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아이고 추워라."
"……."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으니 구스하게 춥구만. 안 그러냐 서라야."
운행이 중지된 지하철의 역 앞에서 민국은 몸을 만지면서 서라에게 물었다. 옆을 돌아보면서 물었던 민국은 서라의 멍한 표정을 보게 되었다. 이윽고 민국이 의아함에 가득찬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서라야?"
"아? …이얍!"
서라는 뒤늦게 그 목소리를 자각하고는 어이없는 시츄웨이션을 선보였다. 민국은 돌연 뒤바뀐 서라의 언동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너 아까부터 갑자기 왜 그러냐? 소중한 곳에 이상한 거라도 박고 있는 사람처럼."
"으아닛… 시, 실은 온니찡이 자각을 못할 뿐 나님의 소중한 곳에 그런 걸 넣은 사람은…!"
가랑이 쪽을 부비부비거리면서 소리치던 서라였다. 하지만 민국은 그런 서라가 귀여우면서도 한 편으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뭔 일 있으면 말해."
"……."
서라가 그 말에는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민국은 정면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 지하철이 온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역 지하철이 오고 있습니다.
"휘유, 그럼 난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배웅해줘서 고맙다 서라야."
민국은 서라를 돌아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서라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민국에게 치아를 드러내는 미소와 함께 과하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서 주무세여!"
"그래 인마. 너도 가서 쉬고."
그리고 지하철이 도착했을 때 열린 승강기 문으로 민국은 들어갔다. 들어간 뒤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서라도 힘을 내서 손을 흔든 다음, 얼마지 않아 지하철이 출발했을 때….
"……."
손을 내리고 민국이 타고 있는 지하철이 무사히 갈 길을 향하는지 지켜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흑설 공주가 말했듯이 지하철을 타면 위기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갑작스런 죽음은 또다시 일어날 일이 없겠지.
"이제 시작하면 되겠구나."
그때 아무것도 없던 옆에 돌연 흑설 공주가 등장했다. 마치 시공의 균열을 뚫고 등장한 것처럼 말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오로지 서라만이 흑설 공주를 돌아보았다. 흑설은 약간은 불안에 떨리는 듯한 그 눈빛을 마주하면서 물었다.
"정말로 괜찮겠느냐?"
"……."
"너에게 물어보는 마지막 기회란다."
기회. 서라가 과연 민국을 위해 이런 수모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위기를 혼자서 무찌를 수 있을까. 흑설 공주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불가능했다. 만일 그 제안을 거절했다간 다시 아까 전의 그 사건이 있던 때로 돌아가버릴 것이었다.
그것은 상상만 해도 심히 끔찍해서… 서라는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아픔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구나."
"……."
"따라오거라."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개찰구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라는 흑설의 뒤를 얌전히 쫓았다.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하얀 눈밭이 내리는 골목길에 당도한 두 사람. 흑설과 서라는 서로 걸음을 이어갔고, 얼마지 않아 입을 연 건 귀족스러운 옷의 흑설이었다.
"너에게 있을 시련은 시간이란다."
"……."
"얼마나 그 시간을 홀로 감당하고 견디느냐를 테스트해보고 싶구나."
흑설이 하는 말을 서라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부분에서 흑설이 무엇을 시련으로 고할 지 직감이 오긴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백년도, 천년도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
"……."
"실제 그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 지도 모르고 말이란다. 내가 너에게 줄 시련은 그런 것이란다. 이해가 되느냐?"
서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흑설 공주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실제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고된 시간인지 과연 이 아이가 알기나 할까? 말로 듣는 것과 경험을 하는 것엔 엄연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경험할 일은 없단다. 현실과 비슷한 시간을 느끼겠지만, 너는 꿈속에서 그 시련을 겪게 될 거란다."
