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으어어어어어어어! 콩딱지 변신! 슈퍼 콩딱지!’
‘와, 뭐 이런 마그네슘 캡슐 같은 놈이 다 있냐. 너 몇 살이냐. 나랑 키배 한 판 뜰까?’
‘앵? 왜 느닷없이 키배 신청질이져? 노답이시네여 님 부모님 만수무강 잘하라고 전해주세여.’
‘허허, 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오다 못해 간과 분리되어서 살아가는 기괴한 외계생물 같은 놈이. 아주 자신만만하게 키배 선고를 하는구나.’
‘쯔쯔쯔쯔쯔쯩!’
‘쯔쯔즈쯔즈즈쯔쯔쯔쯔즈쯧!’
‘쯔쯔쯔즈쯔즈즈즈쯔쯔쯔쯔즈쯔쯔쯔쯔증!’
‘쯔쯔쯔쯔쯔쯔쯔쯔쯔쯔쯔쯔쯔쯔쯔쯔쯔쯔쯔쯔쯔쯧!’
‘어맛! 어떻게 세종대왕느님이 열심히 만든 한글을 그런 식으로 모욕하실 수 있는 거지염? 알고 보니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인 척하는 다른 나라 사람이군염!’
민국과 서라가 처음 비제이로서 방송에서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초면이라는 게 우스울 정도로 막무가내 드립을 쳤었다. 그리고 두 비제이 간의 드립 배틀은 은근히 호응이 좋아서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 모았다. 심지어 이걸로도 게이버 인기 검색어 1순위에 오른 적도 있었으니…. 그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비즈니스 겸 함께 단합 방송을 하는 일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엇흠, 형님.’
‘왜 그러냐 아우야.’
‘형님 이른 시간에 이런 질문하기 뭐한데 형님은 질문하기 뭐한 얼굴 같습니다요 엇흠 형님.’
‘뭔 소리냐 이 남자 목소리내면서 남장할 것 같은 여자 녀석아.’
참고로 이때는 서라가 여자라는 사실을 민국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디까지나 서로 방송으로만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서라는 민국에게 깊은 신뢰도를 느끼게 되었다. 민국 역시 의외로 자기 자신과 실질적으로 맞는 구석이 많이 있자 실제로 만나고 싶다는 충동이 들게 되었다.
‘근데 행님. 나님 실제로 보면 많이 놀랄 수도 있는데 괜찮음?’
‘뭐 진짜 여자라거나 그런 거 아니냐?“
‘…헐, 행님. 설마 그러겠음? 만일 그러면 어쩔 거임?’
‘훗, 만일 그렇다면 잡아서 키잡해버려야지. 그리고 너와 나의 아기를 낳아서 비제이로서 성장시키는 것이다.’
‘사스가 남자 변태.’
그리고 결국 서라가 여자라는 게 밝혀지고… 민국은 경악하게 되었다. 설마 말로만 드립을 치며 장난을 했던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질 줄은… 세상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서라가 여자라는 건 그때만 해도 오로지 민국만이 알고 있는 큰 비밀이었고, 그 비밀은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어이없는 몇몇 사건들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도 서라가 여자란 걸 알게 되었지만 말이지….
[그리고]
결국 있어선 안 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쩌면 예정된 일일 지도 모른다.
“제가 알아서 한다는데 왜 자꾸 그러시는 거예요?”
서라도 말하고 나선 이게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간 억눌러왔던 감정이 이젠 앙금이 되어 쌓여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터질 기미만을 두고 있었고… 민국의 계속되는 제안이 결국엔 한계치를 넘어서게 만들었다.
“…….”
“…….”
당연지사 민국은 서라의 이런 모습은 난생 처음 보는 것인지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윽고 휘둥그레졌던 눈을 곧 다시 웃음으로 바꾸면서 민국은 말했다.
“네가 뭔가 오해한 게 있는 거 같은데, 서라야. 나는 장난으로 이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진심이기 때문에.”
서라가 민국의 말을 진지하게 끊는 경우는 없었다. 그건 삶을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민국에게 대드는 것처럼 말을 가로챘다.
