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252화 (252/369)

252화

“자, 은별양. 우리 집에 오신 걸 환영하오.”

“아까 전에 왔었는데 왜 이렇게 오바하셔?”

“후후. 그거야 당연히 우리 은별양에게 식사를 하기 위해 준비를 해둔 내 마음 때문이겠지. 자! 식사부터 하고 싶소? 아니면 목욕? 아니면… 나?”

“식사. 닥치고 식사.”

“훗, 날 식사하고 싶다는 거군. 앙큼한 여우여.”

“…여우한테 발차기로 맞아볼래?”

발차기는 사양하고 싶어 부엌으로 뛰어가는 민국이었다. 그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은별은 거실에서 얌전히 앉아있었다. 창문을 보니 벌써 뉘엿뉘엿 밤이 넘어가고 있다. 방학이다 보니 늦게 자는 건 부담이 안 됐지만….

“후후, 봐라 은별아.”

“뭐야 그게? 와인?”

“그래! 고품격 와인! 내가 계약한 스폰서 사장님 중 한 분이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면서 드린 선물이야.”

은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에는 꽤나 괜찮은 와인 같았다.

“마십시다 은별양.”

“미안하지만 거절하겠어.”

“우째서!”

민국의 어린애 같은 말에 은별은 손을 들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 와인 취향 아닌 거 몰라? 애초에 술이 나한테 맞는 편도 아니고.”

가족의 유전으로 술 자체가 맞지 않았다. 은별이의 아버지나 어머니도 하나같이 술은 잘 못하는 편이었다. 고로 몇 잔만 마셔도 금방 취해서 술버릇을 보이는 게 다반사였고, 이젠 자기 술버릇도 알았기 때문에 은별은 술은 최대한 자제하는 상태였다. 민국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제길! 아깝군! 은별이가 간만에 헤벌레 하면서 나에게 들러붙는 거 보고 싶었는데.”

“앞으로 그런 건 영원히 볼 수 없을 테니 그렇게 알아두슈.”

‘그럴 수가!’하면서 좌절하는 민국을 뒤로하고, 은별은 다시 창문을 돌아보았다. 민국도 자연스레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운을 띄었다.

“오늘 눈 많이 왔지?”

“…어.”

“사실 아까 눈 오기 시작했을 때 같이 나가려고 네 방에 갔었는데 너 없더라.”

아무래도 미래의 서민국을 만났을 때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은별은 그에 대해서 언급할까 하다가 그냥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일을 더 크게 만들 것임을, 그녀의 본능이 자연스레 알려주고 있던 것이다.

“머리 아파서 산책 좀 하고 왔었어. 눈 와서 금방 돌아왔지만.”

“그렇구만. 흠흠.”

이윽고 다시 부엌으로 향하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그런 민국의 뒷모습을 보면서 미래의 민국이 해주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나와의 인연의 끈을 끊어줘야해.’

‘그래야만 네가 행복해질 수 있어.’

“…….”

행복. 참으로 애매한 단어다. 돌이켜보면 전 세계의 어느 사람 누구든 간에 행복하지 아니했던 기억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행복했던 시간이 짧고 긴 사람들로 나뉠 뿐…. 결단코 모든 사람들이 평생 동안 행복하는 건 무리인 것이다.

행복이 있으면 불행도 있고, 복잡한 감정으로 인해 만감이 교차할 때도 그것 역시 행복은 아닐 테니까.

“…….”

은별은 자신을 걱정해주던 미래의 민국을 떠올렸다. 그는 어른스러웠다. 지금의 민국보다 한참. 하지만 은별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지금 자기 앞에 있는 민국 역시도 내색은 안하지만 어른스러운 경향을 조금씩은 갖고 있다는 것을 말이었다.

“으하하하하! 식스섹스!”

‘저렇게 깨는 것만 아니면 말이지.’

부엌에서 음식을 가지고 밥상으로 가져오는 민국. 은별은 민국에게 수저와 젓가락을 받고 ‘고마워’라고 한 마디 한 뒤 음식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 간의 오붓한 식사가 진행되었다.

“맛있어?”

“…응. 맛있네.”

“훗, 다행이군.”

역시 민국도 자취생답게 요리 실력이 늘면 늘지 줄어들진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쩐지 요즘 들어 은별이 자기 요리보다 민국 요리가 더 맛있단 소감이 들 정도였다. 그런 뜬금없는 생각에 잠시 사래가 들렸던 은별이 ‘캑캑’거리면서 물을 한 모금 마신다.

