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민국은 은별을 사랑했다. 은별도 민국을 사랑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이 사랑의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고찰의 순간 미래의 민국이 나타났다. 그가 현재의 은별에게 요구한 것은, 다름이 아닌 헤어지라는 제안이었다.
“나랑 계속해서 만나면 네가 불행해질 거야.”
“…….”
뭔가 좋지 못한 요구임은 예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짜고짜 헤어져 달라니. 그런 부탁의 내용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은별은 한참동안 침묵했다. 이윽고 은별이 어렵게 운을 띄었다.
“…제가 불행해진다는 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
민국은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나 때문에 네가 불행해지는 인생을 살았으니까.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아.”
“…….”
도대체 어떤 속사정을 가졌는지는 얘기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헤어져 달라고 말을 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은별은 부탁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그런 부탁을 하는 설명부터 요구했다.
“…뭐가 불행해졌는지, 뭐가 힘들게 되었는지 얘기를 해주어야 고민을 하던가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 은별이 너는 행복해?”
민국의 물음이었다. 은별은 당연히 불행한 일은 없었기 때문에 행복하기는 하다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요즘 힘든 고민이 있지 않아?”
“…….”
또다시 반복되는 민국의 물음에 은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치 미래의 민국은 이미 은별이가 속내로 앓아왔던 모든 속사정을 알고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금은 그래도 너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고민들이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쌓이고 또 쌓이면 결국엔 힘들어지게 될 거야. 난 그런 널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여기에 찾아온 거고.”
잠시 침묵하던 은별이었다. 곧 ‘하….’하면서 짐짓 여유로운 척 팔짱을 낀 은별이 물었다.
“저에 대해서 다 알고 계시다면 저에게 얽혀 있는 마법도 당연히 아실 텐데요. 흑설 공주라는 사람이 걸어준 조건이라던….”
“그 건에 대한 거라면 일 년 뒤에 고쳐질 거야.”
은별은 입을 턱 다물었다. 미래의 민국은 그 고민 역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이미 답안지를 들춰본 듯한 모습이었다.
“미리 헤어지고 난 뒤에, 감정이 조금 오락가락하겠지만 여기 민국이에게서 받은 병으로 일 년만 버텨주면 돼. 그러면 곧… 그 녀석이 찾아와서 널 원래 상태로 돌려줄 테니까.”
“그 녀석이라니…. 말씀을 하실 거면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똑바로 해주세요.”
어중간한 그의 태도가 슬슬 못 마땅했던 탓에 은별은 조금 사납게 대응했다. 민국은 그런 은별조차 미소 지으면서 받아주었다. 이윽고 그가 스윽하고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복이 쌓여가는 눈밭을 보던 그가 말했다.
“다시 걸을까?”
“…….”
“걸으면서 얘기하자.”
민국이 먼저 걸음을 움직였다. 은별은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잠잠히 쫓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쌓이는 무수한 눈덩이들. 하늘은 겨울답게 파랗고 하얗다. 태양은 구름에 가려져 더욱이 하늘을 보기 쉬웠다.
“나는 스물한 살이 되던 경에 너를 만났어.”
“…….”
“그리고 나의 짓궂은 장난에 너는 실망을 했고, 그때 나는 너의 마음을 알게 되어 너에게 고백을 하게 되었지.”
몰래 카메라 사건이었다. 옛 기억이 떠오르자 복잡한 심정이 오락가락했다. 동시에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은별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요. 정말 기분 나빴죠.”
“하지만 너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난 정말 기뻤어. 아! 이런 똑 부러지고 현명한 여자애도 날 좋아해주는구나, 하고 말이야.”
은별의 고개가 올라갔다. 그는 여전히 뒷모습을 보이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인기 많은 나로서는 어느 여자든 다 만날 수 있었어. 하지만 그 여자들 중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얼마나 있겠어? 남자 중에 못된 늑대가 많은 것처럼 여자 중에 못된 여우도 많다는 걸 여자인 너라면 더 많이 알 거야.”
하늘을 보는 성숙한 민국의 눈동자는 은별이와 함께 했던 옛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냥 이야기를 계속 들어줘. 부탁이야.”
“…….”
