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275화 (275/369)

275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내가 꿈이란 걸 자각하고 있음에도 그건 하나의 또 다른 현실이었다.

나는 백년을 체험했고, 백년의 시간은 외로웠다.

하루가 지났을 때는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에 어쩔 줄 몰라했고, 한 주가 지났을 때는 나를 사로잡은 고독함에 눈물을 글썽였다.

한 달이 흘러 마침내 나는 나태함에 빠져들어 의식을 스스로 멈추려 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시간은 경과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느린 속도로 흘러갔다.

잠을 자고 있음에도 잠을 잘 수 없음이 이토록 괴로운 건 처음 알았다.

내 곁에 누군가가 없다는 게 이토록 씁쓸한 건지 처음 알았다.

어둠만이 가득한 이 사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새로운 깨달음과 나를 괴롭히는 외로움이 무수히 반복된다.

허나 그것도 무한하지는 못하다.

언젠가 결국 인간은 질리기 마련이었고 나는 질려 버렸다.

처음 일 년이 흘렀을 때 든 생각은 아직 남은 시간이 99년이라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래도 더 참아보자는 욕심을 냈다는 것.

2년이 흘렀을 때 든 생각은 서서히 정적. 침묵.

의식의 끊김을 느끼기 시작한다.

10년… 20년… 30년….

흐르는 시간 속에서 감정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고, 나라는 존재도 서서히 무의미해지기 시작한다.

50년이 흘렀을 때 생각한다.

나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서라야.'

오로지 떠오르는 건 한 남자의 달가웠던 목소리.

그리고 그 남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숭고한 희생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어느 공주의 협박 아닌 협박.

나는 누구일까. 그녀는 생각했다.

계속해서, 흐르는 이 시간 속에서, 과연 자신은 이 지루한 시간을 얼마 동안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60년이 흘렀다.

이쯤이면 됐잖아? 이젠 포기해도 되지 않을까? 너무나도 괴롭다. 모든 게 꽉 막히고 아프단 생각이 든다. 정신적인 고통이 결국엔 내 육체를 압박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의 이 어둠 속 나의 육체는 평안하다.

젊음도 사라지지 않고 죽지도 않는다.

늙지도 않고 정신은 계속해서 온전하다.

하지만 그 온전함은 결코 예전의 그녀가 알던 온전함이 아니었다.

70년… 80년이 흘러 그녀는 자신의 이름까지 완전히 까먹어버렸다.

그리고 이전의 추억들이 완전히 잊혀지기 시작했다.

서민…. 흑…설….

하나 하나 떠올리려고 애를 써보지만 이미 그녀에겐 너무 옛 추억의 일일 뿐이다.

이제 그만 숨을 죽이고 이승에서 눈을 감으며 '그런 일이 있었지….'하고 추억의 조각으로 웃음 짓고 보내도 될 보잘 것 없는 기억들….

그 남자도 어디까지나 짝사랑이자 첫사랑이었을 뿐, 이젠 마지막이란 생각과 함께 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만이 든다.

그래도 웃긴 건, 포기하지 않는 누군가.

왜 포기하지 않을까. 몇 번이고 고뇌본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고뇌하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이 세계에서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는다.

그리고 고뇌를 한들 결국 이 백 년이란 시간을 즐기는데 좋은 취미가 되지 못함을 자각한다.

흔들림조차 사라진다. 그냥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이 생각도, 그리고 강서라라는 존재도, 모든 것이….

그렇게 백 년이 흘렀다.

"아앗… 행님이시네요?"

서라는 기억하지 못했다. 꿈속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꿈속에서 깨어나는 즉시 현실로 돌아와, 꿈속에서 있던 일은 모두 잊어버릴 것이라고 흑설 공주가 말했었으니까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꿈으로 인한 영향이 현실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서라는 순간적으로 민국과의 이 통화가 굉장히 오랜만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생각을 거듭하고 또 거듭해보니… 불과 하루만에 연락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현실의 체감이 서서히… 조금씩 돌아오는 걸 느끼면서 서라는 민국과 대화를 하였다. 민국은 말을 꺼냈다.