“내가 해준 음식이라고 너무 빨리 먹지 말고 조심히 먹어. 체할라.”

“…꿀꺽 꿀꺽.”

물을 마시고 나서야 조금 덜해진 은별이 잠시 맞은편의 민국을 주시하였다. 음식을 얌전히 먹고 있던 민국이 그 시선을 느끼고 ‘엉?’하면서 쳐다본다. 이윽고 은별이 운을 띄었다.

“…질문 있어.”

“오, 은별이가 내게 질문을 하다니. 뭐시여?”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그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게 민국의 심정에 해가 될까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의 문제에 대해서 은별이가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 질문이 꼭 필요했다. 이윽고 입을 여는 은별이었다.

“내게 다른 남자가 생겼어.”

“…….”

“만일 그렇다면 넌 어떡할 거야?”

‘만일’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민국은 그대로 시간이 정지된 듯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이란 단어를 듣고 ‘휘유!’하면서 한숨을 쉬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심도 있게 고찰하듯이 중얼거리는 그였다.

“흐음, 일단 그 녀석이랑 맞짱을 떠서 이기는 놈이 은별이를 차지하는 쪽으로….”

“장난하지 말고! …진지하게.”

애초에 싸움 같은 걸 이긴다고 하여서 사람 마음이 좌지우지 될 리가 없었다. 은별이의 다소 진지한 얼굴에 벙이 찌던 민국이 곧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너에게 생길 그 남자 놈이 나보다 잘 생겼어?”

“…만일 그렇다면?”

“돈도 많고, 능력도 좋은가?”

은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수도 있겠지.”

“흐음.”

팔짱을 끼면서 잠시 고민하던 민국이었다.

“그럼 내가 놓아줘야겠지.”

“……뭐?”

좀 의외의 대답을 들은 듯 눈을 크게 뜨는 은별이었다. 애초에 민국은 평소에 은별이 절대 바람을 피우지 못하도록 늘 곁에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은별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의외의 대답은 은별을 순간 당황하게 만들었다. 테이블을 쿵! 치면서 은별이 일어났다.

“…왜 놓아주는데?! 보통 그럴 땐 잡아야 하는 거 아니야?!”

“으어어….”

그녀의 윽박에 순간 놀란 민국이었다. 하지만 곧 화를 내는 그녀를 자제시키면서 민국이 말했다.

“아니, 은별아. 잘 들어봐. 네가 지금 생각하는 그런 건 좀 오해야.”

씩씩거리는 은별을 간신히 설득시킨 민국이 그녀를 다시 제자리에 앉힌다. 그리고 다소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민국이었다.

“나보다 잘 생기고, 돈도 많고, 능력도 좋으면 당연히 나보다 그 사람 곁에 있는 게 은별이 네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잖아.”

“…하지만!”

“그리고… 내가 오히려 그런 너를 계속 내 곁에 있게 하는 게 너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은별은 아직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진정 사랑을 한다면 이기적이라도 끝까지 붙잡아야 하는 게 사랑이라고 배웠다. 적어도 은별은 그런 타입이었다. 그래서 은별은 혹여나 민국에겐 어차피 곁에 있어주려는 예나도 있으니까… 자신은 찬밥 취급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상처는 무슨 상처야… 너의 그런 생각은 정말 납득 못하겠다구….”

“…….”

작게 옹알거리는 은별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목소리도 민국은 놓치지 않고 캐치했다. 잠시 후, 은별을 쳐다보던 민국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은별은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미소 속에는, 지금의 민국이 드러내지 않는 진지함이 사뭇 묻어 있던 것이었다.

“그때의 네가 나랑 같이 있어서 상처를 받게 된다면, 나도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

“그러니까 차라리 네가 다른 남자를 만나더라도 네가 행복하다면, 그게 내가 덜 상처를 받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는 거야.”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생각일 수도 있으니 이것도 이기적인 생각일 지도 모르겠구만.’하면서 덧붙이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머리를 긁적이는 그를 보면서 은별은 한동안 눈을 크게 뜬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허허실실 웃음 짓는 민국을 뒤로하고 고개를 내리 숙여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는 은별이었다.

“응? 은별아?”

“…….”

