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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69화 (269/369)

269화

민국은 서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순히 오빠로서가 아닌, 이성으로서 말이었다. 그것을 언제 알았냐 하면… 아무래도 서라와 사귀는 꿈을 꾸고 난 뒤었겠지.

‘네가 술에 취해서 나에게 고백을 한 거야!’

테이블 앞에서 민국은 서라에게 그런 식으로 말했었다. 그때 서라는 내색은 안 하려고 애썼지만 몹시 당황해하는 게 역력했었다. 그리고… 민국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얼마지 않아 그 꿈으로 자신이 시상식이 끝난 밤 술에 취한 서라가 뭐라 하며 엉겨 붙었는지 기억해냈다.

‘좋아….’

‘좋아해요… 흑.’

‘좋아해요 오빠….’

사실 믿겨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몇 개월 전의 일이었고 기억의 오류라고 생각했다. 왜, 사람들이 이따금씩 과거의 기억을 스스로 조작해서 생각하지 않던가? 민국도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넘겨짚고 싶었다.

‘급똥!’

하지만 서라가 민국이 짚을 때마다 선보였던 그 어색한 행동들은 서서히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그 흐릿했던 기억이 얼마지 않아 뚜렷해지는 걸 느끼게 되었다. 시상식이 끝난 술자리에서 은별과 서라, 유이가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명확하게 기억해낸 것이다.

은별이야 그런 술버릇일 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고, 유이는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사실상 가장 놀란 건 서라였다.

‘서라가 나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민국은 고민했다. 이미 자신에겐 은별이라는 여자 친구가 있다. 그리고… 이제 또 책임을 져야 하는 다른 여자, 예나도 있었다. 흑화 소주 건으로 책임져야 할 여자가 무려 두 명이 생겼고 두 사람을 다른 사람들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헌신을 다해 책임지기로 마음먹었다.

‘서라까지 함께 하게 된다면?’

민국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차피 남들에겐 쓰레기라 지적받을 테니까 차라리 밑바닥 쓰레기가 되어서 서라까지 챙기는 건 어떨까 하는 욕심…. 그러나 민국은 서라를 귀중하게 생각했다.

핏줄이 이어진 동생만큼은 무리더라도… 그래도 그녀가 큰 병을 앓으면 진심으로 걱정하여 간호할 만큼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안 돼.’

그리고 그래서 더욱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서라만큼은, 예나와 은별과는 다르게 좀 더 나이가 어렸고 더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 네 살 차이가 뭐가 많냐고 하겠지만, 십대부터 이십대에겐 정말 그 나이 한 살 한 살이 중요했으니까….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민국은 젊은 만큼 무수한 기회가 있을 것이라 믿고 서라를 놓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라를 완전히 손에서 밀어내는 건 아니었다.

그랬다간 서라도 맘에 아파할 테고, 같이 합동 비제이로서 워낙 잘 어울렸고 그간 함께 쌓은 시간이 있었기에 민국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끝까지 모른 척 할 생각이었다. 끝까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시치미 땔 생각이었다.

어차피 서라도 도리를 지키려고 노력을 하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에… 그게 그녀로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민국도 끝까지 모른 척 최선을 다하자고 결심했었다.

‘너에게 걸려 있는 병을 치료하게 되는 그 순간까지는.’

민철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서라가 자신과 민국에게 보여준 미소가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단 번에 민국에게 이성적 호감을 가지고 있구나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추측은 아주 정확했으며… 민국이 그간 숨기고 있던 마음을 밝혀내는데도 일조했다.

‘…….’

그리고 벽에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라는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그녀는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 누구보다도 짝사랑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뭔가 어설펐던 것일까? 아니면 역시 시상식 술자리 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

뭐가 되었든, 서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편으론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어째서 지금까지 모른 척한 것인지….

“여자 친구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건가?”

민국의 시원한 대답에 드디어 민철이 그 의도에 대해 추궁하기 시작했다. 민국은 민철의 질문에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씁쓸한 미소로 대답했다.

“서라를 위해서야.”

“뭐?”

“…….”

민국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민철은 반문했다. 벽에 서서 민국의 말을 듣는 서라. 이윽고 민국이 말을 이었다.

“물론 은별이 때문도 있어. 은별이가 서라가 그런 맘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나와 단 둘이 만나는 것에 대해서 극구 반대할 테니까. 그리고 은별이랑 서라의 좋은 사이도 분명히 엉망이 되겠지.”

“…….”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서라는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더 좋은 남자. 더 능력 있고 잘 나가는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자신과 만나는 은별이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건 아니다. 그저, 자신은 은별이를 선택했으니 만큼 다른 여자는 더 이상 손댈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한창 어린 서라가 펼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기회를 놓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네 말이 그렇다면 그럼 나랑 서라 씨가 함께 하는 건 왜 반대한 거냐?”

“그건.”

민국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한 걸 원하냐?”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민철을 향해 민국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넌 안 돼.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

“…….”

“너에게 말하긴 뭐하지만, 서라는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게 있어. 그리고 그건 서라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야. 언제 나을 지도 모르고 언제 괜찮아질 지도 몰라. 근데 그런 서라를 네가 과연 감당하고 이해해줄 수 있을까? 너처럼 여자에게 잘하는 일편단심에 집착성 있는 놈이?”

“무슨 말이냐 그게. 서라 씨 어디 아프냐?”

민철은 아무것도 모른다. 서라가 민국의 그것을 마셔야 생명을 보유할 수 있단 사실도. 그리고 만일 서라와 민철이 사귀게 되면 그 사실을 알게 될 테고, 민국이 알고 있는 민철인 이상 절대로 보기 좋게 넘어가주진 않을 것이었다.

