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혼자 놀기>
‘…하지만 그쪽 세계랑 내가 있는 세계는 다른가 보네.’
은별은 한숨을 거하게 내쉬었다. 미래의 민국에게 듣기로, 그는 한예나를 선택하지 않고 오로지 은별만 선택해서 결혼에 골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세계는 다르다. 민국은 한예나와 은별을 동시에 잡으려고 쌩쑈를 다하고 있었다. 요컨대 두 마리 토끼 잡기!
‘평행 세계라는 게 진짜 있나봐.’
하지만 하필 그 세계 중에서도 바람둥이 서민국이 있는 세계에 당도하고 말았다! 그래도 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서민국이 일찍 죽는 위기를 피해갈 수 있진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이 와중에도 그를 걱정하고 호감을 비추는 자신이 한심하긴 했지만 서도….
‘몰라! 이젠 모른다구!’
결국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결심한 은별. 그래도 미래의 민국을 만난 뒤에 생각이 많이 바뀐 뒤라 조금은 편해졌다. 늘 자신의 내면과 내적 갈등을 일으키느라 피곤해 죽을 맛이었는데 말이지.
“은별아! 섹스하자아~!”
“꺼져!”
기어오려고 하는 민국을 뒤로하고 원형 통로를 깔끔하게 막아버리는 은별이었다. 너머에서 민국이 ‘으아아~’하면서 때를 쓰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끝까지 무시했다.
* *
“인생 씨벌.”
스폰서에서 받은 남은 와인을 한 잔 거하게 마시면서 민국은 의자에 앉았다. 마치 모든 걸 말아먹고 인생을 한탄하는 남자처럼 보였다. 물론 여기서 다른 점이 있다면 와인의 도수가 상당히 낮다는 것. 그러나 은별은 이런 와인조차 혹여나 취할까 끝까지 거부하는 모습이었다.
‘아랫도리도 근질하고, 매우 심심한데.’
이게 방학이 되니까 찾아오는 문제였다. 혼자 놀기에 매우 심심했다. 예전에는 방송하랴 학교가라 과제하랴 여러모로 바빴는데, 지금은 그 바쁜 시절이 끝나고 나니 매우 지루하고 또 지루했다.
‘예, 예나랑 같이 파티나…!’
은별이 차마 해주지 않으니 예나랑 함께 할까? 간만에 하나로 융합해서….
‘아니지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예나는.’
민국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정신을 차렸다. 은별은 그래도 여자 친구라는 명분하에 하나가 되는 일에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예나와 하나가 되었던 건 어디까지나 사고에서 벌어졌던 일…. 여기가 책임을 지지 않고 막무가내로 놀아도 돌아오는 미연시 세계도 아니었고, 민국은 예나에게 그런 행위를 하는 건 왠지 강한 죄악감을 들게 만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예나도 정말 좋아하는데 말이지.’
오는 여자라고 다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특별히 예나이기 때문에 더 호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애초에 예나는 어릴 때부터… 늘 소꿉시절부터 자신을 도와주고 변호해주었던 인물이었으니까. 어머니의 따뜻한 품과 더불어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면 사실 거짓말이겠지. 이전에 고등학교 때 그녀 몰래 그녀를 흠모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때도 예나는 날 좋아하고 있었으려나.’
허나 그 물음에 대해 묻고 싶어도, 아쉽게도 예나는 집에 없었다. 고로 오늘 역시 민국이 혼자 놀아야 하는 날이 자명했다. 은별도 오늘은 그 날의 마법이 찾아와서인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니….
“좋았어 라이코스! 밖으로 출두 준비다!”
결국 혼자 놀기에 도가 튼 민국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때였다. 그는 곧장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후우우우웅~
“쓔밤 존나 춥네!”
바깥이 너무 춥자 결국엔 다시금 집에 돌아와서 옷을 겹겹이로 입는 민국이었다. 이래서야 오늘 혼자서 무사히 잘 놀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 *
후우우우웅~.
“와, 진짜 춥네. 생각해보면 산타클로스도 대단하구만. 이렇게 추운 날에 사슴 끌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선물을 주다니.”
아무리 입고 있는 옷이 따뜻한 털옷이라고 해도 이 추위를 감안하면 내심 존경스러울 수밖에. 물론 산타가 현존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 저게 뭐냐?”