민국의 호명이 있었으나 은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망울에 글썽글썽이는 눈물을 숨기기 위해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내린 고개로 가린다. 그녀가 몹시 화난 것으로 착각한 민국이 애써 웃음 지으면서 곁으로 다가온다.

“에이~ 은별아 왜 그래, 진심으로 내 생각을 말한 건데.”

“…저리 가. 바보.”

“으아니? 바보라니요! 하나뿐인 남편에게 바보라니요!”

민국의 가슴을 가볍게 툭 밀어내는 은별이었고, 그런 은별에게 장난을 치면서 달래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은별은 그런 민국의 모습을 뒤로하고 여전히 고개를 내리 숙인 채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던 그녀의 입술이 얼마지 않아 반달형을 그리면서 미소 지었다.

‘…그래, 넌 언제나 그랬었지.’

처음에 은별이 위험한 사람에게 위협을 당했을 때가 기억난다. 그때 민국은 은별을 위해 그 사람과 기꺼이 싸워주었었지.

바캉스 사건 때가 기억난다. 자신의 실수라고 하기에는… 그 상황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지만 민국은 모든 책임을 다해 결국 자신을 살려주었다.

흑화 소주 건도… 끝까지 아기를 책임지지 않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고민하고 고민하다 결국 두 여인과 행복해지고 싶다면서 아기를 선택했었다.

그리고 이번 스토커 건도….

‘뭐 하나… 날 위하지 않는 게 없었네….’

항상 중요한 사건 때는, 민국이 대신해서 도와주었다. 늘 노력하는 은별이 극복하지 못하는 상황이 찾아오면 곁에서 대신 도와주었었다. 그것이 민국이었고, 자신의 남자친구였다.

‘바람 피우는 건 정말 짜증나지만… 그래도, 그래도….’

은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넌 날 소중하게 여겨주었어.’

* *

다음 날, 눈은 그치고 햇볕이 쨍쨍이는 오전이었다. 한산한 골목길 아래에 쌓인 눈들이 서서히 녹아간다. 그 거리를 검은 코트의 한 남자가 서성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 옆에 있는 한 여자도 같이 서성이고 있다. 두 사람의 나이차는 비교적 나보이는 모습이었다.

“결정됐니?”

“…….”

남자가 먼저 물어온다. 치렁치렁한 코트가 원형을 돌면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물음에 반응하듯 여자의 몸도 그에게로 돌아섰다.

“네.”

“그렇구나.”

남자는 기다리던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기보다 먼저 떠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럼 대답을 들려주겠니?”

남자의 성숙하고 상냥한 물음에 여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고개가 위로 올라온다. 언제나 보았던 사랑스러운 눈동자. 옛 추억이 물씬 떠오르는 옛 얼굴. 이 순간에도 남자는 옛날 그녀와의 추억이 스쳐가는 걸 느꼈다.

“제 대답은요.”

“…….”

남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알고 있을 대답이었지만 왠지 받아들이기가 힘든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감당해야겠지. 이것도 자신의 책임의 몫일 테니까.

“곁에 있어주려구요.”

“…….”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예상과 빗나가는 그 대답에 남자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 여자는 신선했는지 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남자는 곧 더듬거리면서 물음을 던졌다.

“왜….”

“…….”

“왜 그런 결정을 했니?”

그는 이해가지 않았다.

“다른 결정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왜 하필 그렇게 불행해지는 쪽으로 결정한 거야… 나중에 가서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후회하겠죠.”

여자는 직설적으로 곧장 대답했다.

“변태에다가 여자도 양다리… 심지어 독특하고 별난 건 더럽게 좋아해서… 아마 나이를 먹어도 그건 별반 다를 게 없을 거 같아요. 심지어 이른 나이에 죽는단 얘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요.”

“그럼 대체 왜….”

“그러게요. 왜일까요?”

여자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 웃음은 평소 그녀가 보이기 어려운 웃음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따뜻한 눈동자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

“당신은 도망치지 않았잖아요.”

“…….”

“그럼 저도 도망치지 않아요.”

남자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의 눈이 잠시 커졌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이 따뜻하게 미소 짓는다. 그 미소 때문에 남자는 차마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억지로 참으면서 말을 잇는다.

“불행해질 거야….”

“…….”

“한 순간의 책임감이 평생을 불행하게 할 거라고…. 나 같은 걸 만나서 힘들고 어려워질 거야. 너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모든 것들을 감당해야 할지도 몰라. 그때 가서 후회하면 늦는단 말이야.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어. 혹시 내 말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오기로 이러는 거면….”