“진심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요.”
“…….”
“진심이니까.”
당신이 진심인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도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는가. 어째서 그걸 끝까지 모른 척하는 것인가. 자신이 당신에게 짝사랑하는 마음을 숨겼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숨기고 오빠로서 도와주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기에?
“서라야.”
서라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너무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자신은 다가설 생각도 못했는데,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었단 명분 하나로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길 바란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보단 이해 받기를 먼저 원하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서라는 처음으로 자신이 한심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극도의 자괴감과 더불어 알 수 없는 혐오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서라야.”
민국은 그런 서라를 계속해서 타이르려고 노력했다. 싸우려기 보단 타이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민국은 서라보다 나이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보호자라는 명분은 없다 한들 실질적으로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서라에게 믿음직한 오빠로서 보이려고 했으니까.
“네가 뭐 때문에 화났는지 알았어. 그래, 그건 내가 미안해. 하지만 난 네가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소개시켜주려고 했던 거야. 네가 정말 좋아할….”
‘좋아한다.’라는 단어가 그녀의 귀에 박히는 순간이었다. 얼굴에 그늘을 지고 있던 서라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일순간 눈동자가 글썽일 정도였다. 결국 서라는 참지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비명이자 절규 같은 소리였다. 민국의 눈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서라도 소리를 내지른 다음 저도 모르게 거친 숨결을 내쉬었다. 그러다 얼마지 않아 자신의 과민한 반응을 깨우쳤는지, 똑같이 놀란 눈으로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
“서…라야?”
“……!”
입술을 틀어막은 상태로 얼굴을 보이는 서라였다.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놀란 민국의 눈동자와 마주한다. 아니다. 그녀가 하려고 했던 말은 이게 아니었다. 적어도 그에게 이런 식으로 냉담한 반응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
“…….”
“내가 무슨….”
“…….”
“아… 하… 하하….”
“…….”
“으….”
곧 스스로 생각하고도 어이없는 언동이라 생각했는지 실소를 머금는 서라. 가벼운 웃음과 함께 자기 자신을 비웃던 그녀는 얼마지 않아 고개를 내리 숙였다.
민국은 그런 서라의 행동을 단 시간 동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쯤 되면 민국도 이해 못할 리가 없다. 서서히 민국의 눈도 다른 의미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너….”
“…….”
“설마….”
더 이상 민국과 대화를 나눌 자신이 없었다. 서라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자기 방을 빠져나와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이를 본 민국이 깜짝 놀라면서 소리쳤다.
“서라야!”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민국도 벌떡 일어나 서라를 뒤쫓기 시작했다. 남이 보기엔 우스꽝스러울 지도 모를 장면이었다.
대뜸 대화를 나누다 말고 자리를 벅차고 뛰어나가는 꼴이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서라는 진심으로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늘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도망치는 게 당연하다고 느껴왔지만, 적어도 오늘만은 겁쟁이로서 도망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뛰는 발은 멈출 생각을 안했다.
“하아… 하아…!”
하얀 눈밭에 신발도 없이 뛰는지라 발바닥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눈은 펑펑 쏟아지고 있었고, 날은 햇볕 때문에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인적도 드문 지라 길을 거니는 동안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서라는 그저 방금 전 민국에게 화를 낸 자신을 떠올리면서 표정을 지었다.
“흑….”
그것은 눈물이었다.
“흐윽….”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영원한 짝사랑으로도 족했다. 그래야 민국이 행복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알게 된 이상 자신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함께 하고 싶은 욕심이 부쩍 들었다. 실은 알고 있다. 끝까지 모른 척했을 뿐….
‘은별 마님. 자꾸 그러시면 그 빈유가 더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가슴이 마이너스 급으로 작아져서 결국엔… 아, 죄송합니다. 원래부터 마이너스였죠.’
‘네 개념 마이너스로 만들어줄까?’
‘으아아악! 사람 살려!’
