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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59화 (259/369)

259화

철도가 눈으로 얼어붙어 잠시 전철 운행이 중지되었다. 고로 본래라면 집에 도착했을 마당에 민국은 서라를 데려다주고 전철역에서 한참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흠, 그냥 택시 타는 게 나으려나.’

하지만 택시를 타도 겨울이라서 많이 미끄러울 터였다. 때문에 결국엔 늦게 집에 도착할 건 불보듯뻔할 번자. 그렇다고 밤늦게 서라를 혼자 가게끔 할 정도로 민국은 사람 노릇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서라처럼 예쁜 아이라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가능한 실정이었기 때문에 민국은 항상 정성스레 조심히 여겨주는 것이었다. 우우우웅.

“앵?”

그때였다. 돌연 울린 휴대폰에 액정을 바라보던 민국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상황에서 결코 연락이 올 리 전무했던 사람이기 때문도 했다. 애초에 사정을 대충 얘기하고 민국이 알아서 잘 해결하기로 했기도 했고 말이다. 이윽고 민국이 연락을 받았다.

“예, 어무이.”

“민국이냐.”

“네. 전데요. 왜 전화하셨어요?”

어무이의 급작스런 전화 통화. 아까 전만 해도 해영이는 알아서 자신이 잘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던 민국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신 것일까.

“그냥 나도 네 집으로 가려고 전화했단다.”

“예?”

“해영이 고놈 기집에 이제 보니까 기말고사 성적표 들킬까봐 도망간 거더라.”

“허허.”

드디어 해영이가 왜 갑작스레 민국의 집에 찾아온 것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해영이는 민국과는 다르게 어지간히 공부를 못했다.

사실 못한다기 보단 안한다는 것에 가까웠다. 하찮은 인간들이 만든 주입식 교육에 얽매일 만큼 자신은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고 했던가…. 그러나 나약한 존재는 둘째치고 어머니에게 맴매 맞는 건 실로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내가 가서 고놈 데리고 갈 테니까 이제 안심해도 돼. 너 집에 있지?”

“아… 지금은 집에서 잠시 나왔는데 어디쯤이세요?”

민국은 어차피 오시려면 한 시간은 걸릴 테니까 사전에 예나에게 연락을 해두자고 생각했다. 예나는 이미 민국의 부모님과 몇 번 조우한 적이 있기 때문에 크게 어색해할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었다. 워낙 예나도 민국의 부모님에게 좋은 이미지를 받고 있다 보니….

“한 30분이면 도착하겠구나.”

“예? 왜 이렇게 빨리 오십니까?”

“안 그래도 눈 펑펑 내리는데 더 늦으면 못 돌아갈까봐 서둘러 출발했단다. 왜, 내가 빨리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냐?”

“어… 허허, 그건 아닙니다만. 아무튼 알겠습니다. 도착하시는데로 연락 주십쇼. 저도 서둘러 갈 테니까요.”

“그래 알았다.”

그리고 연락이 뚝 끊겼다. 민국은 서둘러 예나에게 연락을 하려고 들었다.

아무리 구면이긴 해도 예나도 그래도 민국의 부모님을 맞이하는 것이니 만큼 최대한 단정스럽게 있는 게 나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민국의 부모님만 모를 뿐 민국이랑 예나는 이제 일반 소꿉친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그럼 예나에게 전화를 해서.’

그렇게 전화를 하려고 막 준비하던 찰나였다. 어디선가 민국에게 다가온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기….”

“예?”

“혹시 괜찮으시면 번호 좀….”

막 예나의 전화번호를 뒤적여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나타난 누군가…. 바로 민국의 뛰어난 비쥬얼을 멀리서 지켜보며 하트 뿅뿅 세레를 날리던 여고생 중 한 명이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모습으로 떨리는 눈망울을 그리고 민국을 올려다보는 그 모습은… 이미 사랑에 흠뻑 빠진 청춘의 여고생을 연상시켰다.

“저, 저도요!”

“저도 저도!”

여고생 한 명이 먼저 용기를 내서 민국에게 접근하자, 다른 여고생들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민국에게 불붙듯이 달라붙는 무수한 여고생들이었다. 민국은 예나에게 전화를 하려던 것도 잠시 멈추고, 그 여고생들을 상대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한 편 그 시각, 은별은….

“세기의 마녀에게 당한 느낌은 어떻지! 히, 히히… 히히히히히! 죽음을 맞이하는 고통과도 가, 같은가?!”