몸을 돌린 흑설 공주는 어느 덧 서라에게 다가와 볼을 만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를 마주한 상태. 펑펑 쏟아지는 하얀 눈과 골목길의 눈밭은 어찌 보면 지금의 두 사람에게 꽤나 이펙트를 주는 것 같았다.
"불쌍하기도 하지."
"……."
"하지만, 너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나의 매정함을 이해해주기 바라는구나."
그리고 흑설 공주는 그녀에게서 손을 때었다. 이윽고 서라를 비껴 지나가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흑설 공주였다. 서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미 발자취가 멀어지고 있어야 할 흑설 공주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
서라는 말없이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뚜루루루루루, 뚜루루루루루, 집에 온 뒤였다.
"흠, 여보세요."
"온니찡! 잘 들어가셨슴까?"
민국에게 전화를 건 서라였다. 민국도 '오올'하고 리액션을 보이면서 말했다.
"오냐, 잘 들어갔지. 근데 네가 웬일로 내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다하냐. 이 자식… 나에게 감정을 표출한 뒤로 더 적극적인 사람이 되었군."
"어맛! 지는 원래부터 적극적인 사람이었음여! 온니찡이야 말로 나님이 전화했다고 너무 좋아하시네여! 좋아하는 그 모습을 보니 자꾸만 제 입꼬리가 방긋방긋! 아잉 어떡행~."
서라의 귀여운 애교에 녹아 내려가듯 웃음 짓던 민국이 말했다.
"아무튼 무사히 도착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나 집에 잘 들어가라."
"집에 이미 들어왔음여!"
"들어갔냐? 야, 그러면 일단 정수기에 가서 물 한 잔 따라봐. 목 말라서 너 물 마시는 소리라도 듣게."
"이상한 취미를 가지신 분이네여. 알았음여."
정수기로 총총 걸어가서 물을 한 잔 마시는 서라였다. 그녀의 물 마시는 소리를 휴대폰으로 듣던 민국이 중얼거렸다.
"너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물이 조금 부럽기도 하는구나."
"소변으로 나오는데여?"
"이런, 꿈과 환상을 깨부수는 로리 아이 같으니."
그렇게 허허실실 웃음 짓는 대화가 꽃피우던 끝에.
"그럼 이제 슬슬 자라. 오늘 많이 피곤했을 테니까."
"……."
"? 서라야?"
"아! 이응! 그래야지여. 잘게여! 행님도 잘자여!"
이따금씩 이상한 듯한 서라의 모습에 의문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별 일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민국은 '그래'하고 휴대폰을 끊었다. 그렇게 이 집 안에 홀로 남게 된 서라였다.
"……."
늘 혼자였지만, 오늘의 혼자는 왠지 너무나도 두려웠다. 특히 잠에 빠지게 되면 흑설 공주가 말했던 그 비극이 시작될 터였다.
서라는 한 편으로는 무서웠다. 민국을 어떻게든 꼭 구하고 싶었지만, 한 편으론 자신에게 닥칠 시련 때문에 그를 포기하게 될까 두려웠다.
자신의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재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악한 면이 나와버릴까… 무서웠던 것이었다.
'너는 지금부터 꿈을 꾸게 될 거란다.'
'…….'
'그리고 그 꿈은 현실에서 고작 여덟 시간이지만, 꿈속에서 너는 현실과 같은 시간으로 약 '백 년'의 시간을 지내게 될 거란다.'
'…….'
'아무것도 없고, 공허하고, 어둠 속이고, 오로지 네가 서민국과 만났던 추억과 기억만을 간직한 채 그곳에서 버티는 것이란다.'
'…….'
'포기는 언제든지 할 수 있고, 그럼 너는 언제든지 그 꿈속에서 나올 수 있을 거란다. 다만.'
서민국은 다시 없던 게 되어버린다. 그때 그 사고의 현장으로 돌아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현실로 돌아오고 나면 그 꿈은 고작 여덟 시간 짜리로… 너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던 기억이 되어버리는 것이지. 꿈에 대한 기억도 굉장히 희미할 거란다. 하지만 꿈속으로 다시 진입하면 너는 그 어떤 것보다 선명하게 이 날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될 거란다. 오로지 이 기억만을 안고,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백 년을 너는 감당할 수 있겠느냐?'