민철은 자기 여자 친구에겐 잘 대했지만 그만큼 소유욕이 남다른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다 얘기해주진 못하지만 그렇다는 거다.”

“…….”

“고로 서라의 애인을 고른다면 더 좋은 애로 고르려고 하는 거야.”

요컨대 민국은 아직도 서라를 걱정하고 있고, 보호자 역할을 하려하고 있었다. 서라가 자신을 이성으로 쳐다본다고 해서 똑같이 이성으로 보는 게 아니라… 엄연한 오빠로서 보호자의 모습으로 관리를 하려는 것이었다. 서라는 어느 덧 얼굴에 그늘을 지고 고개를 내리고 있었다.

“하하….”

민철은 굉장히 어이없단 얼굴로 민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국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민철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솔직히 화가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왠지, 민국에게 말 못할 사연이 있다는 걸 눈치 좋은 민철도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추궁했다간 아무래도 친구 사이에 말 못할 금이 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래… 그렇다는 거지…”

“그래. 그렇다는 거다.”

“그렇군…. 뭔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잠시 떨구고 머리를 만지던 민철이었다. 진정하느라 어지간히 고생하는 모양이었다. 민국은 내심 미안한 맘이 들었는지 물었다.

“한 대 맞아줄까?”

“오그라드는 말은 하지 말자. 후우… 그래. 뭐 너도 평범한 놈은 아니니까 다 네 뜻이 있겠지…. 알겠다.”

“호오, 금방 이해해주는 거 보소.”

“이해해주는 게 아니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거 같아서 그러는 거다.”

민국은 씨익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갈등은 어느 정도 종결난 모습이었다. 사실상 민철도 그것을 추궁하기 위해서 민국과 서라를 부른 것이었으니까…. 서라가 민국에게 대하는 행동이 정말 이성으로서의 행동인지… 그리고 민국이 서라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그거면 됐다….”

“…….”

“사실상… 너도 서라 씨가 잘 되길 바라는 거 같으니까.”

민철이 용서한 건 민국의 그런 선한 마음 때문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짝사랑한, 이젠 짝사랑하지 않을 그녀를 위해서 그래도 자신의 음란한 욕구도 참았다는 게 친구로서 맘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민국은 가볍게 웃음 짓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미안하니까 이따 식사 끝내고 술이나 한 잔 사주마.”

“시꺼 임마. 너랑 술 한 잔 했다간 진짜 너 때릴 거 같다. 그냥 가볍게 얘기하고 가자.”

“그럼 그것도 좋지.”

그리고 민철이 ‘근데 서라 씨 왜 이렇게 안 와?’라고 물음을 던졌을 때였다. 이윽고 벽면에 그늘 진 얼굴로 가만히 서 있던 서라였다. 자신을 지칭하는 목소리에 뜨끔하듯 어깨를 올리던 서라가 곧 손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비비다가 고개를 들었다.

“빠밤!”

“올, 속은 다 비었냐. 즐쾌변?”

“온니찡 어떻게 어여쁜 숙녀에게 그런 말을 하실 수가 있지여? 정말이지 몸둘바를 모르겠네여!”

부들부들 떠는 과장된 리액션을 표명하는 서라. 그런 서라의 행동에 민국과 민철이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셋 사이는 의외로 괜찮게 흘러갔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고… 유쾌했다. 서라도 유쾌하려고 애를 썼다.

‘알고 있었군요.’

그래, 자신이 참으면 됐다.

‘알고 있었어요….’

숨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사실상 숨기는 건 무의미했던 것이다.

* *

“그럼 난 간다.”

“그래 인마. 잘 가라.”

“너나 서라 씨 몸조심하게 잘 데려다줘.”

맞은편에서 민철이 손을 흔든다. 어느 덧 눈이 내리는 하늘. 겨울답게 하늘도 하얗다. 민국의 옆에 있는 서라를 향해 민철은 한 마디했다.

“서라 씨.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요.”

“헤헤… 넹!”

서라는 웃음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민철을 향해 양손으로 흔들었다. 펄쩍펄쩍 뛰면서 양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은 어린아이 같아 귀여웠다.

이윽고 민철도 맘을 완전히 정리하고 흐뭇한 미소로 몸을 돌려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민국과 서라는 말없이 그런 민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몸을 돌린 민국이 말했다.

“이제 갈까?”

“이응이응. 가지여.”

아직 날은 밝다. 의외로 식사만 하고 끝났기 때문에 더 놀 시간도 있는 것 같았다. 하얀 하늘 아래 하얀 눈밭을 밟으며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를 거니는 두 사람이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덩이에 민국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우 씨, 눈 보소. 왜 이렇게 펑펑 내린다냐.”

“마치 눈 두덩이에 가버릴 것 같아여!”

“녀석. 네가 안 가버리는 게 대체 무엇일꼬.”

귀엽게 서라를 바라보면서 민국은 길을 거닐었다. 이윽고 저벅저벅 선두로 길을 거닐던 서라를 향해 민국이 다시 말을 잇는다.

“근데 민철이는 정말 괜찮냐? 안 잡아도 되겠어?”

“…….”

서라는 그 말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웃음 지으면서 대답했다.

“이응! 민철 온니찡은 나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임여!”

“호오, 그러냐.”

의외로 서라가 대범한 모습을 보이자 민국이 감탄한 듯 말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지. 그래도 좋은 사람은 네가 더 잘 만나야지.”

“…….”

“적어도 민철이 걔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어찌 그렇게 확신하셈여?”

“훗.”

가벼운 웃음과 함께 민국은 정면을 보면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거니까.”

걷던 서라의 걸음이 멈추었다. 어느 덧 서라를 지나치며 민국이 선두로 걸어가며 말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남자를 만나게 해주지. 그러려고 내가 민철이 그놈이랑 네 사이를 반대한 게 아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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