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민철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민국은 민철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서라는 민국을 좋아한다.
민국은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이성으로 쳐다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의 짝사랑을 숨기는데 최선을 다했던 서라였다. 이제는 그걸 다 들켰다는 걸 안 상태인데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왜 그러냐 인마. 또 똥 마렵냐?”
“…….”
장난스레 농담을 던지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서라는 걸음을 멈춘 채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반응이 없었다. 민국은 그런 서라의 행위에 순간 의문을 품고 ‘앵?’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저벅저벅…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오면서 서라에게로 걸어가는 민국이었다.
“왜 그래. 진짜 어디 아파?”
상냥한 오빠의 물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이 아닌, 그저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한 물음일 뿐이다. 실은 다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 그 마음을 외면했다는 게 왜 그렇게 마음에 앙금처럼 남는 것일까.
“…….”
“서라야? 야. 강서라?”
의문을 담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서라가 고개를 들었다. 다소 진지함이 담긴 듯한 서라의 눈빛에 민국이 순간 당황했다. 그런 서라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
“…….”
하지만 서라는 그런 민국의 당혹을 머금은 얼굴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빛이 흔들리고 말았다. 과연 이게 옳은 것일까? 이렇게 하는 게… 올바른 것일까?
“헤헤….”
“…….”
결국 서라는 웃고 말았다. 또 어영부영 넘어가게 되었다. 아니… 이것이 서라가 항상 그토록 해왔던 수단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최대한 오빠 동생으로서의 사이를 유지하는 것.
“자꾸 똥똥거리시면 온니찡 얼굴에 조만간 똥이 날아갈 거임!”
“이럴 수가. 정색을 하다가 드립치는 방식은 새로운 너의 공격 방식이냐? 데미지가 은근 강렬하군.”
“히히! 공격 패턴은 언제나 바뀌어야 하는 법이지여! 처음 맛볼 땐 고통이지만 익숙해지면 쾌락이니깐여!”
음란한 드립을 치면서 서라는 다시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민국은 그런 서라의 얼굴을 빤히 주시하다가 곧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서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담쓰담하는 그 손길에 서라는 ‘헤헤’거리면서 귀여운 표정을 짓고 손길의 감촉을 느꼈지만, 무슨 연유에서일까?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녀석.”
민국은 서라의 겉모습만을 보고 귀엽다고 여기면서 넘어갔다. 그리고 서라의 머리에서 손을 때고 몸을 돌리는 민국을 보면서 서라는 가만히 서 있었다.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그 날,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밉고 씁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 *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크리스마스가 찾아오고 있었다. 솔로들은 눈물을 적시며 외로움을 타는 날이고, 커플들은 아기집으로 들어가서 1+1=3을 만들어오는 날! 그런 신성한 날이 슬슬 다가오고 있음에 민국도 불끈거릴 지경이었다.
“그 날을 위해 죽도록 허리 연습을 해야겠구만.”
“…그런 거 할 필요 없으니까 빨리 컨텐츠나 제작하시죠?”
칭얼거리면서 민국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는 은별이었다. 이곳은 은별의 방으로, 민국은 은별의 집에 간만에 놀러온 것처럼 부모님에게 인사를 한 뒤 놀고 있는 상태였다. 이윽고 민국이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고는 말했다.
“이것도 저에겐 하나의 컨텐츠입니다. 아기 만들기 컨텐츠지요.”
“네 다음 조루.”
“…….”
부들부들 떠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맵을 제작하고 있는 은별에게로 다가간 민국이었다. 이윽고 은별이 다시 궁시렁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왜 이렇게 복잡한 맵을 만드는 거야 하필이면…. 손이 너무 많이 가잖아.”
“후후, 그래도 모태솔로들은 이 맵을 보면서 크리스마스의 청춘을 꿈꾸지 않겠어? 그리고 은별이 너와 나는 이 가상 세계에서도 커플로서 커플의 모습을 보여주어 염장을 지르게 하는 것이지.”
