 일이었다.
백 년 만에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졌어야 할 그가 다시금 나에게 나타난 느낌이었다.
때문에 그를 사랑했던 감정은 당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
필시 오랜 시간을 겹겹이 이곳에서 살아온 나와, 그곳의 내가 맞물려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이해했다.
이해해봤자 어차피 이곳에서의 생활을 일 년 동안 하게 되면 또 까마득히 잊고 옛 기억이 되어버리겠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소중하지 않다.
적어도 추억이라고 간직하기에는 너무나도 괴로운 시간이었다.
200년이란 시간을 체감하며, 그 사이 사이 껴 있는 그의 목소리와 얼굴을 떠올린다.
과연 나는 또 이곳에서 그를 언제 동안 기억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인간이 아니게 될 것이다.
마치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물건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변화란… 무섭다.
적어도 이런 옳지 않은 변화를, 나는 겪고 싶지 않았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어둠의 사면을 향해 몇 번이고 애원을 해보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포기해야 했다.
내가 그를 포기해야만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바보 같고 미련한 나의 욕심은 아직도 그를 향해 있다.
2백년이 흐른 지금도, 어리석게도 나의 무의식이 소리치고 있다.
‘놓아선 안 돼.’
‘그를 놓으면 안 돼.’
이제 놓아도 되지 않을까?
내가 이만큼 고생했단 사실을 알면…
이제 그도 이해해주고 내가 포기하게끔 해주지 않을까?
고작 일 이년이다.
그 일 이년 만난 사람을 위해서 나는 나의 존엄성을 버리고 있다.
어리석고, 주제도 모르고, 현실도 몰라서 설치는 행위였다.
나의 이 교만이 만들어낸 300년의 결과물은, 과연 얼마나 처량하고 구슬플까.
결국 그는 날 봐주지 않을 것을, 2백년이 흐른 뒤 변해버린 나의 인간스러움도 눈치 채고 있다.
‘그래도.’
‘놓으면 안 돼.’
사랑 받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도…
바보 같이, 처량하게….
나의 기나긴 백년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 *
오십 년이 흘렀다. 무려 이백 오십년이었다.
현실의 나는 고작 여덟 시간의 잠으로 때우겠지만 실제 이 꿈속에서의 나는 그 몇 천배에 달하는 시간을 맞보고 있었다.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은 지 벌써 이백오십 년.
아니, 저번 백년 이후 한 번 현실을 체감했으니 오십년인 셈인가.
그러나 곧… 그것을 계산한들 무슨 소용이랴 코웃음만 나올 뿐이다.
나는 많이 바뀌었다.
이제 사람들이 알던 내가 아니다.
필시 이 기억을 안고 현실로 돌아가면, 평소의 나를 떠올리던 수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나를 보며 실망하겠지.
그래서 한 편으론 다행이다.
그나마 현실에선 이 지옥을 잊을 수 있다는 게.
그 위안을 안고 나는 나머지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무엇을 위해 이토록 꿈속에서 싸우고 있는 건지 의미도 잃어버린 채.
‘무엇을 위해서였지?’
한 남자를 위해서였다.
이름도 잃어버린 그 남자를 위해서, 나는 이 꿈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사람 마음 참 간사한 게…
이제 슬슬 그에게 질리고 있었다.
곁에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 추억으로 잠들어버려서 그런지.
오십 년이 흐른 지금 하루밖에 못 본 그의 얼굴이 이젠 기억도 잘 안 나는구나.
이름이 뭐였지? 서… 서민….
‘핫.’
이름도 까먹어버린 그 남자를 위해서 나는 이곳에 있단 말인가….
당장에라도 탈출하고 싶은 맘을 굴뚝 같이 잡고 있는 내가 대견하다.
어차피 넌 사랑 받지 못해.
본능으로 알고 있잖아?끝까지 사랑 받지 못하고, 끝까지 외면당하다가 버림받을 거야.
왜냐하면 그에겐 이미 임자가 있거든.
그는 이백 오십 년 전 자신을 거절했다.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자신의 곁에 있는 여자를 지키는 것에 우선했다.
그의 그런 태도가 안 좋게 보일 리는 없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것을 거부한 그에게 이런 희생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래선 안 돼.’
무의식이 계속 소리친다. 모두 무용지물이고, 소용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선 안 돼.’
이젠 포기해도 돼. 포기할 때가 됐어. 놓을 때가 됐잖아.
‘그래도 안 돼….’