몹시 붉어진 얼굴로 은별은 창피함을 무릎쓰며 그리 연기했다. 중2병이 아닌 사람이 중2병을 연기하는 건 정말이지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발가벗고 춤추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어마무지한 창피함에 금방에라도 도망가고 싶은 맘을 꾹 억누르며 은별은 정면의 한 소녀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은별의 호통에 부들부들 떨던 중2 소녀… 서해영.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서서히 서해영은 집중하는 눈빛으로 은별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은별은 거의 다 넘어왔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건 우리의 계획대로…! 지하 세계의 성스러운 사랑도 우정도 더 이상 우리를 막을 순 엄다!”

‘혀 깨물었어!’

스스로 말하면서도 창피함에 그만 혀를 깨물고 말았다. 혀의 얼얼한 고통을 참으면서 은별은 굳건한 모습으로 당면의 소녀를 보았다. 과연 넘어올 것인가… 넘어오지 않을 것인가… 은별은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이를 구경하였다. 그런데 그 찰나였을까. 휘익!

“…….”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하던 순수한 눈동자가 어느 순간 정의로움을 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용감함을 가진 정의의 용사가 사도를 무찌르기 위한 모습 같았다.

“네 녀석 뜻대로 되게끔 하진 않겠다! 엑스카리오저르버으져!”

“…하, 하하… 하하하하! 감히 너, 너 같은 인간 따위가! 이… 에, 엑스? 카리…오저르버으뎌?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하, 꺄, 꺄하하핫!”

엑스카리오저르버으져. 무슨 뜻인지도 모를뿐더러 아는 사람이 있을 리도 전무했다. 한 글자에서 실수를 하고만 은별이었지만 그래도 용케 한 번 알아듣고 금방 따라한 자신이 대견스럽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이윽고 은별의 용기 있는 연기에 손을 촥촥 두 어번 긋더니 소리치는 서해영.

“하늘의 맹세여 주름의 오메이나여 황혼은 대지를 이끌고 신의 심판에 이르러 우리를 참패에 이르노니… 세계의 급마왕 부류소너오페노의 힘을 깃들여 지금 내가 여기 서 있다. 그것은 악을 향한 쇠사슬. 쇠사슬을 향한 금빛의 지옥. 흩날리는 버스터 브렉지오스테피션!”

“끄, 끄앗? …꺄핫! 어 어림없다!”

두 손을 둥글게 말아 모았다가 발사하는 것처럼 자세를 취하는 그 모습에 은별이 골반에 양손을 얹고 어색한 폭소를 내뱉는다. 하지만 무언가가 문제였던 것일까.

“…….”

해영은 더 이상의 연기는 멈추고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얼굴을 하였다. 은별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참동안 알 수가 없어 이도저도 못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자신의 리액션이 너무 소홀했다는 것을 느꼈는지….

“아… 니! 꺄아아아앗!”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비명을 지르던 은별이 과도하게 리액션을 하면서 두 발을 뒤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쿵! 하고 안방문에 등을 부딪히면서 한 쪽 무릎을 꿇고 천천히 주르륵… 몸을 숙이게 되었다.

“으으으으….”

“…….”

그 모습에 서해영은 기다렸다는 듯 다음 연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 *

“시험 본 지가 언젠데 성적표 나왔냐고 해도 끝까지 안 나왔다고 뻐팅기더만. 다 이유가 있었네. 해영이 이 녀석. 내 올라가면 가만두나 봐라. 어디 열심히 공부하는 오빠 집에 말없이 찾아가서는. 에구구, 다리야. 나도 늙긴 늙었네.”

계단을 오르던 도중 허리가 아팠는지 두들기는 민국 어머니였다. 민국 어머니는 어느 덧 민국의 집에 도착하여 계단을 천천히 오르고 있었는데, 성적표가 나왔단 사실도 말하지 않고 도주해버린 해영이를 혼쭐낼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정작 이런 민국 어머니의 자취를 해영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게 함정이리라.

“후우, 후우! 에구구구.”

거칠게 숨결을 내쉬면서 계단을 거의 다 올라왔을 때였다. 너무나 많은 계단에 잠시 근처에서 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휘이이이잉! 흩날리는 바람의 폭포수! 이 바람의 폭포수는 대지의 카타르시나를 기어이 이어받아 황혼의 추억을 가진 악마의 새싹! 새싹은 무너진 황혼의 처량한 하늘처럼 빛나는 보랏빛 물결을 뿜내는 것이 세상의 철칙! 그 이치에 맞는 이 폭포수는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카타르나의 마법!”

“…꺄핫! 감히 그따위 카, 카타르시나 같은 마법으로 나를 대적하려고 해? 어림도 없어!”

