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식사 괜찮으세요 서라 씨?”
“넹! 이번 것도 정말 맛있어여! 민철 행님은 이런 맛집 찾는데 재능이 있으시네여!”
“하하, 행님이라니. 가능하면 오빠가 좋겠는데.”
우걱우걱 음식들을 먹고 있는 서라는 정말이지 사춘기 소녀답게 건강한 모습이었다. 저렇게 먹는대도 살이 쪄야 할 곳만 찌는 거 보면 태생에 좋은 유전자를 받은 게 자명했다. 이윽고 민철이 민국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번에 크리스마스 합동 방송한다며.”
“그래. 너도 내 방송 봤냐.”
민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은 이번에 방송을 하면서 크리스마스 전날에 모태솔로들을 위한 솔로 파티를 연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 방송에 참여하는 비제이는 은별부터 서라까지, 이외 다른 사람도 모으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아직 인원 부족이었다.
애초에 단순히 사람을 끌어 모으는 선에서 그칠 게 아니라… 모이는 사람들이 방송을 살리고 팀웍이 맞는 사람들로 이루어져야 했으니까. 뭐, 사실상 세 명이서 방송해도 훌륭한 컨텐츠가 나올 것 같기도 했다.
“보긴 봤지. 재밌어 보이긴 하더라.”
“호오, 너도 끼고 싶냐. 끼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해. 참가시켜주도록 하지.”
민국의 대범한 말에 민철은 뜸을 들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재밌게 해라. 내가 끼기엔 좀 그런 거 같다.”
“흠, 그러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민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민국은 뭔가 남다르단 생각을 느꼈다. 확실히 오늘의 민철은 뭔가 기색이 영 달랐다. 맛나게 음식을 먹던 서라였다. 이윽고 맛에 정신을 잃고 급하게 먹은 탓인지, 얼마지 않아 배에 손을 올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였다.
“서라 씨, 어디 가시게요?”
“으음… 화가 난 나 자신을 타이르기 위해 잠시 휴식처가 필요할 것 같아여.”
민철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자 민국이 대놓고 말했다.
“똥마렵댄다.”
“아앗! 행님 너무 하시네여!”
진심으로 너무하다 생각했는지 민국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때리는 서라였다. 아무래도 그냥 남자도 아니고 자신에게 일말의 호감을 안고 있던 민철이었으니까. 서라도 여자는 여자인지라 평소 자신을 좋아했던 남자에게 그런 이미지가 깨지는 건 별로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허나 김민철은 그런 서라의 행위도 마냥 귀엽기만 했는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다녀오세요 서라 씨. 저희들 재밌게 얘기하고 있을게요.”
“의잉… 넹! 아기를 잠재우고 돌아오도록 할게여!”
아기라는 건 어디까지나 서라의 뱃속에 있는 내용물을 의미하리라. 어찌 됐건 간에 화장실로 직행하는 서라의 귀여운 뒷모습을 뿌듯하게 보던 김민철이었다. 민국은 그런 민철의 얼굴을 지켜보다가 홀짝 잔의 내용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너 정말 서라 좋아하는구나. 지금도 좋아하냐?”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지… 저렇게 귀여운 애인데 안 좋아할 애가 누가 있겠어.”
“뭐 그건 그렇다만.”
민국은 가볍게 잔을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확실히 서라는 어딜 갔다 놓아도 인기 만점일 아이였다. 워낙 성격이 특별나고 행동반경이 넓은 아이인지라 남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뿐. 그 속내는 어떤 이보다도 넓고 아량 깊었기에 좋은 아이는 자명했다.
“민국 넌 서라에게 관심 없나?”
“응? 나? 야 인마 난 여자 친구 있잖아.”
민철은 민국과 예나가 있던 사건에 대해서 하나도 모른다. 애초에 민철은 예나가 누군지 모르는 실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국의 여자 친구는 강은별밖에 모르고 있었다.
실질적 여자 친구도 강은별이 맞긴 했지만…. 이윽고 민철이 ‘그렇지’하면서 잔을 들고 꿀꺽 마신다. 내용물을 단 번에 들이키는 그 모습에 지켜보던 민국이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었냐?”