"어제 많이 피곤했냐? 목소리가 많이 죽어 있는 거 같네."

"에… 흠흠! 아닙니다여! 지는 형님의 가랑이 사이처럼 쌩쌩합니다여!"

말을 하면서도 왠지 부질 없단 생각이 든다. 왜일까. 꿈속의 기억들은 모조리 잊어버렸는데, 이따금씩 희미하게 기억나는 그 사면의 어둠 속이 자꾸만 서라를 이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서라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국은 마냥 미소를 짓고 통화했다.

"일단 오늘은 스카이 라이프를 통해서 은별이랑 너랑 나랑, 크리스마스 단합 방송 마지막 테스트를 할 거다. 어제도 얘기 했었으니 기억은 하고 있겠지?"

어제. 그 어제가 그 어제다. 어제라는 단어가 자꾸만 서라의 머릿속을 혼란시켰다. 하지만 서라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여! '어제'했던 얘기를 설마 까먹을 리가 있겠음여?"

"그래 그래. 그럼 어디 보자… 잠시 기다려봐라."

은별이도 슬슬 스카이 라이프에 들어오게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렇다. 앞으로 이틀 후면 크리스마스였다. 모두가 함께 보낼 크리스마스…. 서라에겐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다. 가족과 함께 옹기종기 사이좋게 보내기로 한 그 크리스마스를 까먹을 리 없다.

'왜… 이러는….'

서라는 순간적으로 자문했다. 자신의 이런 행동들이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흑설 공주가 말했던, 자신에게 준 그 퀘스트에 대한 건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민국이 죽었던 것도…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테스트를 했다는 사실도 알고는 있다. 하지만 테스트에 대한 기억은 오로지 어둠 속의 사면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아….'

서라는 스스로도 자신의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은별아! 너의 가슴은 너무나도 빈약하고 답이 없지만 아름다워! 그리고 나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널 사랑하고 있다!"

"미친 놈아! 좀 작작해! 창피해 죽겠으니깐!"

버럭버럭 소리치면서 노는 두 사람을 서라는 가만히 지켜본다. 스카이 라이프로 들려오는 두 사람의 사랑 어린 소리는 서라의 감정을 뭔가 일렁이게 만든다. 무엇일까. 이건 질투일까? 시샘일까? 아니, 그보다 더한 감정일 지도 혹은 그보다 더 약한 감정일 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까지 당신을 구하려고 하는데]

[당신은 왜 날 보지 않는 건가요?]

마음도 알고 있으면서, 이미 다 얘기했으면서, 은별이랑 사랑을 나누는 그 작태는 어디서 나온 시츄웨이션인가? 서라는 도무지 주체하지 못하는 자기 마음에 신호흡을 했다.

"창피하다니! 너의 가슴이 창피한 거야? 내가 만졌던 너의 가슴은 아름다웠어! 그런데 그게 창피한 거야?!"

"그만……."

"네 다음 조루! 나도 너 좋아하니까 말해줄게! 넌 조루지만 창피한 게 아니야! 너의 조루는 아름다웠어!"

"이, 이럴 수가…."

"그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서라가 무의식적으로 그만 키보드를 손으로 세게 치면서 해드셋을 벗어 던졌다. 저도 모를 분노가 돌연 터졌음에 서라는 '아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급작스런 소리를 듣게 된 민국과 은별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민국과 은별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물었다.

"서, 서라야?"

"야, 강서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걱정하는 은별 언니의 목소리…. 그리고 걱정하는 민국 오빠의 목소리…. 하지만 모든 게 거짓이다. 모든 게 다 거짓이란 말이다!

"아아…!"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비명을 지르던 서라였다. 그녀의 급급한 비명 소리에 돌연 깜짝 놀란 민국과 은별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은별아. 나 잠깐 서라 집에 방문해봐야겠다."

"…나도 갈게. 서라야! 갑자기 왜 그래?!"

평소 서라를 귀중하게 여기던 은별로서도 서라의 그런 급작스런 이상 현상은 괴로울 따름이었다.

"……."

이윽고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오자 서라는 이불에서 비명을 지르던 걸 멈췄다. 이래선 안 된다. 이건 자신이 아니다. 몇 번이고 마음 속에 설득을 거듭하고 거듭해서야….

