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큭큭… 여동생 등장!>
"크리스마스에 뭐할 거야."
"……."
때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까지 2주 남은 상황. 민국의 방 침대에 걸터앉아 은별은 그렇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게임에 열중하고 있던 민국은 은별의 그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던 은별이 고개를 돌려 뒷모습인 민국을 향해 재차 묻는다.
"응?"
"……."
이윽고 마우스와 키보드에서 손을 때는 민국. 그리고 원형 의자를 돌려서 은별을 바라본다. 은별은 잠시 침묵하면서 민국을 쳐다보았다. 민국은 '엇흠….'하고 특유의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저기, 은별아. 오해하지 말고 들어."
"……."
"엇흠, 그러니까 말이여."
이야기가 끝난 뒤였다. 은별은 날카로운 눈매로 민국을 노려보고 있었다. 민국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 마냥 고개를 내리 숙이고 시선을 피한다. 기가 막힌다는 듯 그를 한참동안 노려보던 은별이 입을 열었다.
"예나랑 먼저 약속을 잡았다고?"
"어, 어쩌다 보니 말입니다요."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건데?"
아무래도 예전에 은별이가 예나를 지나쳐 자기 방으로 돌아갔던 그 날. 예나와 약속을 잡았던 모양이었다. 선약으로 잡은 모양인지라 차마 이제 와서 철회할 수도 없는 노릇. 이윽고 민국이 절실함이 담긴 항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하, 하지만 예나가 너무 간절한 눈빛을 짓고 있어서! 나와 크리스마스에 찐한 교류를 나누고 싶다는 메시지를 애절하게 보내고 있어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더욱더 거절했어야지 멍충아!"
"으어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민국. 정말이지 줏대 없다. 미래의 민국과는 상당히 비교가 된다.
적어도 미래의 민국은 은별만을 단연 선택했었는데! 여기선 조금 모자라다고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민국의 여자 친구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제2의 여자에게 호락호락 당하고 있을 만큼 은별은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팔짱을 끼며 은별은 선언했다.
"됐고, 무조건 거절해. 거절 안 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난 국물은 필요 없으니 너의 빈유에서 나오는 하얀 우유를…."
"진짜 맞고 싶지!"
그렇게 버럭버럭 소리치면서 으르렁대고 있던 찰나였다. '민국아.'하면서 어디선가 호명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가 상당히 익숙함에 은별은 외치던 것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해맑은 얼굴로 민국의 안방에 들어오던 예나가 그대로 굳어버린다.
"……."
"……."
민국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한다. 은별과 예나…. 아무리 지금은 서로를 조금 이해하는 사이라고 해도, 친해지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입장들이었다. 이윽고 은별이 짐짓 웃음을 지으면서 팔짱을 낀다.
"누군가 했더니 남자 친구에게 꼬리치는 못된 여우였네?"
"……."
예나는 은별의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그 건은 지금도 미안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민국이랑 대화를 하고자 하는 건 그쪽이랑 상관없지 않나요?"
"하! 뱃속에 생명만 없었어도 넌 이미 끝나고도 남았어!"
두 사람의 찌릿찌릿 신경전이 벌어진다. 확실히… 졸지에 가게 된 임신 루트가 민국과 예나를 잇게 해주는 연장선이 된 게 자명했다. 허나 그건 그렇다 치고… 두 사람의 입장을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민국은 그 사이에 껴서 온데간데 못하다가 천천히 미소 짓고 나서기 시작했다.
"자자, 다들 진정하시고…."
"진정은 얼어죽을! 너 이 여자랑 크리스마스에 약속 잡은 거 빨리 파기해!"
"그럴 순 없어요! 제가 먼저 민국이랑 약속 잡았단 말이에요!"
"…이이이! 정말 내가 막장짓은 안하려고 했는데!"
이젠 막장드라마에서 나오는 뻔하디 뻔한 행위를 할 때가 찾아온 것 같다. 은별은 예나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늘어지려고 했다. 예나도 질세라 그러려고 든다. 이 상황을 목도한 민국만이 크게 놀라면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제지하기 시작했다.
"은별아 예나야! 그러지 말고 자세히 얘기를 하는 게… 으아아악! 내 머리! 내 머리 으아악!"