“이게 뭔 개소리래.”

미세하지만 아주 정확한 두 사람의 목소리에 민국 어머니는 뭔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 사람의 목소리가 유독 익숙함이 느껴지자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해영이 너어!”

이윽고 추운 겨울철임에도 불구하고 춥지도 않은지, 잔뜩 흥분된 얼굴로 두 소매를 걷고 나머지 계단을 척척 오르기 시작하는 민국 어머니였다. 이윽고 닫혀 있는 현관문으로 당당하게 다가간 민국 어머니가 그 문을 열어젖히고 내부로 발길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꺄핫! 시, 신의 괴도가 나를 이기는 건 절대 무리인 셈이지! 정의는 내 앞에서 항상 무릎 꿇을 수밖에 없어!”

“그것은 결정되지 않은 사항일 뿐… 촉발되는 푸른 빛과 검은 혼돈이 하나가 되어 합체를 이룩할 때 세상의 무쌍은 버릇이 되어 신촉을 나아내는 법… 그리고 그것은 나를 사랑한 모든 동료들의 우정과 힘이 있어서 이룩해낼 수 있는 절호의 결정체!”

“그, 그딴 동료들의 우정에 이 내가 쓰러질 거라고 생각해? 어림도 없지!”

“흡! 파이어올드액스월드비전 코넥션! 오리지엔티나 디스플로잉 체크윙!”

“어림도 없… 엇? 꺄아아앗! 이, 이건 말도 안 돼애애애~!”

안방에서 뭔가 시원찮은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유아용 액션만화에서나 들릴 법한 소리들이었다.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안방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오버 액션을 과하게 시도하듯, 안방에서 나온 한 성숙한 여자애는 일부러 자기 몸을 뒹굴뒹굴 원형으로 돌아대면서 나왔다.

“꺄아아아아아~.”

“…….”

“꺄아아아아아아~ 몸이 타들어가 꺄아아아아~.”

정말로 몸이 타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단말마 같은 비명소리가 연이어 퍼지던 끝에 그녀가 마침내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천장을 보던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이제 눈만 감으면 끝이겠지?’

무려 30분 동안 처절한 연기를 해준 은별이었다. 이쯤이면 이제 순순히 아이도 납득하지 않을까… 은별은 생각했다. 그녀 딴에선 정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임해준 연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바지에 이르러 악당이 영웅에게 죽는 연기를 하기 위해 눈을 감으려는 찰나.

“…….”

“…….”

옆으로 떨군 고개가 누군가를 발견했다. 더불어 눈도 마주치고 말았다.

“…….”

“…….”

그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나이로 추정컨대 한 마흔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그리고 어쩐지… 은별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뭔가 정신병원 수석환자를 보는 듯한 느낌인 게….

“대지의 사이온티….”

막 운을 띄우면서 안방에서 폼생폼사로 나오던 해영이었다. 못 볼 사람을 본 것마냥 말미를 흐리면서 굳어버리는 얼굴. 은별을 쳐다보던 그 어이없는 눈빛이 이내 해영이를 향한다. 해영이의 얼굴은 공포에 점철되었고, 반대로 그 어이없는 눈빛은 표독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서.해.영!”

“어, 어, 어, 엄, 엄.”

차마 말도 못하고 더듬거리기만 하던 해영이. 은별은 드러누운 채로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얼추 감도 못 잡는 실정에… 민국 어머니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와 저벅저벅 해영이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해영이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윽박 지른다.

“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성적표는 왜 숨겼어! 어!”

“으아아아아아앙!”

“울면 다야! …넌 오늘 엄마한테 아주 혼쭐 날 줄 알아!”

“……?!”

‘엄마.’라는 단어가 은별의 뇌리 속에 박혔다. 동시에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버리는 은별. 이윽고 울기 시작하는 해영이의 손목을 끌어잡고 현관으로 향하던 민국 어머니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민국의 집에 있어 추궁을 할 만도 했으나… 왠지 해영이와 이렇게 노는 것을 보면 그녀도 정상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민국 어머니는 일단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수고하세요.”

“…아, 네….”

고개를 끄덕이는 은별. 쿵 닫히는 현관문. 동시에 민국의 집에 혼자 남게 된 은별. …그와 더불어 무수한 글자들이 은별의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한다. 엄마… 해영… 민국… 엄마… 해영… 민국….

‘…민국이 어머니?’

그리고 마침내 그 퍼즐들이 조각을 맞추었을 때 드리운 진실에… 은별은 아연실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더불어….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폐 속의 모든 숨을 내뱉듯이, 엄청난 비명 소리가 민국의 집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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