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당신을 기다립니다. (세 번째 메인 파트)>
저벅 저벅.
“…….”
“…….”
뽀드득 뽀드득. 눈밭을 밟으면서 한창을 걸어온 민국이었다. 이윽고 집 앞에 도착한 민국과 서라. 현관문을 열려는 민국의 손짓에 서라가 폴짝하고 그의 등에서 내렸다.
“어? 야!”
“헤헤. 괜찮음. 여기부턴 눈도 없잖음.”
현관 앞이었고 이제 양말만 벗고 씻으면 될 터였다. 해맑게 웃는 서라의 모습에 민국은 말없이 쳐다보다가 곧 피식 미소 지었다.
“그래. 감기 걸리랴 얼른 화장실 가서 씻어.”
“이응이응.”
서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민국을 비껴 지나가 폴짝 거실로 점프했다. 그리고 축축해진 양말을 벗고 곧장 화장실로 총총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그 귀여운 모습을 마냥 미소 짓고 보던 민국은, 그녀가 화장실을 들어가자 곧 천천히 미소를 지우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예나 건으로 인해 사실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사태였다. 아무리 피하려고 노력해도 사람 마음이란 건 피하기 어려운 법이다. 결국엔 한 번쯤은 부딪혀야 하는 법. 그리고 민국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실정이었다.
“후우.”
일단 신발부터 벗고 거실로 들어온 민국이었다. 자신도 여간 뛰느라 양말이 축축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서라가 화장실에서 나오면 자신도 화장실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끼이익.
“잉?”
“아, 나도 잠시 화장실 좀 쓰게.”
“…아. 이응이응이여.”
화장실에서 나오자 앞에 있는 민국을 보고 순간 의아해하던 서라였다. 둘 사이에 문득 나타난 어색함에 서로가 서로에게 어쩔 줄 몰라할 때 민국이 정신을 차리고 운을 띄었다. 서라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화장실에서 비켰다. 민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뜨거운 물로 자기 발을 씻기 시작했다.
“…….”
그렇게 뜨거워진 발을 다 씻고 난 뒤였다. 민국은 샤워기를 다시 걸쳐놓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끼이익….
“어딨냐 너?”
“나님 방이여.”
그러자 서라는 거실에 온데간데없고 자기 방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민국은 수건으로 발을 대충 닦은 다음에 서라의 방으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순도순 대화를 떨던 그곳. 그러나 이미 분위기가 이전과는 남달라져 있었다. 이윽고 민국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서라가 보였다.
“…….”
“…….”
서라는 두 다리를 꼬고, 한 쪽 발로 다른 쪽 발등을 은근슬쩍 만지고 있었다. 추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까 전 눈밭을 맨발로 밟아서 동상이라도 걸리려는 건지. 민국은 괜히 할 말이 없어서 그녀의 발을 주제로 이야기했다.
“발은 괜찮냐? 상태 보니까 여간 좋지 못한 모양인데.”
“그리 심한 건 아닌 거 같음여. 따뜻한 물로 바로 정리해서 그런지.”
“그렇군.”
민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지만 사실상 아직 서로가 서로에게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아마 이야기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일 것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찾아온 침묵…. 보통 민국과 서라 간에 침묵이라는 건 실로 어색한 것이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유독 공통점이 많았고, 조용해질 기미도 없이 항상 시끌시끌거리기 일쑤였으니까.
“…으랏차차.”
“…….”
괜히 어색함을 없애고 싶은 마음에 민국이 서라의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그렇게 어색함을 없애는 것도 수 초 정도뿐이다. 곧 다시 침묵이 몰려왔다.
“…….”
“…….”
서라는 괜히 애꿎은 발등만 다른 발로 매만졌다. 그런 서라의 발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민국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오빠라고… 먼저 이 어색함을 해결할 문제를 강구해야 한다 생각했는지 운을 띄우는 민국이었다.
“어, 그, 저기 말이다.”
“…….”
“나도, 어, 흐음….”
애꿎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말을 털어놓는다.
“널 여자로 본 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만….”
“…….”