“그리고 넌 나와 사귀게 된 뒤에 나를 정말 상냥하게 대해주었어. 투박하고 투덜투덜 대면서도 항상 날 곁에서 도와주고 내가 의지하게끔 옆에 있어주었지.”
은별은 급기야 얼굴이 붉어졌다.
“졸지에 다른 여자들과도 얽히게 되어서 맘고생을 한 너였지만… 그래도 끝까지 내 곁에 남아준 너를 난 잊지 않고 있어. 아니, 어쩌면 평생이 가도 난 너를 잊지 못할 거야.”
하지만 미래의 민국이 하는 말은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내가 재밌는 거 하나 가르쳐줄까? 너와 나 사이에 아기도 태어났어.”
“…하…아?”
“아마 스물 중반쯤에 낳았을 걸? 그때 대단한 일도 있었지, 후훗…. 그때의 너와 나는 한창 으쌰으쌰에 미쳐 있어서 이러쿵저러쿵도 하고 이것저것도 하고….”
“잠깐! 진짜 맞고 싶어요?!”
손을 내뻗으면서 스톱 사인을 하는 은별. 그녀의 붉어진 얼굴에 민국이 귀엽다는 듯 미소 짓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너와 함께 했어.”
“…….”
“지금 은별이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말이야.”
현재의 은별에게 없는 기억을 미래의 민국은 가지고 있다. 그녀와 함께 아기를 돌보았던 시절, 함께 나들이를 가서 바람을 샜던 일, 일을 마친 자신의 어깨를 힘껏 주물러준 그녀. 화가 나고 슬플 때 항상 곁에서 서로를 위로했던 밤.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도 나를 사랑했어. 그치?”
“…….”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놓아야 했던 것도 있는 것 같아.”
미래의 민국은 떠올리고 있었다. 이날의 민국의 욕심을.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곁에 두고 싶어 했던 교만을.
“아주 큰 사고를 당했어.”
“…….”
“상상하기 무서울 정도로, 아주 힘든 사고.”
그는 말을 잇는다.
“이미 그때는 흑마법사도, 흑설 공주도 곁에 없었어.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던 거야.”
“…….”
“너는 그저 내 앞에서 내가 죽어가는 걸 얌전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너와 나의 아이와… 막연히 곁에서 말이지.”
얼마나 무력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단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극도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 힘듦조차 자신이 떠안고 가고 싶었던 게 민국의 마음이었다.
“나는 지금 병실 위에 누워 있어.”
“…….”
“그리고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건, 내가 신께 간절히 소망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건지, 아니면 마법사가 돌아와서 나의 소원을 들어준 건지, 그건 사실 나도 잘 몰라.”
이젠 발목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눈밭이 되어버렸다. 금세 쌓여가는 눈밭에 왠지 은별의 마음에도 무언가가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걸음을 멈춘 민국이었다. 따라서 은별도 멈추게 되었다. 이내 몸을 돌린 민국이 뒤에 있는 은별을 쳐다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은별아. 난 널 사랑해.”
“…….”
“그건 아직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네가 아파하는 일은 보고 싶지 않아.”
혼자 남게 될 거다. 남편이 없는 아내로서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민국은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헤어져줘. 부탁이야.”
“…….”
“너와 나의 끈은, 지금이라도 끊어야해.”
미래에서 찾아온 민국의 목적은 그것이 전부였다.
* *
과거의 나와 얽혀 있는 사람은 인연의 고리를 끊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이어지는 법이다.
그것은 먼 미래에도 영향을 끼칠 수가 있었다. 미래의 민국은 이미 자신의 결말을 보고 온 입장으로서 먼 미래에 악영향을 끼치는 고리를 잘라주길 은별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현재의 민국에게 가서 말해봤자 들어줄 생각은 하지도 않을 테니.
“다녀왔니 은별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가 운을 띄운다. 은별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네, …다녀왔어요.”
“어쩐지 기운이 없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아니에요.”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은별이었다. 자기 방으로 향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은별. 그런 은별을 잠시 지켜보던 은별의 어머니였다. 방에 홀로 돌아온 은별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가만히 있었다.
“하아….”
역시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미래의 서민국이라…. 머리 아파서 바람 좀 세려고 나간 게 목적이었는데, 졸지에 어마어마한 일을 겪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은별은 미래의 민국이 했던 말에 대해서는 기억에 상당히 남을 수밖에 없었다.