“왜.”
“뭔가 좀 이상해 보인다만.”
진솔하게 묻는 민국이었다. 그런 민국의 물음이 꽤 맘에 들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민철이었다. 시선은 이미 창문으로 겨누어져 있었다.
“이상해 보일 거다. 그게 사실이지.”
“흐음, 뭐 심각한 일이라도 있었냐?”
남의 사정을 쉽게 추궁하는 민국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구 일이니까 도와주자는 의미에서 물음을 던진 민국이었다. 하지만 그런 민국의 물음이 도리어 화를 불러낸 것일까. 민철은 진지한 얼굴로 민국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너 서라 씨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아냐?”
“앵?”
다짜고짜 서라를 주제로 하는 질문에 민국은 당황한 얼굴을 지었다. 심지어 그 질문이 좋아하는 이성에 관련된 것이니 더욱더 놀랄 수밖에. 민국은 민철을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아니. 몰랐지. 서라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냐? 허허, 그거 놀랍네.”
“…….”
“슈밤. 비록 핏줄은 아니지만 귀여운 동생 녀석인데 남자 잘 골랐으면 좋겠다만.”
“…….”
“근데 누구냐? 서라가 좋아하는 그 남자 녀석이?”
민국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서라와 오랫동안 함께 한 자신보다 고작 한두 번 만난 민철이 그것을 단 번에 알아냈다는 사실에도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게 진짜로 놀라는 모습일까… 민철은 오랫동안 민국을 보아왔기 때문에 아닐 거라 생각했다.
이윽고 가늘어진 눈동자로 민국을 바라보면서 민철은 단답했다.
“너.”
“…….”
“너라고.”
어찌 보면 이건 예의가 아니었다. 두 사람 간의 감정 교환에 대한 건 두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일이지, 그것에 제3자가 끼어드는 건 올바른 방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철이 그런 이기적인 인상을 무릎 쓰고 민국에게 직설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나? 나라고?”
“그래.”
“너 혹시 횡단보도에서 이상한 동전 발견해서 주웠더니 다른 세계로 갔다 오지 않았냐? 혹은 감기 때문에 병원 갔는데 정신분열증이 더 문제라고 해서 정신병원 수석으로 갔다 오진 않았는지.”
“난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다.”
서라가 언제 화장실에서 돌아올지 모른다. 고로 가능한 한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싶던 민철이었다. 그런 민철의 진지한 얼굴은 민국도 서서히 진심으로 대응하게끔 만들었다. 웃음 짓던 민국의 눈가에 웃음기가 싸악 사라졌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다냐.”
“…….”
“정작 오빠 동생으로 잘 지내고 있는데, 서라가 날 이성으로 보고 있다니. 네 착각이란 생각은 안하냐?”
단 한 번도 서로가 서로를 이성적으로 보는 행동을 어필한 적은 없다. 볼 뽀뽀라든가, 어쩌다 있는 섹드립은 이미 비제이를 하면서 친분이 두터워졌을 때 가끔씩 보이던 행동. 물론 그것도 애인이 있게 된 뒤로는 최대한 꺼리고 자제하는 편(전보다는)이었다.
“착각은커녕 내 말이 맞는 거 같은데.”
“…….”
“내가 보기엔 서민국, 네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로밖에 안 보인다.”
민철은 촉이 날카로운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민국은 그의 오래된 친구다. 비제이로서 함께 한 시간만 계산하면 오히려 처음 비제이로서 만났던 은별보다 더 오래 되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민국의 본 모습에 대해 모를 리가 없다.
“정말 서라 씨가 널 좋아하는 걸 넌 조금도 몰랐나?”
“…….”
“진짜 모든 걸 다 걸고 그렇게 맹세할 수 있어?”
“야 인마 당연하지. 애초에 난 지금도 서라가 날 좋아할 거라 생각하진 않아. 왜냐하면 난 애인도 있잖아.”
강은별을 언급하면서 민국은 서라가 절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또다시 부정했다. 그러나 김민철은 확신했다.
“애초에 민철아,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네 말이 맞다고 해도 말이지… 그런 식으로 서라의 감정에 개입해서 추궁하는 건 올바른 행동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그보다 더 올바르지 못한 행동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보는데.”
