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평점 좋은 영화들이 몇 개 있는데 제가 추천해드릴 테니까 같이 보실래요 서라 씨?”
“이, 이응이여.”
맛있는 맛집에서의 식사를 끝낸 민국 일행은 포만감을 느끼면서 밖으로 나왔다.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거니는 복잡한 번화가.
그 번화가에서 영화를 대뜸 제안하는 민철의 행위에 서라는 더듬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은 중계자 역할로서 굳이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기로만 했다.
이윽고 커다란 영화관 앞에 당도한 세 사람. 민철은 영화표 두 개를 구매해서 한 개를 서라에게 주었고 나머지 한 개는 자신이 챙겼다.
“야 임마. 내껀 어디 갔어?”
“네껀 네가 뽑아.”
“허, 이런 안경 쓰고 피부에 여드름 나고 돼지 됐으면 하는 놈.”
결국 민국은 자신의 것은 자신이 챙겨야 했다. 영화 상영 시간은 빨리 찾아왔고 세 사람은 곧장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에 앉으세요 서라 씨.”
“이응.”
이윽고 서라가 민철의 옆에 앉았고, 민철은 민국을 사납게 돌아보았다. 민국은 가볍게 무시한 다음 서라의 비어 있는 옆자리로 향했다.
“네가 왜 거기 앉아?”
“죄송하지만 손님. 이 영화관 표 자리번호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영화관 표에는 서라의 옆자리로 지정되어 있음이 적혀 있었다. 민철은 혀를 내두르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이로써 서라의 오른쪽 자리에는 민철이, 왼쪽 자리에는 민국이 앉게 된 셈이었다.
‘부들부들하네여.’
이런 경우가 처음이었던 서라로선 솔직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마치 이건 뭐랄까… 어느 순정 만화에서 잘 생긴 남자 둘이 ‘이 여자는 내꺼야!’하면서 싸우는 느낌? 물론 민철은 잘 생기진 않고 그냥 평범하게 생겼지만, 그래도 조금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서라 씨. 이 영화 아주 재밌다고 소문나 있으니까 보셔도 후회 없을 거예요.”
“넹. 감사해여….”
“뭐냐 이거. 꽤 야하다는데. 너 로리한테 이런 영화를 추천해주면 어떡하냐?”
휴대폰을 뒤적거려 영화에 대한 줄거리와 리뷰를 확인하던 민국이었다. 민철이 고개를 홱 돌리면서 말했다.
“야하긴 뭐가 야해. 그런 씬 하나도 없는 거로 골랐는데. 괜히 이상한 소리해서 분위기 망치지 마라.”
“허참. 기괴하구만.”
차마 데이트를 방해하기도 뭐하니 민국은 일단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영화관이 어두워졌고 사람들의 웅성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로맨스 영화로서 이것도 역시 민철이 노린 모양이었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면 어떤 일이 있고 어떤 위기가 닥치는지 등등이 나오고 있었다.
{네가 그러고도 사내새끼니! 헤어져!}{헤어지긴 뭘 헤어져! 내게로 돌아와!}{싫어!}짝!
{악! 이년이!}
짝!
{아악! 이놈이!}
짝!
[끼이이이이익!]
서로 싸대기를 때리는 남녀의 사투 속에서 차를 이끌고 나타난 또 다른 사람…. 바로 남자의 내연녀…!!
{자기… 이 여자는 또 누구야? 또 나 몰래 바람 피웠어?!}
‘헉.’
민국은 왠지 내연녀의 대사를 듣는 순간 자신의 심장이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바람 피운 적은 없지만 서도… 왠지 은별과 예나, 그리고 자신의 관계를 떠올리면 그런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라니…! 어이없는 소리 하지마. 넌 그저 가지고 논 여자였을 뿐이야.}{뭐? 이 이런 미친 놈! 김치 싸대기로 때려 버릴 거야!}{잠깐! 모두 그만둬! …이제 진실을 밝히겠어. 사실 난 이 남자와 같은 핏줄인 친 동생이야!}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정녕 웃겨서 웃는 것일까. 아마 영화의 스토리가 굉장히 황당해서일 것이었다. 요즘 이야기가 많이 오가는 막장 요소들이 전부 첨부되어 있는 영화였으니까.