자연스레 서라의 고개가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민국은 서라의 시선을 피하면서 괜히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이건 좀 아닌 거 같아서 말이지….”
“…….”
“그래서, 좀 좋은 사람 소개시켜주려고 했던 거지. 그게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
민국의 사과에 괜시리 마음이 착잡해지는 서라였다. 본래 착잡해질 이유도 없을 터인데… 민국이 사과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중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아님여….”
“…….”
“나님이야 말로, 화내서 쏘리해여….”
화를 낼 이유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말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서라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서라는 자연스레 어깨를 흠칫하면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초점이 서로를 겨누었다. 서라는 저도 모르게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민국도 본래는 이런 의도로 마주한 게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라라라라?’
그 이상한 기분에 그만 민국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이성적으론 이래선 안 된다는 걸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일순간의 감정 충동이라고 할까…. 민국은 그 충동을 그만 참지 못하고 서라를 안게 되었다. 당연히 와락 안겨 버리게 된 서라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서라는 자신을 껴안은 민국을 눈으로 훑다가 천천히 입을 열려고 했다.
“오, 온니….”
“…….”
“꺄앙!”
이윽고 침대에 드러누워지는 서라였다. 민국은 그대로 서라를 안고 있다가 침대에 두 손을 대고 내려다보았다. 민국과 서라의 눈동자가 서로를 교류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서라의 눈은 여느 때보다 강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서히 홍조로 붉어지는 그녀의 양볼. 민국은 순간 자문했다.
‘왜 이러는 거지?’
사실 이유야 알 수밖에 없다. 서라는 정말 예쁜 미인이다.
심지어 어리고, 태생도 밝고 배려가 많아서 어느 남자들이든 원할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민국은 그런 서라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사실상 본능적인 남자의 욕구로 가늠할 때 놓치고 싶을 리 없었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맘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
“…….”
그리고 현재의 이 어색한 분위기가 민국의 감정 충동에 일조한 것도 있었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그저 서로를 겨눈다.
얼마지 않아 민국의 고개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그의 얼굴에 서라는 순간 흠칫했지만… 얼마지 않아 그의 빨려 들어갈 듯한 눈동자를 보면서 서서히 눈이 가늘어지게 되었다.
매료되는 듯한 느낌에 홍조가 일은 얼굴로 서서히 서라도 집중하는 느낌….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입맞춤을 하려는 둘이었다.
‘집안엔 아무도 없다.’
‘방해할 사람도 없다.’
은별도, 예나도 없었고, 서라의 부모님도 늦게 집에 돌아올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단 둘이 있는 남녀가 무슨 짓을 하던 아무도 모를 것이다. 설사 이게 질 나쁜 짓이라 해도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한 순간 쾌락에 의존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민국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휴우.”
그러나 생각만 했다. 민국은 무사히 자신의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입맞춤을 할 수 있던 거리에서 민국은 고개를 조금만 비틀어 침대에 입술을 맞췄다. 서라를 그대로 덮친 듯한 자세로 이불에 입을 맞추는 민국. 그런 민국의 행동에 천장을 말없이 바라보던 서라였다.
흔들리던 그녀의 초점이 서서히 돌아오는가 싶더니.
“…히히.”
치아를 드러내며 가볍고 씁쓸한 미소를 보이는 서라였다. 왠지 모르게 천장의 전등 빛이 약한 느낌이다.
“위험했어.”
“위험했네여.”
“진짜 위험했다.”
“진짜 위험했어여.”
침대에 입술을 맞추던 민국이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 서라를 마주하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민국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서라. 민국이 천천히 운을 띄었다.
“만일 여기서 내가 그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면 난 지상 최고의 개새끼가 되었겠지.”
“지금도 개새끼임여!”
“그건 맞다만. 그래도 더한 개새끼가 되었을 거야.”
그에겐 책임질 여자들이 있다. 강은별과 한예나. 두 사람만으로도 벅찼고, 졸지에 여자 둘을 사귀게 되었음에 실은 은별에게도 여러모로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예나의 마음을 끝까지 모른 척 외면했던 것에 대해서도 미안했고 말이다. 그래서 민국은 서라만은 다르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삼아서….
