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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58화 (258/369)

258화

이제 서해영의 중2병 상대는 서라에게 책임이 전가되었다. 서라는 어쩌다 보니 의도치 않게 민국의 동생 서해영과 중2병 배틀을 벌이게 되었다.

진짜 중2병과 컨셉 중2병의 어마무지한 싸움. 그러나 서라도 선천적으로 특이한 타입에 속했기 때문에 결코 중2병 싸움에 쉽게 패배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경과했을까…. 서해영과의 배틀을 끝마친 서라가 민국과 은별이 있는 안방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예나가 다시금 서해영을 돌보러 거실로 나간 찰나 민국이 서라에게 질문했다.

"내 여동생의 파워가 어떠냐."

"……."

아무런 말도 없는 서라였다. 어깨도 축 늘어진 게 어쩐지 기운이 상당히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기운이 빠지는 것은 둘째치고, 다른 문제가 있었다.

"오그리 토그리!"

"……."

"으아아 행님! 시공간이 초월해서 내 두 발이 오징어가 될 거 같아여! 어쩜 이미 오징어가 되버린 건 아니겠져? 으아아악!"

더 이상의 오그라듬을 견디지 못하고 민국의 안방 바닥에 뒹굴뒹굴 구르기 시작하는 서라였다. 중2병 배틀을 벌이면서 어지간히 오글거렸는지 서라는 근질근질한 몸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긁을 정도였다. 그 맘을 열배 천배 이해하던 민국이 고개를 엄숙하게 끄덕였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오징어가 존재하지. 첫 째는 원빈을 보고 난 뒤 옆의 남자를 보게 되었을 때 생기는 오징어. 둘 째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중2병에 생기는 오징어. 네놈은 한 시간 동안 두 번째 오징어가 되어 중2병 동생과 싸워준 셈이다. 장하다 인석아."

"으아아… 내 손과 발이 오징어처럼 보여여… 부디 착시현상이길 바래여…."

천장을 보면서 손과 발을 들고 해롱해롱거리는 강서라. 어지간히 힘든 싸움이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민국이 사전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약이 담긴 병을 건네주었다.

"옛다, 받아라. 퀘스트 완료의 보상 아이템이다."

"의도치 않게 퀘스트를 깨게 되었네여. 원래 무료 보상 아이템으로 알고 있는뎀."

"또 다른 보상으로는 나의 딥키스를 받을 수 있지. 어떠냐, 받고 싶냐?"

"히이익! 잠에 든 백설공주조차 죽게 만든다는 저주의 키스!"

서라가 경기를 일으킬 듯한 과장된 리액션을 선보이는 가운데, 은별은 그런 민국의 가슴팍을 손등으로 툭툭 건드리면서 말했다.

"…아주 애인 있는 곳에서 좋은 짓하고 있지?"

"훗, 질투나오 낭자여?"

"질투는 무슨 얼어죽을 질투야!"

어찌 됐든 간에,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벌써 날도 저물고 있었고, 예나랑 은별도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 말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서라를 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너 이렇게 어두운데 혼자 돌아갈 수 있냐?"

"이응이응. 행님, 지는 이래봬도 행님의 여동생인 마법사와 한 판 붙은 사람이에여!"

"네 다음 중2병. 은별아. 서라 집에 배웅하고 와도 되지?"

은별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팔짱을 끼고 서라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래. 아무래도 너 혼자 가게 하는 건 나도 걱정될 거 같아."

"히잉, 츤츤고딩 찡도 내 능력을 과소평가하시다닝…."

그래도 은별 입장에서는 서라가 귀여운 동생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얄미운 짓을 해도 민국처럼 무조건 얄밉기만 한 게 아니었고, 배려를 하고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리액션을 돋보여주는 게 은별이의 눈에도 보였으니까.

"좋아. 그럼 예나에게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해영이 부탁하고."

차마 은별이는 따르지 않는 해영이었기에, 예나에게 더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서라를 집까지 배웅해줄 채비를 마친 민국은 예나에게 자초지종 사정을 얘기해주었다. 예나는 편한 마음으로 다녀오라면서 해영이를 돌보는데 성심껏이었다. 민국은 자신의 동생, 해영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너 예나 너무 골치 아프게 만들지 마 인석아.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사륜의 번개여. 하늘을 날아올라…."

"에라이."

"낑."

