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넓은 방안,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아 빛나는 샹들리에의 기운으로 흑설 공주는 어떤 서적을 읽고 있었다. 그 서적은 사람의 정성 어린 글씨가 하나 하나 적혀 있는 서적이었는데… 실제 이 세상에 있는 책들과는 다르게 직접 책 주인이 쓴 흔적이 남아 있는지라 감회가 남달랐다.
흑설 공주는 그 서적에 적힌 주인의 경험을 고스란히 머릿속에 담았다.
'참으로 딱한 여인이구나.'
흑마법사는 말했다. 언젠가 찾아올 그를 대신해서 도와달라고. 하지만 어떤 조건도 없이 도와줄 만큼 흑설 공주는 마냥 착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물의 물질을 비롯해 어떤 방식으로든 조건을 걸어 보상을 받는 게 그녀의 삶의 이치, 철학이었다.
'기를 써도 피할 수 없는 게 있거늘.'
흑설 공주는 서적을 덮었다. 뒷내용이 더 남아있었지만 더 이상 읽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세상의 판도엔 변함이 없었고,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이 소녀의 목적. 그러나, 흑설 공주는 알고 있었다. 때때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게 존재함을. 똑똑똑.
"손님입니다."
"내가 예상하는 그 이로 추정되는구나. 한 번 들어오게 해주거라."
"예."
노크를 한 집사의 말에 대응해준 흑설 공주는 덮은 서적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문을 쳐다보았다. 끼이익… 집사가 문을 열어젖혀주자마자 보기 껄끄러울 정도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남자. 그리고는 곧장 흑설 공주의 앞에서 처절하게 무릎을 꿇고 울상을 지으며 소리친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이미 우리의 관계는 끝나지 않았느냐?"
남자는 이미 눈물 콧물 다 뺴다 못해 온갖 추한 일은 다 겪은 인상이었다. …이전에 흑설 공주의 집에 찾아왔던 사장 중 한 명이었다. 가장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지원으로 한 회사의 사장이 되었던 아들…. 그러나 모든 걸 자기 뜻대로 굴리면서 살아왔던 인물인지라 워낙 철이 없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직원에게 손대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그런 나쁜 짓은…!"
그리고 결국 그는 흑설 공주의 집에서 일을 하는 직원들에게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신의 집에 아르바이트 생으로 채용된 서라에게도 손지겁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삼은 흑설 공주는, 지금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이 남자 아버지의 회사를 부도나게 만들었다. 당연지사… 그건 아버지의 가족인 이 남자에게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었다.
"흑… 흑…."
"끝난 건 끝난 게 아니겠느냐."
흑설 공주는 특유의 말투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품격스러운 서랍 위에 올라가 있는 와인잔 하나를 들더니 집사를 가리켰다. 집사는 하녀에게 받은 와인을 가지고 흑설 공주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점잖게 고개를 숙이면서 흑설 공주가 들고 있는 와인잔에 한 치의 실수 없이 내용물을 따라주었다.
이내 그것을 한 모금 홀짝이는 흑설 공주.
"실수를 하면 그것은 만회하는 것이 아닌, 정당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고 난 생각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흐윽… 제발… 제발…."
"그 눈물은 자신의 불행을 빠져나가고 싶은 맘에 흘리는 눈물로밖에 안 보이는구나. 진정으로 나에게 반성을 할 생각이었다면 그대는 내 앞에서 추한 눈물을 흘렸어선 안 돼."
애초에 흑설 공주에게 미움털이 박힌 사람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녀는 아직도 엎드려서 울고 있는 그 남자의 턱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눈물 범벅인 그 남자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향하게끔 움직인 다음에, 눈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흑설 공주는 경고했다.
"자네의 인생은 끝이네."
"……."
"지금 자네가 안고 있는 증오도, 슬픔도, 뒷면에 안고 있는 복수심도, 모두 허무하게 만들어주겠네. 자네는 사실상 날 찾아왔어선 안 되네."