사랑 받지 못해. 너도 잘 알잖아! 그는 네가 돌아간들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해주지 않을 거야! 절대 사랑받지 못해!
‘나도… 알아….’
미련한 것…. 무엇이 너를 이토록 간절히 만드는 것이지?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어.
사랑이란 장식물도 시간엔 결국 부질없기 마련이야.
그리고 나는 오랜 시간을 그를 잊고 살아왔다.
얼굴도 까마득히 잊어버린 그를 위해 왜 이렇게 헌신을 하고 있단 말인가?
버려, 버리라고.
‘안… 돼…!’
그럼 어째서 버리지 않는 거지?무엇이 너를 이토록 참고 있게 만드는 거지?
아무것도 못 된다는 걸 알면서도 왜 계속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거지?
‘나는….’
나는.
‘사랑받고… 싶어….’
그렇다.
사실 아직도 그에게 사랑받고 싶다.
미칠 듯이 사랑을 받고 싶다.
그래서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자꾸만 거슬러 보기도 했다.
그러나 거슬러 본들 바뀌는 게 없는 잔혹한 현실에, 나는 희생을 택했다.
내가 희생을 해서라도, 그를 살리자고, 마음을 먹었다.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사실 난 알고 있어.
‘사랑받고 싶어요.’
난 알고 있다.
‘당신에게….’
나에겐 희생이 아닌….
사랑이 필요했다는 것을….
- 그래
- 이제 그만해도 돼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이해하니까….
그것은 너무나도 따뜻한 목소리였다.
나의 차가워진 마음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 그만해도 돼….
…….
그렇게 나는 눈을 떴다.
아직 감당해야 할 시간이 무수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안 된다는 무의식의 붙잡음을 누군가가 강제로 때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현실로 눈을 뜨게 되었다.
햇볕이 비추고 있었다.
추운 겨울의 추운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이백 오십년의 삶을 살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이미 옛 기억이 되어버린 나의 집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오래 견디기도 했지.”
“…….”
그리고 그 집의 침대 위에는 내가 누워 있었다.
더불어 어떤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나의 뒷머리에 댄 그의 손엔 가벼운 떨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쯤해도 됐잖아. 왜 이렇게 무리를 하냐.”
“…….”
“뭐, 나를 살린다고 그렇게 애를 썼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의 눈빛은 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내려고 노력했다.
누구일까 그가.
분위기는 익숙했지만,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빠….”
하지만 나는 얼마지 않아 꿈속의 나를 잃어버렸다.
동시에 어제 보았던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는… 그 남자.
“그래 인석아….”
“…….”
“네 오빠다….”
서민국….
* *
강서라의 이상한 행동들에서 민국은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전의 기억들이 얽히고 얽혀, 자신에게 어떤 ‘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게 되었다.
그것을 직감하는 순간 민국은 곧장 흑설 공주와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자신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이제 편해질 거야.”
흑설 공주와 함께 서라의 집에 온 민국은 그녀에게 상냥한 웃음을 보이면서 달래고 있었다.
더 이상의 지옥은 그녀에게 없을 것이라고, 민국은 말하고 있었다.
“오….”
강서라는 입을 열어서 그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꿈속의 기억들이 모조리 잊혀 진다 한들, 그 후유증이 현실에 없을 리 전무했으니까.
“…….”
민국은 말없이 초췌해진 서라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이따금씩 이마를 가리는 머리카락까지 반듯하게 정리해주는 모습이었다.
“흑설 공주 씨.”
“…….”
또각 또각. 서라의 방안으로 흑설 공주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민국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에 대한 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제가 얘기했던 것처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느냐.”
“하지만 그전에, 서라의 꿈속에 관련된 기억들은 모조리 잊게 만들고 싶군요.”
흑설 공주는 담담히 말했다.
“이득을 위해선 대가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제가 대신 꿈을 겪기로 하지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서라의 눈동자는 급격히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말리기도 전에, 민국은 말하고 있었다.
“300년의 꿈. 지금의 3초로 다 겪겠습니다.”
“너무 과한 것은 현실에도 부작용을 남기기 마련이란다.”
“상관없습니다. 빨리 해주시죠.”
민국은 단호했다. 서라가 느꼈던 300년을 현재의 무의식속에서 전부 느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얻는 보답은… 서라가 지금까지 느껴온 300년을 모조리 잊어버리는 것.
“안… 돼….”
“…….”
“안 돼…요…. 오….”