“아오! 이 밤에 자려고 할 때 귀에 자꾸 윙윙거리면서 날아다니는 모기 자식아!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냐?”
기어이 답답한지 소리치는 민국이었다. 애초에 강서라가 자신을 좋아할 리 없지 않은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서라와 자신은 어디까지나 동생 오빠 사이! 그 이상의 감정은 서로가 서로에게 품고 있지 않았다.
“정말 좋은 맛집이네여. 맛도 좋공.”
화장실에서 나온 서라는 자신의 얇고 뽀얀 배를 쓰담쓰담 만지면서 흡족한 얼굴을 지었다. 또 맛집으로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하니 군침이 돌았다. 이렇게 서라가 음식에 환장하는 건 보기 드문데… 역시 맛집의 파워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서라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총총 계단을 오를 참이었다. 막 열려 있는 맛집의 문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근데 누구냐? 서라가 좋아하는 그 남자 녀석이?”
‘읭?’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서라는 문 안으로 들어가려던 것을 멈칫했다. 그리고 벽면에 몸을 대고 천천히 고개만 문안으로 옮겨보았다. 문이랑 가까운 거리의 테이블인지라 민국과 민철이 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민철의 목소리가 서라의 귓전에 닿아왔다.
“너.”
민철이 민국을 지목하면서 하는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서라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 어떤 찬바람이 몰려와도 서라의 몸을 이토록 얼어붙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었다. 굳어버린 그녀를 아는지 모르는지, 민철은 반복해서 민국에게 확신을 꽂고 있었다.
“너라고.”
그 목소리를 들은 민국은 일순간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을 가리키는 모습이었다.
“나? 나라고?”
“그래.”
“너 혹시 횡단보도에서 이상한 동전 주워서….”
못 믿겠다는 듯 김민철에게 대응하는 민국. 하지만 서라는 진지한 민철의 얼굴을 보는 순간 농담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동시에 표정 관리를 못하고… 다소 떨리는 눈동자로 생각했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을까. 그토록 꽁꽁 숨겨 왔는데… 도대체 어디서 문제점을 찾았단 말일까? 서라는 믿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어째서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서라가 날 이성으로 보고 있다니, 네 착각이라 생각 안하냐?”
민국은 끝까지 반발하는 모습이었다. 서라가 날 좋아하는 건 사실상 말이 안 된다고, 계속해서 의견을 피력했다. 그 모습이 어떻게 또 숨통을 조여 왔지만, 그보다 더 떨리는 건 자신의 숨겼던 마음이 들킬까 싶은 것이었다.
“정말 서라 씨가 널 좋아하는 걸 조금도 몰랐냐?”
한 편으론 김민철이 갑자기 왜 저러는 것일까 의혹도 들었다. 민철은 다소 진지한 얼굴로 민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왜 내가 서라 씨를 단 둘이 만날 때도 네가 찾아와서 중계자 역할을 했고, 왜 그렇게까지 서라 씨랑 내가 어울리는 걸 원치 않아했지?”
“로리를 사귀는 건 범죄입니다 고객님.”
“네가 서라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 더 그랬던 거 아니냐?”
민철의 그 물음에 그제야 장난스럽게 말하던 민국이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민철은 이제 아예 노려보는 기세였다. 피할 테면 끝까지 피해봐라, 끝까지 따라가 주겠다… 라는 의지가 점철되어 있었다. 민국은 그런 민철의 눈빛을 계속해서 주시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
“…….”
문 너머에서 지켜보는 서라의 가슴이 떨려왔고, 지켜보는 민철도 민국이 어떤 대응을 할까 궁금해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웃음과 함께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던 민국이… 반쯤 눈웃음과 함께 진지함을 담고 민철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래.”
“…….”
“알고 있었어.”
“…….”
“서라가 날 좋아한다는 걸.”
서라의 심장이 쿵하는 느낌이 들었다. 반대로 민철은 드디어 감을 잡았다는 얼굴로 민국을 향해 가늘어진 눈을 보였다. 민국은 눈웃음과 동시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민국은 서라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