그녀가 짓고 있는 미소는 여우의 미소였다. 하지만 일반 여우가 아니었다. 단순히 사람 한 명을 홀릴 정도의 여우가 아니라, 나라를 망가뜨릴 수 있는 유혹의 미소였다.
"아… 아아…."
"모든 걸 잊고 살게. 그게 자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인생이라네."
그리고 그 순간… 흑설 공주를 쳐다보던 남자의 눈동자엔 초점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법사인 그녀에겐 이미 허용 가능한 일….
'…….'
엎드리고 있던 남자가 무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집사가 열어주었던 문으로 등을 돌려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한다. 저벅 저벅….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이, 그는 마지막 인생의 말로를 향해 움직였다.
* *
"그럼 잘 들어가고."
"온니찡 정말 야하시네여… 어디에 들어가라는 건가여?"
"훗, 정 뭐하면 내 품으로 들어와도 된다. 하지만 한 번 들어오면 임신할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어멋. 말로만 듣던 임신 기계? 두려워잉!"
내숭을 떠는 척 놀란 얼굴을 짓던 서라가 후다닥 집 마당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관문 앞에 당도하자 몸을 돌려서 하늘 높이 손을 들고 흔든다. 그것이 오늘 하루를 마치는 작별 인사임을 알았기에 민국은 미소 짓고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도 집으로 돌아가면 오늘 하루는 끝이겠군.'
서라가 무사히 현관문으로 들어간 걸 목도한 민국이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아! 한 가지 까먹었네여!"
막 민국에게 인사를 하고 집안으로 들어왔던 서라였다. 집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기억이 났는지 서라는 곧장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헐레벌떡 무언가를 들고 다시 현관문으로 돌아온다.
'역시 그래도 이건 돌려주는 게 나을 거 같아여! 받기만 하는 건 너무 죄스럽다능!'
서라의 수중에는 민국이 저번에 주었던 털장갑이 쥐어져 있었다. 아무리 받은 거라도 해도 그래도 역시 받기만 하는 건 부담스러웠는지 서라는 곧장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뛰어갔다.
"에구구궁!"
이윽고 얼마지 않은 거리에서 휴대폰을 들고 길을 거니는 민국의 모습을 발견한 서라였다. 서라는 곧장 손을 흔들면서 '행님! 이거 가져가세유!'하고 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온니…!"
"어, 은별아. 어우 더럽게 춥네. …어? 헐, 지금 내가 장갑 안 낀 건 어떻게 알았다냐."
막 소리치려는 찰나에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민국. 그 상대가 은별임을 아는 순간 서라는 손을 흔들던 걸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쥐고 있던 털장갑을 건네주기는커녕… 즐겁게 통화를 하면서 집으로 향하는 민국의 얼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장갑 네가 안 사줘도 돼. 허허, 왜 자꾸 사주려고 한답니까? 야 강은별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난 이래봬도 비제이 중에 랭킹 1위인 현대왕으로서 돈은 얼마든지 많은… 죄송합니다. 잘난척 안 할 테니까 하나 사주세요. 아니, 은별 마님이 사주는 장갑 한 번 손에 써보고 싶습니다.
굉장히 기분 좋을 거 같네요."
굽신굽신거리는 민국은 이 순간을 굉장히 즐겁게 보내는 모양이었다. 그 즐거운 얼굴에 서라는 멈칫한 손을 서서히 내릴 수밖에 없었다. 쥐고 있던 털장갑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지만 서라는 알아채지 못했다.
"의잉…."
잠시 말없이 털장갑을 내려다보던 서라였다. 왠지 저도 모르게 씁쓸함이 피어 올랐지만….
"헤헤…."
곧 웃음을 지으면서 다시 자기 집으로 몸을 돌리는 서라였다. 그래, 이거면 됐다. 뭘 바라겠는가. 어차피 이것만으로도… 서라는 만족했다.
* *크리스마스까지 앞으로 9일. 크리스마스 당일 전날에 슈퍼 합동 방송도 준비되어 있으니 만큼, 민국은 만전을 기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김민철 이 자식은 왜 또 보자냐."