“히히!”
하지만 옆에 있는 서라는 은근히 재밌게 보는 모양이었다. 치아를 드러내면서 웃는 그녀의 모습에 민철도 자신의 의도대로 되었다는 것처럼 좋아라 했다.
민국은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다시 영화 화면으로 고개를 돌릴 따름이었다. …이윽고 2시간 상영 결과, 영화가 마무리를 짓고 사람들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민국 일행도 매한가지였다.
“서라 씨, 어떠셨어요? 재밌지 않으셨나요?”
“히히! 생각 이상으로 재밌네여! 많이 웃겼음!”
아무래도 이런 막장스러운 영화가 서라에게 적성이었던 모양이다. 웃느라 죽는 줄 알았단 표정의 서라를 보면서 민철은 다시금 뿌듯해했다.
“이제 가볍게 요기라도 하러 가는 게 어떠세요? 근처에 괜찮은 찻집 아는데.”
“네! 좋아여!”
그리고 민철을 따라서 졸레졸레 움직이는 서라였다. 그렇게 민국과 두 사람은 근처의 커피숍으로 향해서 오붓한 분위기 속에서 커피를 머금게 되었다.
‘호오, 커피 향 나쁘지 않네.’
민철이 서라에게 추천해주었던 커피를 똑같이 주문한 민국은 한 번 냄새를 맡아보면서 괜찮은 것을 느꼈다.
“벌써 날이 저물고 있네요.”
“그러게 말이에여.”
커피숍 창문을 바라보면서 민철이 하는 한 마디에 서라가 맞장구쳤다. 이젠 서라도 민철에게 어느 정도 신뢰감이 쌓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민철이 커피잔을 내려다보다가 민국을 돌아보았다.
“민국아.”
“왜 부르냐.”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와라.”
민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안 마려운데.”
“그런 거랑 상관없이 갔다 오라는 거잖아.”
아무래도 서라와 단 둘이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는 모양이었다. 민국은 어깨를 다시 한 번 으쓱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친구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한 번은 들어줘야겠지. 이윽고 서라와 눈빛을 교환한 민국이 곧장 화장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서라는 화장실로 향하는 민국의 등을 눈으로 쫓다가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서라 씨.”
“넹…?”
민철은 다소 진지한 얼굴로 서라를 마주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는 것처럼.
“전 진심이에요. 서라 씨에게 호감이 있었고, 그 호감은 지금도 충분히 있습니다.”
“…….”
“서라 씨가 절 마음에만 들어 하신다면… 저는 서라 씨를 위해서 앞으로 정말 열심히 할 자신이 있습니다. 아니, 잘할 게요 서라 씨. 그러니까 혹시 조금이라도 저에게 호감이 있으시다면….”
너무 급급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만큼 민철은 오랫동안 서라에게 얽매여왔다. 그녀가 남자라고 오해했을 때부터도 자신의 정체성을 오해하면서 매달려왔다. 서라는 말없이 간절한 표정의 민철을 쳐다보았다.
‘알아요….’
민철은 자기에게 상당히 진지했다는 걸. 그리고 그의 진지한 모습으로 볼 때 앞으로 그와 사귀게 되면 잘 대해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서라의 마음이 그에게 흔들릴 일은 조금도 없었다. 왜냐하면 서라는….
“미안해여.”
“…….”
“지금이라도 확실히 말해야 할 거 같아여.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아여.”
서라는 단호했다. 단 칼에 잘라야 할 때는 그 누구보다 날카롭게 잘랐다.
민철이 아무리 자신에게 잘 대해줄 것 같고 좋은 호감을 쌓을 수 있다 한들, 마음에 내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그녀의 빈자리에는 다른 누군가가 차 있었으니까. 민철은 냉정을 유지하려고 주먹을 쥐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게 되었다.
“왜….”
“…….”
“왜죠? 혹시 마음에 둔 다른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요?”