"…바퀴벌레가 입 속에 날아왔었어여!"

거짓말을 치는 서라였다. 그녀의 느닷없는 소리에 막 나갈 준비를 하던 두 사람은 '앵?'하면서 의아해했다. 서라는 '헤헤'하고 어색하게 미소 지으면서 해드셋을 다시 착용하고 대화를 시작했다.

"리얼 엄청 큰 바퀴벌레가 내 허벅지로 들어왔음! 깜짝 놀라서 그만이라 외치다가 입속으로 날아와서 비명 지른 거임여!"

"헐… 너 그럼 그 바퀴벌레 먹은 거냐?"

"아니여! 비명 질러서 초음파로 날려버렸음! 초음파 브레쉬!"

"서라야… 정말 괜찮은 거니?"

애써 아무것도 아닌 척 말하는 서라를 향해 촉이 좋은 은별이 걱정 어린 목소리를 던져왔다. 하지만 서라는 은별의 촉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더욱 눈치 채지 못하도록….

"괜찮아여 은별 언니찡!"

더 숨기려고 노력했다. 화를 내선 안 된다. 이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건 서민국의 잘못이 아니다. 모두… 모두 내가 선택한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그녀는 시련을 감당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크리스마스 1일 전

또다시 잠에 들었다.

그곳은 꿈속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 꿈속엔 오로지 어둠 속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전의 모든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꿈을 꾸게 되면 그 전날에 꾸었던 백 년의 꿈까지 다시 기억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 괴로웠다.

그래서 괴로움이란 게 무엇인지 망각하기 위해 나는 나를 포기했다.

시간이 지나게 되니까 내가 나를 포기하게 되는 것은 굉장히 쉬웠다.

그저 의식을 놓고 나를 물건처럼, 아무런 감정도 없는 허수아비처럼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글자들, 단어들도 하나하나씩 전부 잊고, 지금 내가 말하는 이 독백조차도 무엇인지, 이게 독백인지 글자인지, 대화인지도 모두 잊어버리고….

…….

강서라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두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 모으고 앉은 채로 하늘 아닌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죽어 있다.

그녀는 이미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인형과도 같다.

하지만 강서라는 이미 인형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망각했다.

이따금씩 머릿속에 맴도는 한 남자의 얼굴은 또다시 그녀에게 감정을 준다.

그리고 그 감정은 다시 사람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되찾게 만들려고 한다.

그 순간은 너무나도 괴로워 강서라는 다시 소리를 지른다.

그만하라고, 그만해달라고,

더 이상 이런 일은 원치 않는다고.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는다.

왜? 무엇을 위해서?

이미 백 오십년 전에 죽은 사람을 위해서 왜?

그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과 잘 지냈는데?

그것에 관여해서 무슨 소용이지?

짝사랑했던 자신은 그토록 차갑게 내팽개쳐버렸는데!

어째서 감당해야 하는가!

…죽이고 싶다.

자신을 이토록 만든 그 남자를 죽이고 싶다.

사랑이란 감정은 이미 없다.

증오와 미움만이 싹트고 있다.

어떻게든 죽이고 싶다.

가능하다면 칼을 들어서 눈물을 흘릴 때까지 찌르고 싶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걸 보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걸 보고 싶다!

내가 이토록 괴로워하는 것도 모르는채…

내가 이토록 씁쓸해 하는 것도 모르는 채….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도 모르는 채….

웃고 있는 그가 역겹고 싫다.

증오스러워, 죽이고 싶어.

'안….'

하지만,

'안 돼….'

그녀는 오늘도 고개를 젓는다.

그것은 안 된다고.

그래선 안 된다고.

가슴까지 무릎을 끌어 모으고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올바르고 틀리고를 따지는 게 아니다.

죽이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를 향한 알 수 없는,

이유를 이젠 알 수도 없는 형체 없는 감정이 반대하고 있다.

'안 돼….'

…….

'그럴 순 없어….'

서라는 의식을 죽이기 위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숙여 얼굴을 파묻는다.

그렇게 이틀이 경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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