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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65화 (265/369)

265화

확실히 끝까지 거절을 표명하기도 뭐한 것이, 몇 개월간 서라가 남자인 줄 알고 짝사랑을 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진심으로 고뇌를 했던 민철이었으니까 말이다. 비록 민철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 한들, 꼭 한 번 만나달라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다소 뭐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녀석과 단 둘이 만나는 걸 호락호락 지켜볼 내가 아니지.’

상대는 자신의 친구, 김민철이다. 본래 친구는 끼리끼리 만나는 게 특성인지라 민철은 민국과는 다르게 겉으로는 변태스러운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해도, 실은 내면이 무지막지하게 변태스러울 지도 모를 일이었다. 민국은 차후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데이트 날짜와 약속 장소를 아주 정확하게 파악해두기로 다짐했다.

“아니다. 이참에 나도 같이 만나자.”

“읭? 온니찡도 같이여?”

“훗, 내가 중계자인 것처럼 끼는 것이지. 실상은 그 녀석의 아청 범죄를 막는 역할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친구의 신뢰도 지킬 수 있고 친근한 여동생의 처녀막도 지켜줄 수 있는 민국의 해결책! 그것에 서라도 나름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기사 민국을 제외한 연상의 남자는 지금껏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까.

“왜 서라 씨랑 내가 만나는데 네가 끼는데.”

“중계자 역할이다 인마. 네가 변태 짓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방패막이 역할이 되어주려는 거지.”

“꺼져라. 중계자 역할은커녕 만남에 방해만 될 거 같으니까. 그리고 난 너처럼 공과 사 구분 못하는 놈이 아니다.”

“남자들 중에 오빠만 믿어라고 말하는 놈들치고 모텔에 단 둘이 있을 때 안 덮치는 놈이 있었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논리 정연한 민국의 의견이었다. 이윽고 민국의 말에 혀를 내밀던 쿠왁, 김민철이 서라에게 물었다.

“서라 씨. 정말 저 녀석도 같이 껴야하는 건가요?”

“읭….”

자신에게 일정 이상 치의 호감을 가진 남자를 대하는 것엔 많이 거리낌이 있던 서라였다. 침묵은 곧 긍정의 표시. 민철도 아예 눈치가 없는 남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서라가 대충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쳇….”

“훗, 결정되었군.”

고로 민국, 김민철, 서라가 함께 하는 3인 데이트가 되게 되었다. 아니, 민국은 중계자로서 두 사람의 데이트를 방관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민철이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역할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어차피 서라가 민철을 받아줄 가능성도 없고.’

적은 게 아니라 아예 없다. 마음이 없으면 그걸로 끝인 것이 바로 서라였으니까. 그래서 민국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동생이 이상한 친구 녀석에게 인생이 베이진 않겠구나! 라는 걱정.

“그럼 약속 날짜와 약속 시간을 정합시다.”

“혹시 크리스마스 때 가능하신가요 서라 씨.”

“읭… 그땐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아여.”

앞으로 한 주 더하기 며칠 뒤인 크리스마스에 데이트 약속을 잡아보려던 민철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그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을 잡았던 서라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는 민국도 은별이랑 예나와 약속이 있었으니까.

“나도 그땐 안 된다.”

“넌 필요 없고.”

“이 자식이? 중계자 역할인 놈을 필요 없다고 하네. 레슬링 볼 때도 심판 필요 없다고 해라.”

여전히 서라가 여자인 걸 안 밝혔단 사실에 민국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민철이었다. 하지만 별 수 있으랴? 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는 것인데. 이윽고 민국이 괜찮은 날짜를 짚어서 말했다. 이틀 뒤인 일요일이었다.

“이틀 뒤 빨간 날인 일요일 어떠냐 서라야?”

“옹… 지는 그때 괜찮을 듯.”

“서라가 괜찮다는데 민철이 넌 어떻게 생각하냐.”

“나도 서라 씨가 괜찮다면야.”

‘와 이놈 보소. 개매너네.’

모든 걸 서라에게 맞추려고 한다. 물론 정말로 여자를 좋아하면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마냥 맞춰주는 것도 결코 좋다고는 보이지 못했다. 이윽고 약속 장소를 잡은 중계자 역할의 민국이 스카이 라이프의 두 사람 아이디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약속 날 봅시다.”