“어쨌든, 난 네가 싫어서 밀어내는 게 아니야.”
“…….”
“널 지키고, 그 애들도 지키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그러면서 서라의 이마에 한 손가락을 툭 갖다내는 민국이었다. 서라는 민국의 상냥한 행동에 절대 거짓이 없음을 알았기에 얼마지 않아 미소 지었다.
“알고 있음여.”
“…….”
“온니짱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잖아여.”
그랬으니까 이 사람에게 반한 것이겠지. 만일 영 아닌 사람이었다면 어떤 호감을 보이든 끝까지 거절했을 것이다. 서라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민국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상 이런 아이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날아오를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아~ 그냥 확인만 하러 온 건데 졸지에 황당한 일을 겪게 됐네.”
“헤헤, 원래 인생은 황당함과 막장스러움이지여! 그런 게 없어서 어떻게 재밌는 인생을 살 수 있겠나여?”
침대에서 일어난 민국이 허리를 피면서 말하자 서라가 거기에 거들어서 맞춘다. 민국은 맞춰주는 서라의 모습에 다시금 미소를 짓고는 물었다.
“그래도 인마. 인생이 너무 재밌어도 무리야. 이렇게 되면 죽는 게 무서워진다니까.”
“하긴여, 지 같은 로리 아이도 있는데 말이에여.”
서라의 머리를 쓰다듬는 민국이었다. 서라는 기특하게 그 손길을 받아주었다. 이윽고 모든 것을 정리한 민국이 방에서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그럼 이제 가본다?”
“앗, 잠깐만여. 지도 같이 가드림여!”
“올, 배웅해주는 거냐?”
“얍얍얍!”
한 쪽 눈을 찡긋 윙크까지 하는 서라. 미소를 머금은 민국은 그런 서라의 배웅을 마다하지 않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 추운 겨울답게 하얀 눈은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 너무 와서 전철 운행은 잠시 멈춘다는구만.”
“눈 정말 많이 내리네여.”
아까 전엔 그토록 씁쓸하고 차가웠던 눈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서라는 손장갑을 낀 상태로 손을 들어 내려오는 눈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민국은 서라가 끼고 있는 장갑을 바라보다가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이거 내가 준 털장갑이네. 이제 바로 네꺼 된 거냐?”
“예전에 이런 말도 있었지여. 네껀 내꺼! 내껀 내꺼!”
“으이구, 녀석.”
지하철은 못 탈 것 같으니 하는 수 없이 길거리의 택시를 붙잡는 수밖에 없다. 서라는 평소 배웅을 해준 민국에게 답례를 하기 위해 근처 도로까지 함께 향해주었고, 민국은 도로에서 무사히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럼 난 간다. 도착하면 연락하마.”
“오키도키여.”
검지와 엄지를 맞닿아 원을 그린 서라가 웃음을 보인다. 그 웃음은 한 치도 거짓이 없었다. 민국도 드디어 편안해진 그 웃음에 똑같이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윽고 민국이 택시 문을 닫았고, 택시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서서히 떠나는 택시를 보면서 서라는 가만히 서 있었다.
“…….”
나쁘지 않았다. 사실상 어중간한 사이가 된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고백을 했고… 민국도 나름대로 감정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뭔가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에겐 애인이 있다. 그리고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 그곳에 자신이 낄 자리는 없는 것이다.
‘놓을 때는 놓아야겠지여.’
이젠 확실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씁쓸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는 기쁜 미소였다.
하얀 눈은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고, 택시를 탄 민국과는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 멀어지는 거리는 아마 먼 훗날 자신들의 미래를 의미하리라. 서라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제, 더 이상의 짝사랑은 끝인 법이다.
서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끼이이이익 - 쿠웅!
“…….”
콰아아아아아앙!
웅장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려온 그 폭발음에 서라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휘둥그레 진 눈동자로 서라는 폭발음이 터진 그곳을 바라보았다.
민국이 타고 있던 택시가 뒤집어진 상태로 화약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