흑설 공주가 했던 그 제안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서라는 눈을 감는 게 두려웠다. 할 수 있을까, 자신이 과연 이런 테스트를 감당할 수 있을까. 조금은 봐달라고 애교를 부려보고도 싶었지만, 애초에 흑설 공주가 그런 물러나주는 여자가 아니라는 걸 서라도 보면 알 수 있었다. 고로….
'해볼게여….'
서라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반드시 오빠를 지키겠어여….'
그렇게 서라는 꿈속의 나라로 빠지게 되었다.
기간은 약 3일.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약 3일 동안 세 번의 꿈을 꾸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그곳에서 서라는 홀로 백 년을 있어야 한다.
의식과 몸만 있고, 그 무엇도 없는 텅빈 진공의 세계에서. 하지만 꿈속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은 다 허상. 여덟 시간 동안 잠을 잔 것처럼 체감을 느낄 것이었다. 또한 꿈속에서의 일도 모두 망각해버리고, 일상의 자신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일상에서의 '무의식적인 반응'은 어쩔 수 없을 것이었다.
"……."
그렇게 그녀는 잠에 들게 되었다. 버틴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 늦지 않은 시간에 잠에 빠져들게 되었다.
동시에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던, 사랑하는 사람의 실루엣이 카메라의 필름처럼 촤르륵 안구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운 그의 모습. 그런 그를 만날 뒤에서 지켜보며 짝사랑하던 초라한 자신. 드디어 오늘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고 매듭을 짓게 되었다.
'…….'
그리고 이것이 오늘 그를 위한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서라는 생각했다. 그렇게 올곧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
그렇게 시작했을 터였다. 서라는 꿈속에 진입했을 때 텅비어 있는 공간을 보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우주, 자신이 알던 그 지구도 없다. 그저 어둠, 모든 것이 어둠. 사면 전부가 어둠으로 휩싸여 있었고 감성을 느낄 수 있는 하얀 빛덩어리는 한 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라는 투명한 그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고, 나신 상태로 그저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윽고 의식을 차린 서라가 천천히 텅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그곳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차가운 느낌도 따뜻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기서 굶어 죽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로지 맴도는 것은 서민국을 사랑했던 자신의 기억. 그리고 포기할 거면 언제든지 포기하라는 흑설 공주의 기억. 서라는 그 기억만을 간직한 채 이 꿈속에서 약 백 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현실에 돌아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만, 적어도 꿈속에서만큼은….
'…….'
몸이 떨려왔다. 양손으로 그런 자신의 몸을 꾸욱 붙잡으면서 참아내려고 노력한다. 백 년을 기다려도… 천 년을 기다려도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하는 사람의 부활을….
'…….'
서라는 꿈꾸고 있었다.
* *다음 날이었다. 크리스마스까지 2일. 합동 방송도 내일 있으니 만큼 민국은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로 스카이 라이프에 접속하자마자 현재 접속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호오, 강서라 들어와있네.'
민국은 혹시 이 놈이 방송을 하고 있나 파뿌리TV에서 검색해본 다음에, 방송을 안하고 있자 곧장 스카이 라이프를 눌러 통화를 걸었다. 뚜루루루루.
"흐음."
뚜루루루루. 왠지 오늘따라 연락이 가는 신호가 길다.
'평소라면 바로 받을 텐데. 이상하구만.'
이윽고 1분 동안 연락이 가던 끝에 서라가 연락을 받았다.
"여보세요."
"지금 날 여보라고 했냐? 지리네. 언제부터 너와 나는 부부 사이가 됐다냐."
"아앗… 행님이시네요?"
서라의 목소리에는 왠지 힘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