‘너와 나의 끈은, 지금이라도 끊어야해.’
“으으….”
생각만 해도 골이 아플 지경이었다. 여자 문제로 속을 썩이는 민국 때문에 괴로울 지경인데, 왜 하필 이런 일까지 더해져서 더 괴로움을 느껴야 하는가?
‘끊으면 다 끝나는 일이야.’
“…….”
하지만 그런 괴로움을 앓는 은별을 향해, 미래의 민국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끊으면 된다. 그와의 인연 고리를 더 이상 잇지 않으면 은별이 이렇게 괴로워 할 일도 없다. 따지고 보면… 그가 하는 말은 하나같이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은별은 그 옳은 말에 왠지 저도 모르게 태클을 걸고 싶었다. 그만큼 현재의 서민국을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 그 바람둥이에 자기 멋대로인 놈을?
‘참 웃긴 애야… 나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은별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손등으로 눈썹을 가리면서 천정을 바라보는 은별이었다. …전등 때문인지 눈이 부시다. 그 때문인지 눈도 서서히 가늘어지게 된다. 그리고….
“…….”
오랜만의 피로에 은별은 잠시 잠에 들게 되었다.
* *
“으음, 팬티가 보일랑 말랑하는 거 같은데.”
“…….”
“크으! 침대가 좀만 더 높았으면 보기 더 편했을 텐데 말이야!”
“…….”
“안되겠구만! 결국 내가 직접 손을 이용해서 들춰보는 수밖에….”
편한 옷차림으로 잠을 자고 있던 은별이었다.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는 소리가 들린 쪽을 고개를 올려 바라보자….
“…뭐하는 짓이야?”
“엇.”
“…….”
“…….”
퍽! 은별이 자고 있는 사이에 방으로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자고 있는 은별의 핫팬츠 사이를 손으로 비집어보려던 민국. 결국 은별에게 베개로 한 대 얼굴을 강하게 맞은 민국이었다. 붉어진 얼굴을 문지르는 민국이 말했다.
“아야야야, 은별 낭자. 사랑하는 남자 친구에게 폭력을 쓰는 건 범죄요 범죄!”
“범죄는 얼어 죽을! 네가 한 건 범죄라고 생각 안 해?!”
그래도 잠은 잘 잔 것 같다. 은별은 괜히 자기 방으로 찾아온 민국에게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통로 구멍 하나 생겼다고 자꾸 허락도 없이 넘어 오지마. 그러다가 부모님에게 들키면 어쩔 셈이야?”
“결혼하겠다고 해야지.”
“웃기네! 결혼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아시나!”
미래의 민국을 보고 온 터라서 그런지 결혼이란 단어에 유독 과민해질 수밖에 없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떠십니까? 은별양. 내가 당신과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에는 추호도 거짓이 없습니다!”
“…….”
“아, 하렘 결혼이 된다는 게 함정이겠지만.”
베개를 한 번 더 던질 자세를 취하자 민국이 ‘으아아아 맞으면 죽을 것 같아! 맞으면 아플 것 같아!’하면서 몸을 가드했다. 그의 그런 행동에 때리고 싶은 맘도 싹 가셔버려서 은별은 한숨을 쉬었다.
“그만하자… 그만해.”
“예. 폭력은 쓰지 않는 게 좋으니 말입니다 마님.”
이윽고 민국이 은별의 근처로 다가와서는 말했다.
“수면욕도 끝났겠다, 이젠 식욕이 급할 텐데 내 방으로 넘어와서 식사나 한 끼 하는 건 어때?”
“…식사만 하는 거겠지?”
추궁하는 은별에게 피식 웃음을 머금는 민국이었다.
“알~면~서~.”
“…나가!”
“으아아!”
베개를 던지는 은별을 피해 통로로 후다닥 들어가는 민국이었다. 시끄러운 소음에 은별이의 방문을 두들기면서 은별이 어머니가 물어온다.
“은별아, 무슨 일이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그렇게 엄마에게 얘기를 한 뒤, 은별은 통로를 돌아보았다. 민국이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한심스럽게 쳐다보던 은별은 투덜거리면서 방문으로 향해 문을 걸어잠그고, 곧장 민국을 따라 통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