"…넌 뭐야! 빨리 비켜! 나 더 이상 못 참겠어! 이 여자랑 기필코 결판을 내고 말 거야!"
"저야 말로예요! 저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어요!"
마치 호랑이와 사자 같은 느낌이었다. 서로 이 악물고 달려들려고 하는 와중에 민국은 중간에서 제지하는 역할을 하느라 이만저만으로 고생했다.
'내 머리카락 뜯긴다! 으아아아악! 내 눈! 내 코오오!'
그렇게 두 여자의 싸움을 말리고 있던 찰나였다. 끼이익, 쿵. 어디선가 문을 열었다가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상황에서 찾아올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가늠하고 있던 민국은 급작스레 들려온 그 소리에 '어?'하면서 의문을 표했다.
"비켜보라니까!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날이야!"
"바라던 바예요…!"
"으아아…! 잠깐 타임 타임! 다들 멈춰봐! 누가 온 거 같아!"
흥분해서 다른 소리는 듣지 못하고 오로지 상대방에게만 집중하던 두 사람이었다. 민국의 그 말에 그제야 손짓을 멈추는 두 사람. 이윽고 의아한 얼굴로 민국을 올려다보는 은별이었다.
"누가 왔다니. 너네 집에 우리말고 올 사람이 또 누가 있어?"
"민국아…?"
서라랑 유이가 오늘 찾아올 일은 없었다. 애초에 두 여자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도 반드시 연락은 하고 가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건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신호다. 고로 민국과 은별, 예나의 고개가 자연스레 현관문 쪽으로 돌아갔다.
"……."
"……."
"……."
그리고 세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현관문을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엔 은별과 예나가 처음 보는… 중학생 1학년 정도로 추정되는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 쏟아지는 눈을 피하기 위해 노란 우비를 착용했던 모습이었는데, 이미 장화는 젖을 대로 젖은 상태였다.
"어, 어어?"
민국은 노란 우비로 가려진 얼굴이 미세하게 익숙하단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려는 찰나….
"기어코 이성의 늪에 빠지고 말았군…."
"……."
"내가 주의하라고 하지 않았나. 남자여."
'남자'라면 이곳엔 민국밖에 존재치 않는다. 고로 그 대상은 민국밖에 될 수밖에 없다. 당연지사 목소리를 들은 은별과 예나의 고개가 빤히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민국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는 또 뭐야. 이번엔 진짜 어린애라도 노린 거야?!"
"민국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하도 여자랑 많이 얽히던 민국이다 보니, 어린 학생이라 한들 연인 관계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국은 거칠게 손사래를 치면서 항변했다.
"아니야 예나야! 아닙니다 은별양! 내가 아무리 아청법에 위반되는 로리 동인지를 컴퓨터 하드에 숨겨 놓고 있다고 해도 실제 로리를 건드리지는 않아!"
"…로리에 취향이 있긴 하다는 거구나."
"그러니까 당신이랑 사귀는 거겠죠…."
"…뭐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제가 틀린 말했어요?!"
또다시 싸우기 시작하는 은별과 예나. 그런 두 사람을 말리랴, 현관문 앞에 당도한 낯선 상대를 맞이하랴, 이래저래 바쁜 민국이었다. 이윽고 현관문에 있는 상대를 쳐다보면서 민국이 운을 띄었다.
"야 인마…."
"큭큭, 가소롭구나. 황혼의 태지에 뿌리를 뽑은 젋은 인간들이여. 어찌하여 사슬의 포박에 묶여서 현실의 고뇌에 두려움을 타느냐."
"……."
"……."
한창 싸우던 은별과 예나였다. 두 사람도 현관문의 어린아이가 내뱉은 목소리에 순간 행동을 멈추고 침묵했다. 은별은 무의식적으로 꿀꺽하고 침을 삼키면서 긴장했다. '설마'하는 눈빛으로 민국을 올려다보는 은별이었다.
"…혹시, 네가 아는 애 중에 마법사와 관련된 사람이 또 있었어?"
"……."