"설마 이번엔 온니찡에게 호감이 든 거 아닐까여? 알고 보니 BL남!"
"너의 모든 구멍에 딜도를 꽂아버리고 싶은 맘이 드는구나."
"히이익. 내 구멍이 몇 개였지? 하나, 둘 셋…."
"이 자식이 대체 왜 보자는 걸까. 거참."
스카이 라이프로 서라와 함께 슈퍼 합동 방송 컨텐츠를 준비 중이던 실정이었다. 막 두 사람에게 김민철이 다시 한 번 만나자고 제안하면서 스카이 라이프로 말을 건네왔었고, 이유에 대해 추궁하였지만 김민철은 만나고 난 뒤에 알려주겠다면서 말을 최대한 가렸다.
민국은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녀석의 태도로 보아 꽤 중요한 얘기인 것 같아 나가서 들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설마 진짜로 나를 타겟으로 잡은 건가 이 녀석?"
"영상 촬영해도 되나여 행님?"
"시끄럽다 네 녀석. 입속에 딜도를 꽂아버리기 전에 컨텐츠 제작에나 집중해라."
"어맛…! 파괴본능 남자! 내 취향이양!"
어찌 됐든 간에… 나가보면 알게 될 터였다. 민국은 서라와 남은 컨텐츠 준비에나 충실히 집중했다.
이윽고 다음 날, 약속했던 시간이 찾아왔다. 약속 장소는 전에 김민철과 서라가 데이트를 했던 그 장소. 시간은 오후 세 시로 김민철은 개찰구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는 실정이었는데… 이내 민국과 서라가 등장하자 가볍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서라 씨."
"이응이여. 잘 지내셨어여?"
"네. 잘 지냈습니다."
이젠 이전과는 다르게 거리낌없이 대하는 서라의 태도가 맘에 들었는지 김민철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서라의 옆에 있는 민국을 다소 진지한 눈빛으로 주시하는 김민철.
"응?"
"……."
"왜 그러냐?"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 의아함을 갖던 민국이었다. 이윽고 민국을 마주하던 김민철이 고개를 돌리면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흠…."
"일단 서라 씨. 오늘도 좋은 맛집 알아냈는데 한 번 가서 드셔보실래요? 아, 데이트하자는 건 아니에요. 서라 씨 마음은 존중하니까 부담은 드리기 싫어요."
"이, 이응! 존중해주셔서 감사해여! 좋은 맛집 추천 바래여!"
전에 김민철을 따라 갔던 그 맛집이 매우 좋았던 서라였다. 그 덕분인지 민철이 다른 맛있는 집을 추천해준다고 하니 서라는 몹시 설렐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민철이 싱긋 미소 짓더니 서라를 맛집으로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총총 뛰어가는 서라의 귀여운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민국은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이상한데.'
예감이 영 좋지는 않았다. 은별이만큼 촉이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남들보단 촉이 좋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민국은 그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 어떠세요 서라 씨? 여기는 고기 전문 집인데 고기를 정말 깔끔하게 잘해요. 비린 맛이나 그런 건 하나도 안 나고요."
"와아!"
고급스런 인테리어에 사람들도 많은 고깃집이었다. 서라는 구수한 냄새가 풍기자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에 먹는 걸 크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맛집의 일품을 한 번 느껴보고 나니 맛집에 대해서는 꽤나 강한 신뢰도를 느끼는 모습이었다.
"매우 좋을 거 같네여! 잘 먹을게여!"
"하하, 잘 먹으세요."
이윽고 점원에게 주문했던 음식이 나오자 서라는 군침이 도는 듯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민국은 체할라 서라에게 조심히 먹으라고 충고를 했고, 이윽고 민철을 돌아보았다. 민철은 민국에게 다소 진지한 눈빛으로 또다시 쳐다보고 있었다. 민국은 영문을 알 수 없단 얼굴로 대응했다.
"뭐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냐?"
"……."
슬쩍 서라를 곁눈질하는 민철. 먹는 것에 집중하는 서라를 보던 민철이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중에 얘기하자."
"흐음…."
민국은 예감이 영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