서라는 고개를 저으면서 힘겹게 민국을 불렀다. 동시에 그의 옷깃을 꾸욱 잡고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다. 아무도 없는 그 괴로운 공간에서 홀로 300년을 있는 다는 건, 자신이란 것을 망가뜨리는 일이다. 그래서 서라는 반대했다. 하지만….
“금방 끝날 거야.”
“…….”
“대신 감당해줘서 고마워. 서라야.”
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서라에게 고마움을 표명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뒤에 있던 흑설 공주는 엄지와 검지를 맞닿으면서 ‘딱’하고 소리를 냈다. 그것이 신호였다.
“…….”
순간적으로 서라는 민국의 죽어버리는 초점을 보게 되었다. 자신을 쳐다보지만, 약 3초 동안 죽어버리는 그 눈동자였다. 서라는 불안했다. 자신에게만 체감적으로 다가오는 3초가, 과연 그에겐 얼마나 긴 시간으로 느껴질까….
“음….”
“…….”
그리고 얼마지 않아 초점이 돌아온 그였다. 불과 3초였지만 그에겐 300년 동안 무의식의 어둠 속 사면을 경험했을 것이었다. 일말의 쉬는 시간도 없이… 무려 장시간 동안….
“…….”
“…….”
이윽고 자신이 안고 있는 서라에게로 시선이 내려가는 민국. 그 민국의 시선에 과연 어떤 변화가 있을까 서라는 두려웠다. 혹시나 자신을 잊진 않았을까, 혹시나 자신에 대한 인상이 바뀌진 않았을까, …그 모든 게 두려웠다.
“…….”
하지만 그건 서라의 착각이었다.
“고마워 서라야.”
“…….”
“넌… 이렇게 힘든 시간을 혼자 보내왔구나.”
민국은 다시 서라의 볼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 만지는 손길에는 한 치의 증오도, 미움도 섞여 있지 않았다. 서라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전보다 더 애절하고 기특함이 담겨 있었다.
“아….”
“…….”
“아아….”
서라는 그제야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왜 그를 좋아했는지.
“이제 다 잊을 수 있을 거야.”
“…….”
“대신 감당해줘서 고마워. 서라야.”
자신이 왜 그를 사랑했는지.
“이제… 다 잊으면 돼….”
“…….”
“편안히… 편안하게….”
사랑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
서라는 서서히 잠에 들려 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치 않는 수면이었다.
그러나 이번 수면을 통해서 서라는 모든 것을 잊고 말 것이었다.
300년의 기억도, 그에게 있던 사고도, 모조리 잊고 말겠지.
서라는 거부하고 싶었다.
그 혼자 이런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걸 서라는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말을 전하고 싶었다.
“사랑….”
“…….”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사랑해요….”
“…….”
그래서….
“사랑해요 오빠…!”
옷깃을 부여잡고 울먹이면서 소리치는 서라였다.
눈앞에서 서라의 그런 고백을 받게 된 민국은 가만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서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잠드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울먹였다.
그런 울먹임이 귀여워보였을까.
300년의 시간을 겪고 온 민국은 여전히 달라진 것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녀석….”
“…….”
“나도 오랜 시간을 겪고 와서인지…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지만….”
민국은 말을 이었다. 어느 때보다 상냥한 목소리였다.
“나도 그 시간 동안… 느낀 게 있다면….”
“…….”
말없이 서라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민국이었다.
곧 또 다른 미소와 함께, 민국은 말을 이었다.
“은별이에게… 들키면 혼나겠구만….”
“…….”
민국은 서라의 뒷머리를 잡은 손을 자신에게로 천천히 당기기 시작했다.
잠에 빠져 들기 시작하는 서라도 그 순간 의식적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민국도 자신의 300년의 괴로움이 만들어준 이 감정을, 이 순간 서라에게 확인시켜 주려고 했다.
“…….”
그렇게 두 사람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서라야.”
“…….”
짧은 입맞춤 뒤, 민국은 말했다.
“이제 편해질 거야. 걱정하지 마.”
“…….”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서라를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으며.
“더 이상, 괴롭지 않을 거야.”
“…….”
원치 않게 눈을 감는 그녀를 보며….
“편안히… 편안하게….”
맺혀 있던 눈물이 볼자기를 타고 흘러 내렸지만, 서라는 숨기지 않고 마냥 민국을 쳐다보았다.
서서히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몇 번이고 들어보려고 노력하면서, 필사적으로….
“사랑해 서라야.”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잠에 든 그녀를 보던 민국은 창가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메리크리스마스.”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 작품 후기 ============================
다음 화, 시즌 3 에필로그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