흑마법사와 흑설공주. 그 뒤를 잇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단 말인가? 왜냐하면 그런 부류가 저런 특유의 말투를 하곤 하였으니까…. 은별은 경험상 조금 경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허나 민국은 식은땀을 흘리는 얼굴로… 잔뜩 긴장한 눈빛을 짓고는 침묵할 뿐이었다.
그런 민국의 모습에 쳐다보던 은별과 예나가 입을 다물고 긴장한다. 마찬가지로 두 여자의 고개도 현관문 쪽으로 돌아갔다.
노란 우비를 쓰고 젖은 장화를 신은 어린 아이는 계속해서 '큭큭'거리고 있었다.
"신이 창조한 이 속세의 바다에는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거대한 파도가 기다리고 있지…. 그 파도는 아르세인토이누스의 황혼을 받아 움직이기 마련이다…. 어찌해서 그 운명을 가혹하게 여겨서 죄를 짓고 도망치려 한단 말인가…?"
"……"
"……."
"악마의 이빨에 깃들인 굶주린 영혼들이여, 그대는 올리포노스 아르테오스의 검을 쥐어 이 세상과의 연을 끊고 싸워야 하는 법…. 그 혹독한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저항하지 아니하여 이런 지루한 속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건 그대들의 죄인 법이지… 그리고 그것은 즉…."
우비를 쓴 여자 아이가 한 쪽 팔을 펼쳐든다. 촥! 우비의 물이 민국의 신발장에 묻는다. 그러나 우비를 쓴 여자 아이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다. 그 진지함에 그만 빨려들어가듯 잔뜩 긴장해버리는 은별과 예나…. 졸지에 겁을 먹고 민국의 옷자락을 꽈악 붙잡는 은별이었다.
"대체 누구길래 그러는 건데… 말 좀 해봐."
"……."
"……."
한참을 입을 다물고 추궁에 답하지 않던 민국이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민국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열었던 입도 다시금 닫고 만다.
그 정도로 민국도 공포에 질려있는 것이리라…. 흑마법사 흑설공주 앞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그가, 의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렇게 두려움에 떨다니…! 은별과 예나는 강한 패닉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우비를 쓴 여자 아이가 나머지 쪽 손도 펼쳐들면서 소리쳤다.
"신은 우리에게 강대함을 선사하셨다! 아프로테티오의 그리온은 날개로 구름을 가르고 하늘의 번개를 대지에 뿜었지! 그 번개가 우리를 유혹하는 순간 파이널 로스엔젤은 말했다! 세상을 유혹하는 악마의 더미들이여… 우리는 지지 않고 싸우리라… 지지 않고 싸우노라… 그러니 반드시 너희들도 이 꿈은 세상에서 발버둥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필사의 힘을 얻기를…!"
"……."
"그 막대함, 그 강인함! 그 절절함! 어째서 인류는 그 절절함을 끝까지 무시하고 간사하게 도망을 칠 생각이란 말이냐? 우리는 그렇게 나약했느냐! 아니! 나약하지 않다면 일어나는 것이 신을 향한 세기의 말미! 말미의 창조! 창조는 버릇되어 거짓을 없애고 거짓은 신을 없애는 유혹의 상징!"
허나… 이야기가 계속되면 계속될 수록 은별은 직관적으로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존 흑마법사나 흑설 공주는 이세계인다운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맞은편에 있는 이번 상대는 특유의 분위기가 존재치 않았던 것이다.
마치 평범한 인간처럼 추정되기도 하였다. 허나 민국이 이토록 긴장하고 있으니 차마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나는 나! 그리고 인류는 인류! 신의 심판을 받아 싸움은 혼돈을 대지할 것이니! 그곳에 이 내가 등장할 것이다!"
이윽고 모든 이야기를 마친 우비 소녀였다. 손을 몇 번이고 움직이면서 강인하게 연설을 끝낸 소녀. 예나와 은별의 고개가 다시금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예나는 잔뜩 긴장한 민국의 얼굴에 졸지에 똑같이 긴장을 하면서 물었다.
"민국아…."
"……."
"누구야…?"
예나의 물음에 한참을 머뭇거리던 민국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한다.
"저 녀석은…."
"……."
"……."
"큭큭…."
포스가 넘치는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 우비의 소녀. 과연 그녀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 동생이야…."
"……"
"……."
서민국의 여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