민국, 서라, 은별이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 프로젝트. 크리스마스 전날 단합 방송은 마인 크래프트라는 게임에서 시작될 예정이었다. 마인 크래프트는 어떤 게임이든 플레이어가 직접 제작해서 플레이 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제작을 비롯해서 온갖 별의별 짓이 다 가능한 무궁무진한 게임…. 비록 맵을 제작하는 게 노가다인지라 까다로운 면이 적잖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대규모 컨텐츠를 진행할 때는 정말이지 효율적인 게임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서라 안 본 지 오래 됐네. 서라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흠, 한 때 로리콘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지만 지금은 다시 평화를 되찾고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지.”
“…로리콘이라.”
가늘게 뜬 눈으로 민국을 쳐다보는 은별. 민국은 양손을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내가 빈유인 은별이 너랑 사귀니까 로리 취향인 줄 아는데 절대 오해야! 은별이 넌 골반이 크기 때문에 로리는 아니니까!”
“비, 빈유고 뭐고 어째!”
트라우마를 건드렸는지 벌컥 화를 내는 은별이었다. 어찌 됐든 간에 두 사람은 여느 커플답게 하하호호 웃으면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크리스마스까지 이제 3일이 남은 지경이었고, 좀 있으면 두 사람 간의 낭만적인 데이트도 진행할 예정이었으니까 말이었다.
“그럼 이제 서라는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보러 갔다 올게.”
“…그래. 그럼.”
그냥 컴퓨터로 만나서 제작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직접 만나서 의논을 하고 제작하는 건 또 다른 것이었다. 민국은 은별을 뒤에서 한 차례 안아준 다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고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었으니 방문을 하기 전에 미리 전화를 해보는 민국이었다. 뚜루루루루루….
“요! 부처 핸섭!”
“너 집에 지금 있냐?”
“이응이응. 지 혼자 있는데여? 아앗! 설마 온니찡 지 혼자 있는 마당에 찾아와서 덮치시려구여? 아잉~.”
“흠흠, 로리 아이의 배가 나로 인해 커지게 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목표라 생각하지만.”
“뭐라 지껄이는 거야?”
“아닙니다 은별느님!”
막 거실에서 서라와 통화를 하고 있을 때 원형 통로로 조금 목소리가 들렸는지 날카로운 눈빛을 짓는 은별이었다. 오해라고 하면서 손짓을 한 다음 민국은 쩔쩔매면서 통화를 하였다.
“어쨌든 지금 출발한다. 제작해둔 맵 확인하러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오키오키. 지의 판타지한 럭셔리 맵을 손수 보여드릴게염! 빨리 오시와염!”
고개를 끄덕인 민국이 휴대전화를 뚝 끊었다. 그리고 은별에게 다녀오겠노라고 손을 흔든 다음에 현관을 나가기 시작했다. 은별은 그런 민국을 원형 통로에서 상당히 수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곧 몸을 돌려 자기 방의 컴퓨터로 향할 따름이었다. 어찌 되었든 커플에게 믿음이란 건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 *
“내가 왔다.”
“아앗. 어둠의 정력 마왕이 나타났네여. 경찰에 곧장 신고를!”
민국이 현관문에 당도하자 곧장 휴대폰을 들어 112에 신고하는 척 연기를 하는 서라였다. 민국은 그런 서라의 장난에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준 다음 서라의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오늘 다들 늦게 오심여. 맛벌이시잖아여.”
“흠, 그랬었지.”
서라의 부모님은 맞벌이였고 워낙 바빴다. 고로 이 넓은 집에서 서라는 거의 혼자 생활하는 일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별로 친한 친구도 없고 오로지 비제이 일을 하는 게 서라의 전부였는데… 한 편으론 크게 외롭지는 않을까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나 덕분에 학교생활 좀 편해졌을 텐데 그때 이후로 좀 괜찮은 친구는 못 사귀었냐?”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음.”
“못 사귀었군. 그 대답으로 충분하다.”
혼자긴 했지만 서라는 왕따를 당한다고 하기도 참 뭐한 것이… 실질적으로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서라와 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근처에 다가가기엔 너무 신비주의적인 분위기가 사람을 멈칫하게 했을 뿐.