꿀빰을 날릴 자세를 취하자 곧장 양손으로 머리 정수리를 가드하면서 몸을 숙이는 해영이었다. 예나의 품에 숨어서 민국을 피하려는 그 모습에 예나는 귀여운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민국의 옆으로 다가오는 서라. 이윽고 예나가 민국을 올려다보면서 말한다.

"잘 다녀와 민국아."

"그래. 빨리 갔다 올게 예나야."

다음 타자로 서라를 돌아보는 예나. 서라는 예나와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얘기를 못 나눴음에 운을 띄었다.

"부드러운 현모양처 언니찡은 언제 봐도 현모현모하네여!"

"고마워… 서라야."

부드러운 눈웃음. 예나 역시도 서라에게 상당히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은별에게 갔다 오겠다며 손을 흔든 민국이 서라를 데리고 곧장 집을 빠져 나간다. 안방에 혼자 남은 은별은 여전히 해영이와 오붓한 사이를 만들고 있는 예나를 보다가 방문을 닫았다.

"…하아."

침대에 걸터앉으면서 한숨을 내쉬는 은별이었다.

'뭐가 그렇게 거부감이 드는 거지? 내가 서민국에게 했던 짓 때문에?'

하지만 그건 민국이가 엄연히 이상한 성드립을 쳐서 은별이가 보복을 한 것뿐이었다. 해영이는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한 것이다.

"…나도 잘 돌볼 수 있는데."

궁시렁궁시렁거리던 은별이었다. 그때 급한 걸음이 들려온다. 걸음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은별. 이윽고 안방 문이 열어젖혀지면서 예나가 급급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

은별은 당연지사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왜 그러냐고 질문을 던지려는데 예나가 먼저 운을 띄었다.

"집에서 전화가 왔어요…. 아무래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요."

"……."

수중에 거머쥔 휴대폰을 들어보이는 예나. 계속해서 휴대전화가 울리고 있는 게, 아무래도 굳게 닫혀 있는 예나의 방문을 몇 번 두들겨본 가족이 이상하다 느끼고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은별은 순간 안색이 창백해질 수밖에 없었다. 말을 더듬으면서 예나에게 소리치는 은별이었다.

"그, 그럼 나보고 맡으라고?!"

"어쩔 수 없어요… 저도 민국이가 올 때까지 돌보고 싶지만…."

해영이를 보면서 걱정하는 눈빛을 짓는 예나였다. 해영이도 중요했지만 결과적으로 마법의 원형 통로를 들키지 않는 게 한층 더 중요했다.

집에서 나갔던 흔적도 없던 예나가 밖에 나갔다고 말을 한들 들킬 게 자명했고, 빨리 돌아가서 자다가 일어났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치는 게 좋았다. 계속해서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예나가 결국은 소리쳤다.

"아무튼… 민국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빨리 가야만 해요."

"자, 잠깐만! 대체 나보고 어쩔…."

"미안해 해영아… 더 같이 못 놀아줘서."

그리고 거실의 앉아있는 해영이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예나였다. 해영이도 예나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다소 깨달은 듯 내심 불안한 눈빛을 지었다. 하지만 별 수 있으랴? 예나에게도 예나만의 문제가 있었는데…. 예나는 해영이를 은별이가 있는 안방으로 밀어넣은 다음 안방문을 굳게 닫았다.

쿵! 그리고 잽싼 걸음으로 원형 통로로 몸을 기어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

"……."

이리하여 단 둘이 남게 된 상황. 안방에 남게 된 단 둘. 강은별과 서해영.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고, 은별이도 막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보고 어떡하란 말야!'

그래도 이 패닉 속에서 어떻게든 해결책을 강구하는 게 은별의 기본 마인드였다. 비록 여동생도 없고 어떻게 어린 애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잘 몰랐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은별은 천천히 해영이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지탱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은별과 눈을 마주친 해영이 순간 흠칫거린다.

"악마의 칼이여. 신선함에 무릎 꿇고 성수의 빛을 이어받아 몸이 녹아버려라."

"……."

"파이오브제스틱션!"

주머니 속에 있던 무언가를 은별에게 던진다. 먹고 난 사탕의 봉지였다. 은별은 그것이 자기 면면에 날아오다가 하염없이 바닥에 추락함에 말없이 사탕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해영이를 달래려고 한다.

"음… 해영아? 조금만 기다리면 너네 오빠 올 테니까 침대에 걸터앉아서 기다리면…."

바람 같이 옷깃을 휘날리면서 해영은 소리쳤다.