* *

약속 날짜가 찾아왔고 민국은 서라의 집에 잠깐 방문했다. 중계자 역할로서 남자에 대한 조심성을 하나 하나 알려주기 위함이었는데.

“너 왜 이렇게 예쁘게 입었냐? 설마 진심으로 민철이랑 어떻게 해볼 생각이냐?”

“온니찡. 나님이 진심이 아니라 해도 상대방의 진심은 무시할 수 없는 거잖음.”

그 물음에는 진지하게 대답한 서라였다. 아무리 서라가 민철에게 호감이 없다고 해도, 민철이 서라에게 일정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용기를 내서 데이트를 제안했다면 서라도 그 제안을 승낙한 사람이니 만큼 어느 정도는 꾸미는 게 예의의 철칙이었다.

“뭐 그래도 노출이 없는 거니 걱정은 안한다만.”

“짧은 치마 입고 갈까여?”

“옛끼, 나부터 훔쳐본다.”

민국의 말에 키득키득 웃던 서라였다. 이윽고 약속했던 시간이 다 됐음을 확인한 서라와 민국이 집을 빠져 나왔다. 두 사람은 가는 동안 민철이 어떤 데이트를 준비했을 지에 대해 가볍게 의논했다. 물론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으로는… 아마도 민철의 사귐을 받아주긴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였다.

“애초에 지는 아직 로리 아이라서 성인을 상대로 으쌰으쌰할 자신이 없네여. 열쇠의 사이즈가 아직 지에겐 들어맞지 않을 거 같아여.”

“이 지하철 안에서 그런 드립을 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성인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단 뜻이야. 어떠냐, 정 뭐하면 나의 열쇠에 꽂혀보는 게.”

“으악! 열쇠도 여러 개의 문을 왔다리갔다리하면 녹이 스는 거 모르시나여? 녹슨 열쇠로 내 열쇠 구멍도 열려고 하시다니 너무하네여!”

“이 자식… 시간이 지날수록 나보다 성드립이 뛰어나지고 있군. 대단한 재능이야.”

그렇게 특출 난 만담을 나누던 두 사람이었다. 이윽고 약속했던 역에 도착한 민국과 서라. 곧장 내려서 약속했던 장소인 개찰구로 향했을 때였다.

“어서 오십시오 서라 씨.”

“…….”

“허, 이런 정신 나간 놈.”

“뭐. 넌 좀 다물어.”

개찰구에는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검은 양복을 쫙 빼입은 김민철이 서서 꽃을 들고 있었다. 그것도 장미 한 개였는데… 서라가 당도하자마자 곧장 그녀에게 조심스레 건네는 모습이었다. 서라는 김민철의 노골적인 대시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일단 더듬거리면서 그 장미를 받았다.

“가, 감사함여.”

“천만합니다… 서라 씨는 오늘도 예쁘시네요. 눈이 정말 부신 거 같습니다.”

“눈부시면 안과 가라. 눈에 문제 있는 거다.”

“중계자 놈이 왜 자꾸 끼어들어.”

둘 사이에 끼어드는 민국에게 한마디 하는 민철이었다. 민국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냥 지켜보기나 하자고 생각했다. 이윽고 추운 겨울에 걸맞지 않게 검은 양복의 민철이 서라를 안내했다.

“따라오십시오 서라 씨. 제가 맛있는 맛집 한 곳 알아두었습니다. 음식 맛도 기가 막히고 서비스도 좋으니 가보시면 아쉬울 게 없을 겁니다.”

“이, 이응이응. 따라갈게여.”

민철을 따라가는 서라는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함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서라는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녀는 주변 이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을 뿐, 차마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강한 부담감을 주는 타입이었다. 그냥 적당히 예쁘게 생긴 것도 아니고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뛸 정도니…. 그래서 서라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남자에게 노골적 대시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살다 살다 처음으로 김민철에게 대시를 받게 된 것이다.

‘이 녀석 진심이긴 한가 보네.’