“행님! 이런 말 못 들어 보셨어여?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출석부라는 죄인부에 올라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교사라는 간수의 감시를 받으며 공부라는 벌을 받는다. 그리고 졸업이라는 석방을 기다린당!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는 건 죄인이 되는 일일 지도 몰라여! 무시무시!”
“우와, 그거 참 무섭구나.”
“이잉… 리액션이 너무 소소하네여.”
서라의 방으로 온 민국은 책상을 탁탁 치면서 말했다.
“아무튼 어떻게 제작했는지 한 번 보자. 문제 있으면 얘기하고 풀어가야 하니까.”
“오키오키!”
이윽고 컴퓨터로 향한 서라가 곧장 마인 크래프트에 접속해서 자신이 제작한 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꽤나 깔끔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맵이었다.
“어떠신가여 엣헴.”
“호오, 괜찮네.”
“히히.”
민국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 듯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 짓는 서라. 이윽고 민국이 가볍게 키보드를 조작해서 맵의 부족한 부분만 좀 더 보충했다. 이내 보완이 끝나자 민국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된 거 같다. 역시 내 핏줄이 이어지지 않은 친 남매 같은 동생이로군. 이렇게 맵을 완성도 높게 만들다니 말이야.”
“사스가 지를 칭찬하는 척하면서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온니짱답네여!”
서라의 침대에 ‘웃차’하면서 걸터앉으면서 묻는 민국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이제 방학인가?”
“넹. 방학식했지여.”
“올, 축하한다. 드디어 이제 너도 백수인 셈이로군. 백수로서 이번 방학은 어떻게 보낼 거냐?”
“으음! 이 세상의 모든 야구 동영상을 내 컴퓨터에 담아볼까 생각해여.”
“아서라. 그건 이미 내가 이뤄낸 일이다.”
“히익, 패도잼.”
자신의 방학 목표를 이미 달성한 사람이 있음에 경의와 질겁의 표정을 짓던 서라였다. 이윽고 민국이 꼰 다리를 건들건들거리다가 물었다.
“너 이참에 애인이나 만들어보는 거 어떠냐?”
“읭? 애인이여?”
“그래. 내가 아는 애들 중에 괜찮은 애들이 한 두 명은 있거든. 전에 민철이 말고도. 민철이 걔는 인성은 좋지만 집착이 심한 애라서 아마 이해 못해주는 게 몇 가지 있을 거야. 그래서 완고하게 안 된다고 했던 거고.”
“…….”
잠시 뜸을 들이던 서라였다. 곧 가벼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민국을 향해 말을 건넨다.
“행님, 나님 이제 고3으로 올라감여. 고3에 애인 사귀는 건 인생 위험인데여?”
“흠, 굳이 고3에 애인 사귀라는 건 아니고. 그냥 한 번 만나보고 괜찮으면 성인 되어서 사귀라는 거지.”
서라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 민국은 서라에게 가능한 한 좋은 남자를 소개시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남자는 남자가 알아보는 법. 민국은 자신이 아는 애 중에 정말 현명하고 괜찮은 남자를 떠올리며 서라에게 소개시켜주려고 했다. 그러나 당연지사 서라의 반응은 민국이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정말 널 잘 인도할 남자애들 몇 명 알고 있으니까, 혹시 괜찮으면 생각해보라는 거야.”
“…….”
“아, 물론 지금 만나라는 뜻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인마. 그냥 생각해보고 결정해봐.”
오빠로서, 보호자의 역할로서 염려하듯이 제안하는 민국. 그러나 그 제안을 하는 민국은 이미 서라의 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괜찮아여. 필요 없을 거 같음여.”
“에이, 그러지 말고. 그냥 잘 생각해봐라.”
“정말 필요 없음여. 고3이니깐여.”
“그러니까 아까 말한 것처럼 고3 지나고 말하는 거지. 괜히 이상한 남정네들 꼬일까봐 걱정되어서 말하는 거다.”
“괜찮아여. 지가 알아서 할게여.”
“남자가 남자를 보는 게 더 올바르니까 하는….”
“제가 알아서 한다는데 자꾸 왜 그러시는 거예요?”
민국은 순간 말미를 흐릴 수밖에 없었다. 서라의 말투가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