“오기라니요. 그런 말은 좀 자제 하세요.”

거슬리는 말에 따끔하게 핍박하는 여자였다.

“오기로 이러는 거 아니에요. 반발심 때문에 이러는 것도 아니구요.”

“…….”

“그리고… 한 순간의 책임감이 평생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여자의 두 손이 뻗어간다. 그녀의 두 손은 자기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두 뺨을 따스하게 포갠다.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 그걸 가르쳐줬잖아요?”

“…….”

“책임감이라는 거.”

여자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이제 와서 철회하지 않는다. 그녀의 성격을 아는 남자도 이미 늦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왈칵하는 감정을 애써 숨기면서 남자가 여자를 쳐다볼 때, 여자는 가볍게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빨리 가요. 아내가 화낼라. 아무리 당신이 내 남자라고 해도 내 진짜 남자는 여기에 있다구요.”

“아…….”

“어이없는 표정 짓지 마요 이 바보야, 대체 몇 번 말해야겠어?”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가더라도 내 책임은 내가 지고 갈 거야.”

“…….”

“그러니까, 난 도망치지 않아.”

그때, 남자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빨리 가요.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

“그건 행복한 일이라구요.”

이 여자와 함께 한 건 축복이라고.

* *

눈을 떴을 때는 병실이었다.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의식을 차린 남자를 보고 소란스러워진 주변의 소음만이 들려올 따름이었다.

“마지막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의사의 말을 뒤로, ‘여보! 여보!’하면서 급박하게 달려온 누군가가 보였다. 방금 전에 보았던 여자와 얼굴은 똑같았지만, 세월의 시간에 주름도 생기고 피부도 조금은 늙은… 모습이었다. 그렇다. 그가 사랑하던 사람이다.

“…….”

여자의 너머에서 울고 있는 자식들이 보인다. 하지만 여자와의 마지막 시간을 위해 물러나 있는 모습이다. 남자의 눈길이 여자에게로 돌아간다.

“여보….”

“…….”

그녀의 목소리에 남자는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입을 열어도 목소리는커녕 발음조차 되지 않는다. 결국 소리를 포기한 남자는 가까스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 동작에 기다렸다는 듯 허겁지겁 자기 손바닥을 갖다대주었다. 남자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찬찬히 여자의 손바닥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

여자는 글썽이는 눈망울로 이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하지만 글자의 내용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여자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온 힘을 다해 글을 쓴 남자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 스르륵 그녀의 고개가 다시 들려온다.

“…….”

“…….”

눈물을 참으면서 그녀는 그의 가냘픈 손을 두 손으로 양손으로 포갰다.

“진짜… 바보에다가 손도 이렇게 앙상해져선….”

“…….”

“그런 질문이야… 당연하잖아…. 누가 아니라고 대답하겠어…?”

따지는 듯한 물음이다. 시간이 지나도 그건 변함이 없구나.

“행복했어요….”

“…….”

“세상 어떤 여자보다도 행복했었으니까… 그런 걱정하지 말고 편히 가요….”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심지어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이라면 더욱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웃음을 짓고 보낼 수 있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일까.

“나중에 자식들 다 잘 되고…… 나도 편해지면 뒤따라갈 테니까….”

“…….”

“그런 걱정하지 말고 가요….”

‘아아….’

남자는 하얀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행복했었구나. 혹여나 자기 때문에 맘 상해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그건 다행이 착각이었구나.

‘다행이다….’

흘리는 눈물을 참는 그녀를 향해 남자는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 *

또다시 하늘에서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고 태양도 떠 있는 마당에 떨어지는 눈은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았다. 내려와도 햇볕 때문에 금방 녹아버릴 텐데 말이다.

‘그래도 저 눈도 떨어지는 동안은 행복할 거야.’

조금은 속이 후련해진 마음으로 은별은 두 손을 뒤로 모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자신을 호명하는 이성의 목소리에 곧 기분이 끊어졌지만 말이다.

“은별아!”

“알았다고! 간다니깐!”

재촉하는 그를 향해 가볍게 혀를 내미는 은별. 매롱을 하는 그녀의 모습도 어찌나 귀엽던지, 멀리서 손을 흔들던 민국이 그만 어이없어하며 미소 짓는다. 이윽고 가벼운 미소를 뽐내며 은별은 그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행복해.

그러니까 당신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우리 같이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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