민국은 민철의 언행을 보면서 진심이란 건 확신했다. 애초에 민철은 그냥 평범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민국에 비하면 외적으로 나은 것은 없었으나,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이 생기면 끝까지 그 사람만 보려고 하는 일편단심 요소가 짙었다. 어느 누구에게든 쉽게 꽂힌다는 게 문제지만…. 꽂힌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눈을 돌리지 않으니, 민국도 그런 부분에선 사실 민철을 믿을 수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윽고 민철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게 된 맛집. 평범하게 생긴 민철의 뒤를 이어 예쁘장한 서라와 잘 생긴 민국이 들어가자 당연지사 점원들의 눈이 동그라진다. 민철은 이미 자리를 잡아두었던 테이블로 안내하여 맞은편에 서라를 앉히고는 말했다.

“서라 씨가 하도 예뻐서 점원들이 다 쳐다 보네요.”

“헤, 헤헤….”

“내숭떨지 않는 그 솔직한 모습도 정말 일품입니다.”

이거 이거, 뭐만하면 곧잘 칭찬이다. 하트가 뿅뿅 달린 민철의 눈만 봐도 답이 나왔다. 민국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서라의 옆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민철이 말했다.

“네가 왜 서라 씨 옆에 앉아?”

“항상 이렇게 앉았으니 앉으려는데 왜 그런다냐?”

“오늘은 내 옆에 앉아라. 서라 씨랑 내가 함께 하는 자리잖아.”

“에라이, 기승전결에서 위기에 다다랐을 때 한 번 튀어나와서 절정을 조성해줄 일개 엑스트라 같은 놈이.”

궁시렁거리면서 민철의 옆에 앉는 민국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친구 녀석이 열심히 하는 것이었으니… 그냥 지켜봐주는 게 도리겠지. 이윽고 맞은편에 민국이 앉자 서라가 잠시 양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민철이 미소를 지으면서 점원이 가져다준 음식표를 보여준다.

“뭐 드실래요 서라 씨? 여기 추천하는 음식들 있는데 다들 굉장히 맛있습니다. 꼭 한 번 드셔보셔도 나쁘지 않아요.”

“어, 음, 음! 으으으음!”

“하하~ 고민하시는 모습도 정말 귀여우세요. 그럼 이거 한 번 드셔보는 거 어떨까요? 생선 구이인데 이 생선은….”

아주 오목조목 생각했던 루트대로 진행하는 민철이었다. 그런 민철의 리드에 서라는 서서히 집중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실로 열심히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그냥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이걸로 할게여.”

“그래요? 잘 고르셨어요 서라 씨.”

“넹….”

이윽고 음식을 주문했고, 민철의 가벼운 담소와 함께 시간이 흘렀다. 얼마지 않아 주문했던 음식이 대령됨과 동시에 민철은 기다렸다는 듯 젓가락과 수저를 건네주며 말했다.

“한 번 드셔 보세요 서라 씨.”

“넹….”

이윽고 건네주는 젓가락을 들어 그 구이를 천천히 집어보는 서라였다. 처음 먹어보는 구이였기에 조금 심심치 않게 쳐다보는가 싶더니 한 입에 머금는다.

“엇!”

“맛있지요?”

의외로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녹는 그 맛에 서라가 놀라면서 고개를 두 번 끄덕인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미소 짓던 민철이 말했다.

“여기에 이 고추장이랑 같이 찍어 먹으면 또 맛이 달라요. 한 번 먹어보세요.”

“넹!”

음식 맛에 빠져들었는지 서라는 슬슬 구이에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짓는 민철. 그리고 중계자 역할로서 뒤통수에 두 손을 올리고 이를 지켜보는 민국. 구이에 헌신을 다하는 서라와 지켜보면서 뿌듯해하는 민철을 번갈아 쳐다보던 민국은 생각했다.

‘열심히 하네. 서라도 경계가 좀 풀린 거 같고.’

하지만 민국은 별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루 아침 사이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길 만큼 서라는 덜렁대는 타입이 아니었고, 민철이랑 사귄다 한들 항상 그의 여자 친구들은 끝이 안 좋았기 때문에… 사귄다 해도 민국이 끝까지 말릴 생각이었으니까.

‘열심히 해라 인마.’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를 지켜보는 민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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