"다물어라 마녀!"

"마, 마녀?"

은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해영은 말을 이어간다.

"악독한 마녀의 수법에 걸릴 만큼 포악한 검, 칼나의초이로제는 약하지 않다. 받아라 파이널판타지 오리조엑시젼!"

"…그러니까 해영아. 조금만 기다리면…."

"라르코엔시널 파이널로젠!"

"조금만 기다리면 너네 오빠가 와서…."

"로젠오리코노 스바프!"

"너네 오…."

"파이널로젠트로엔타이오…."

"조용히 좀 해!"

"히잉!"

결국 말도 안 듣고 계속해서 정신없이 손짓을 하는 모습에 울컥한 은별이 핍박했다. 그러자 금방 주눅이 들어서 울상을 짓는 서해영. 뒤늦게서야 은별도 자신이 실수했음을 자각하고 '아!'하면서 탄성을 지으면서 입가에 손을 올렸다.

"해영아! 그러니까 이건…."

"히이이잉!"

뒤늦게 달래보려고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완전히 나쁜 여자로 낙인찍힌 은별. 그 증거로 서해영은 은별에게서 완전히 물러나 안방의 구석진 곳으로 몸을 물렸다. 그리고 주저앉아 얼굴까지 가려버리며 덜덜 떨기 시작한다. 은별은 그 광경을 보고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으아아아아앙!'

심적으로 울고 싶은 맘이 드는 은별이었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민국을 기다리길 어연 20분. 너무나도 늦는 그의 행적에 은별은 혹시나 길거리의 다른 여자에게 작업이라도 거느라 늦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의구심은 뒷전치고…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으으으으으!'

어색하기 짝이 없다. 구석진 곳에 몸을 두고 두 무릎을 끌어 모아서 그곳에 얼굴을 대고 있는 해영이…. 아까 전 은별의 핍박 때문에 어지간히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은별은 그런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저런 특수한 타입의 아이는 대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은별도 손이 많이 탈 수밖에 없었다.

'…서라도 그렇게 잘 대하던데.'

자기보다 어린 서라도 해영이와 곧잘 대하는 모습이었다. 그에 반면 자기는 해영이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자 왠지 무력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민국의 여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친하게 대할 수 없다는 게 답답하기도 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구!'

무력한 자기 자신에게 신경질을 내던 은별이었다. 그렇게 있길 한참, 은별은 돌연 머릿속에 서라가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예나 그 여자랑은 어릴 적에 친해서 그랬다고 하고… 서라 같은 경우는 실제로 본 게 이번이 처음일 텐데 잘 어울렸다는 건….'

서라는 비제이를 하면서 중2병에 약간의 컨셉을 두고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에서도 곧잘 반영할 때가 있었다. 어쩌면 해영이가 서라에게 마음이 움직인 건 그 중2병 컨셉 때문이 아니었을까?

'…….'

그렇게 생각하니 대안책이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쩜 방금 전에 은별에게 마녀라면서 중2병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것도, 전부 은별과 중2병 배틀을 벌이기 위한….

'……!'

이윽고 고개를 홱 돌려 구석진 곳의 해영이를 보는 은별이었다. 연민이 물씬 풍겨지는 해영이의 안쓰러운 모습에 침묵하던 은별은 곧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좋아.'

불끈 주먹을 쥐면서 마음을 다지는 은별이었다. 서라도 했고, 예나도 놀아주었는데, 자기도 못할 게 없다. 오로지 자기 혼자만 이렇게 무력하게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은별은 결심하고는 눈을 감고 신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용기를 내서….

"큭…."

"……."

"큭큭…."

"……."

"큭큭큭큭…"

음침한 그 목소리에, 그저 민국이 오길 기다리던 해영이었다.

"큭큭큭큭. 그 정도 사자후에 무릎을 꿇다니, 약한 녀석이구나 네 녀석은."

"……."

움찔하면서 반응하는 해영. 그것은 해영이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마약의 숨결이었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드는 해영. 그러자 맞은편에는… 한 손을 얼굴 근처에 들고 치아가 드러나도록 한 쪽 입꼬리를 씨익 들어 웃어 보이는 은별이 있었다.

"나의 마법, 카노르… 아니 카놀로느… 아니아니! 카놀로느제페이노를 맞고는 꼼짝없이 쓰러져 버렸구나."

"……."

"하하하하! 이제 이 인류는 나 마녀의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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