서민국… 강은별… 두 사람이 커플이라는 명분하에 재미있게 담소를 나누는 걸 보고 있노라면 늘 질투가 났다는 걸…. 그냥 단순히 친분으로서 서로 알고 있는 사이와, 애인으로서 서로의 감정을 교환하는 사이는 엄연히 다르다는 걸…. 서라는 모르고 싶어도 이해했고 피하고 싶어도 이해했다. 그래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하지만!
“서라야!”
“…….”
“야! 강서라!”
멀리서 쫓아오는 그의 인기척을 끝까지 무시하면서 달리는 서라였다. 그런 서라의 뒷모습을 쫓으면서 민국은 거친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확실히 눈이 온 눈밭이라 그런지 달리는 게 쉽지가 않았다. 좀만 달려도 숨이 벅찼기 때문에 민국은 헌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강서라 저 녀석!’
이쯤 되면 민국도 모를 리가 없다. 자신의 생각에 대해 알았다는 걸.
‘그때 민철이랑 대화하던 걸 엿들었던 건가!’
민국도 돌연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다 잘 해결되어가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서라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꼬여 있을지 알았던 민국은 도망가는 모습을 안 붙잡을 수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서 대화를 나눠야만 했다.
‘그러니까 좀 멈춰서라…!’
소리만 내지른들 쓸데없는 기력 소모였기에 민국은 그저 달릴 따름이었다.
“에라이이이이!”
이를 악물고 혼신을 다해 달린 민국이었다. 마침내 서라를 추격하는데 성공한 민국은 곧장 그녀의 옷깃을 손에 쥐었다.
“이놈아! 좀 멈춰 서라!”
“…꺄앙!”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달리던 서라는 갑작스런 브레이크에 뒤로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눈밭이라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민국은 넘어진 서라를 보면서 허리를 숙이고 핵핵거렸다. 거친 숨결을 내쉬는 그의 얼굴과 대자로 누워 있는 서라의 얼굴이 마주한다. 민국은 그녀의 발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신발도 안 신고 어딜 뛰어가? 감기 걸려서 부모님 걱정하게 하고 싶냐?”
“…….”
차디찬 눈밭에 누워 있자니 바짝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감정이 서서히 차가워지고, 이성이 돌아옴에 서라는 입을 열었다.
“어….”
“…….”
“으어아아이아어어아아어아!”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크게 소리만 지르는 서라였다. 이윽고 서라가 뒹굴뒹굴 민국을 피해서 옆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민국은 ‘어딜 또 도망가 이 인간아!’하면서 붙잡으려고 했지만, 어차피 막다른 벽이 가로막고 있던 지라 한참을 구르던 서라는 그 벽에 얼굴이 부딪히고 말았다.
“으아으…!”
“…괜찮냐?”
“으아으… 행님! 너무합니다여!”
뭐가 너무한 건지… 그저 부끄러운 맘에 그리 소리치는 서라였다. 얼굴을 부여잡고 주저앉아있는 서라를 보던 민국이 곧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그녀가 뭐라 하든 상관없이 곧장 자신의 등으로 밀어 업는 민국이었다.
“엇? 으아아아앗?”
“흔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발도 시린데 돌아가려면 또 걸릴 거 아니냐.”
민국은 서라를 업은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흔들던 서라는 곧 민국의 커다란 등을 보다가 천천히 그 등에 얼굴을 눕게 됐다. 이윽고 민국이 천천히 운을 띄었다.
“언제부터 알게 됐냐.”
“…행님은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데여.”
“나는 예전에 너 관련된 이상한 꿈꾸게 된 뒤.”
역시 서라의 예상이 맞았다.
“지는 행님이랑 민철 온니찡이랑 대화 나눌 때여.”
“역시.”
역시 민국의 예상이 맞았다.
“일단 돌아가자.”
“…….”
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은 그런 서라에게 더 이상 아무런 말없이 그저 업은 채로 집으로 향할 따름이었다.
‘발이 몹시 차갑네여….’
발바닥이 완전 얼어붙을 듯이 차가웠다.
‘하지만….’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만은 따뜻해요….’
서라는 눈을 감았다. 지금의 이 따뜻함을 서라는 잊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