그렇게 길을 거닐던 때였다. 막 민국이 사는 동네 근처의 초등학교 정문 앞에 다다랐을 때, 하얀 눈밭에 고이 놓여 있는 어떤 물건이 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책이었는데.
“……!”
그 공책의 겉표지와 더불어 제목을 보는 순간 민국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데, 데스노트!!!!’
가슴이 쿵할 수밖에 없었다. 데스노트….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그 사람은 무조건 죽게 되는 어마어마한 공책. 명색에 사신이 만든 것이라고 마법이 깃들어 있어 인간 세계에서 무지무지한 일을 벌인 공책이었다. 그런 공책이 민국의 앞에 현존하다니!
“딱 봐도 꼬맹이들이 제작한 다음에 재미없으니까 버린 거구만.”
그리고 겉표지가 잘 꾸며진 그 데스노트를 줍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일순간… 멈칫하면서 다시 생각을 시작하는 민국이었다.
‘잠깐… 이랬다가 만일 이게 진짜 데스노트면 어떡하지?’
그렇다…. 이래봬도 민국은 이 세상에서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몇 번이고 목도한 적이 있었다. 바캉스 사건 때도 본래 죽었어야 할 다섯 사람이 모조리 살아났다.
심지어 흑마법사와 흑설 공주의 마법으로 기이한 일은 다 겪어본 1인이었다. 그런 그가 과연 눈밭에 떨어져 있는 데스노트를 마냥 가짜 취급할 수 있을 것인가?
‘데스노트 철칙 첫 번째. 데스노트를 줍는 순간 사신이 보이고 나는 데스노트의 주인이 된다.’
민국은 예전에 보았던 만화책 데스노트를 떠올리면서 그리 생각했다. 그의 눈은 어느새 심각해져 있었다.
‘이것이 만일 사신이 데스노트의 새로운 주인을 만나고자 의도적으로 떨어뜨려둔 거라면 어떡해야 하지?’
그렇다면 매우 큰일이다. 당장에 경찰에 가져다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색에 사신인데 경찰에게 아무런 영향도 못 받지 않을까? 애초에 사신이라는 것들은 물리적인 공격에도 데미지를 입지 않았으니까. 민국은 계속해서 만화책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크으… 하지만 저게 만일 진짜 데스노트라면! 주인공 같은 놈이 나타나서 내가 신세계의 신이다 하면서 쇼를 할지도 모른다고!”
그렇다. 그건 그것대로 위험한 짓이었다. 세상에는 별의별 또라이들이 충만해서 분명 ‘신세계의 신은 얼어 죽을! 다 죽이고 나도 죽을 테다!’하는 놈이 꼭 있을 것이었다. 민국은 그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저 데스노트에 손을 대야하나 몹시 고민했다.
‘하지만 손을 대는 순간 사신이 보이고,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대로 놔둔다면! 아주 큰 피해가 생길 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 아니 당신의 가족!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결정권이 주어졌단 말인가.’
평화와 사랑을 바라는 러브러브 민국으로서는 참으로 가혹한 일이었다.
“크으읏! …제기랄!”
푸숙! 하얀 눈밭에 무릎을 꿇고 좌절하면서 민국은 주먹으로 눈밭을 때렸다. 흘러나오지 않는 눈물을 나오게 하려고 애를 쓰면서 말이었다. 이윽고 ‘하아, 하아….’하면서 거칠게 숨결을 내쉬며 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신중히 생각하는 민국이었다.
“안 돼… 도망가고 싶어… 나는 저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결국 자기 손목을 한 손으로 꽉 붙잡고 부들부들 떨다가 홱 몸을 돌리는 민국. 후다닥 데스노트 곁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데스노트와의 인연은 끝나는 듯싶었다.
“…….”
부스럭 부스럭. 하지만 다시금 데스노트의 곁으로 돌아온 민국. 차마 손으로 붙잡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크윽…!”
결국 눈물을 다시 찔끔 흘리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 쪽 무릎을 꿇고 괴로워하는 민국! 아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도망갈 수도 없어… 이 데스노트 곁에서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세계의 운명이 그에게 달려 있다! 민국은 마치 스크린도어로 자신의 중요한 상황을 전 세계가 관찰하는 것마냥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저벅저벅… 맞은편에서 어느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핸드백을 한 손에 매고 이 겨울철에도 어울리지 않는 구두를 신고 치마 차림에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
민국은 그 여성이 자기 근처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초등학교 정문 벽면에 기대고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기 시작했다.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말이었다.