마음에 둔 다른 사람. 없을 리가 없다. 오히려 민철보다 서라가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있던 기간이 훨씬 길었으면 길었지, 적지는 않았다.
“글쎄여….”
“…….”
“아무튼 미안해여. 어려울 거 같아여.”
‘이제 들어가도 되겠군.’
화장실에서 나와서 문 앞에 서서 안을 바라보던 민국이었다. 민철의 실연을 당한 듯한 얼굴을 보아 이미 답은 나온 모양이었다. 민국은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커피숍으로 다시 들어왔다.
“크흠흠!”
“…….”
“대화 끝났냐? 이제 갈까?”
너무 늦으면 서라 부모님이 화를 낼 지도 모를 일이었다. 민철은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
서라는 실연을 당한 듯한 얼굴의 민철을 보면서 기분이 썩 좋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도 짝사랑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를 쫓기만 하는 사랑은 정말이지 가슴만 아플 따름이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서라는 더욱 완고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민철이 더 이상 가슴 아파 힘들어 할 일이 없도록.
“갑시다여! 헤헤.”
혹시라도 위로가 될까 어떻게든 웃음을 보이면서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는 서라였다. 그런 서라의 노력을 민국은 알았는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을 따름이었다. 민철도 얼마지 않아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짐짓 웃음 아닌 웃음을 지으면서 커피숍을 빠져 나왔다.
“그럼… 오늘 감사했습니다.”
“아니에여… 재밌었어여 정말로.”
재밌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 민철은 여자를 배려하면서 잘 에스코트 해주었으니까. 민국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민철에게 더 이상 어떠한 장난도 치지 않았다. 이윽고 민철이 서라 옆에 있는 민국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서라 씨 잘 데려다줘라….”
“그래. 너도 일찍 집에 들어가.”
물론 일찍 집에 들어가기는커녕 실연의 아픔에 술을 엄청 마실 것 같았지만. 그래도 민철이 성격상 자신을 찼던 여자를 엄청 증오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적어도 그런 찌질함은 없었기에 민국도 그와 친구를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가자 서라야.”
“…이응.”
이윽고 민국의 말에 천천히 몸을 돌리는 서라였다. 몸을 돌리던 와중에 이따금씩 풀 죽어 있는 민철의 안색을 곁눈질하는 서라였지만, 별 수 있으랴…. 자꾸 마음에 남아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리라.
이윽고 민국이 흔들려하는 서라의 등을 토닥인 다음에 몸을 돌리게 했다. 그리고 천천히 서라와 함께 길을 거닐면서 번잡한 번화가를 이동하는 민국이었다. 민철은 두 사람 가는 길에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지켜보기만 했다.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충분히 민철에게 기회는 있었고, 그 기회를 최대한 잘 활용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것은 결국….
‘나는 아니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단순히 자신이 아니라서 거절했다기 보단, 마치 누군가가 마음에 있어서 거절한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민철은 과연 그 사람이 누구일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내 내렸던 고개를 재차 들어 올려 두 사람이 가는 길을 쫓던 민철이었다.
“…….”
저도 모르게 민철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그것은 몰라야 했던, 차라리 몰랐으면 나았을 법한 진실이었다.
“그래도 민철이 녀석 너 많이 좋아했었나 보다. 어지간히 실망했나 보네.”
“의잉… 조금 걱정되네여.”
“걱정은 무슨. 이놈아, 그래도 네 짝이 아니다 싶으면 단 칼에 거절하는 게 오히려 덜 상처를 주고 현명한 거야. 고로 넌 잘한 거고.”
“헤헤… 그, 그런가여?”
기특하다는 것처럼 서라의 머리를 쓰다듬는 민국. 그런 민국의 손길을 받는 서라는 웃음 지을 따름이었다.
“아….”
두 사람의 대화가 귀에 들려오진 않았다. 하지만 서라의 그 미소를 목도하는 순간 민철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미소가 정작 자신에게 보였던 미소하고는 너무나도 차이가 났던 것이다.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서라가 누굴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미소가 누굴 겨냥해 있는지….
“…….”
모르는 게 나았으면 좋겠다 싶을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