“룰루랄라.”
“…….”
여성은 방금 멀찍이서 민국이 선보였던 이상한 행위에 대해서 조금 의문을 갖고 있었으나, 출근이 우선이었는지 신경쓰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간혹 눈밭에 있는 데스노트라 적힌 공책이 굉장히 거슬리긴 했는데…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저벅 저벅.
“…….”
이윽고 그 여자가 사라진 뒤였다. 다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민국이 공책 근처로 다가가서 ‘크읏….’하면서 한 쪽 무릎을 꿇는다. 이번엔 보너스로 한 쪽 주먹까지 눈밭에 대고 절망했다.
‘대체 어떡한단 말인가!’
하지만 주먹을 대고 있자니 너무 시려서 곧장 빼고 말았다. 다시금 장갑을 끼면서 민국은 절망했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괴로운 길을 주었단 말입니까! 저보고 대체 이 운명을 어떻게 거스르란 말입니까!”
하늘을 쳐다보며 절규하는 서민국! 하지만 하늘은 너무나도 푸르고 맑았다. 도무지 민국의 리액션에 어울리지 않았다.
“아아앙!”
하지만 민국은 절규했다. 혼신을 다해 절규했다!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어… 내가 이 세상을 지킬 수밖에 없다…!’
히어로가 될 자는 최후의 최후까지 고민하고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모두를 위해 희생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서민국은… 그런 남자였다!
“다들… 나를 잊지 말아줘… 내가 너희들을 위해 이 재앙을 혼자 감당하기로 결정했다는 걸…! 결코 잊지 말아줘!”
눈이 부는 아침! 민국은 하늘을 보며 그리 소리쳤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데스노트를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어머니… 못 드린 이야기가 많지만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북한이랑 전쟁났다고 거짓말 쳐서 소란피운 거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재밌었습니다….”
가족을 향해 슬픔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민국이었다.
“그리고 여동생아… 너 중2병 좀 고쳐라… 어떻게 어릴 때 나랑 똑같이 닮아가지고… 그 중2병 나중에 흑역사 된다 이 년아….”
이젠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야동보다가 들켰을 때 입 다물어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사랑하는 가족에게 남길 유언은 끝났으니….
“은별아… 네 빈유는 참으로 탐스러운 빈유야… 고로 다른 남자가 그 빈유에 손지겁을 대도록 놔둘 생각은 없어… 내가 귀신이 되더라도 너만은 반드시 평생 솔로로 있게 해줄게! 난 얀데레 귀신이 되어서 나만 생각하는 솔로로 만들어줄 거야 으헤헤!”
은별이 들으면 걷어차일 소리였다.
“예나야… 넌 현모양처 스타일이야. 그래서 사실 너에게 메이드 복이나 옛날 교복 입혀서 이러쿵저러쿵 해보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야… 사실 이번에 기회 되면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못해서 진심으로 아쉬워!”
이젠 강서라.
“서라야… 넌 트롤러 좀 작작해라… 롤할 때마다 네 트롤짓에 팀원들이 망해간다….”
남은 사람 최유이.
“다음 생엔 발차기 말고 가슴으로 때려주시길….”
그리고 이제 마음을 결심하고… 데스노트에 손을 갖다대기로 결정한 민국. 눈을 부릅 뜨면서 손을 대려는 그 찰나였다.
“야! 빨리 갔다 와!”
“알겠어! 여기였는데 대체 어디 갔지?”
들려온 꼬꼬마들의 소리에 후다닥 정문에 등을 기대고 아무것도 안한 척 서 있는 민국이었다. 잃어버린 공책을 찾기 위해 정문까지 나왔던 한 초등학생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다가 데스노트를 발견하고는 ‘아! 여깄다!’하면서 그것을 잡는다.
“찾았네 내 숙제 공책.”
“…….”
“……?”
그제야 초등학교 정문 벽에 서 있는 민국이 의아했는지 쳐다보는 꼬꼬마. 하지만 민국은 끝끝내 모른 채한다. 이윽고 꼬꼬마가 친구의 재촉에 데스노트를 들고 다시 정문으로 들어가자, 민국은 말없이 꼬꼬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은 결말이다.
“ㅋ.”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 민국은 다시 코트를 휘날리면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