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세상엔 아직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일이 숨어 있다. 그 중에는 분명 상상도 하기 싫고 끔찍한 일도 있을 것이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일도 있을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아니, 경험한들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줄 내용이 안 되기에 꿋꿋이 입을 다물고 있는다. 그리고 그 범주에는 민국도 속해 있었다.
민국은 자신의 팬이라 자칭하면서 찾아온 흑마법사에게 신비한 조건이 달린 마법을 받게 되었다. 가슴을 만짐으로서 생명력을 계속 키워낼 수 있는 마법…. 그리고 민국은 그 마법을 페시브로 달고 평생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외 은별, 예나, 서라, 유이도 새로운 마법을 조건으로 인생을 살게 되었다. …이건 다섯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모르는 신비한 기적과도 같았다.
"……."
그리고 지금 여기, 은별은 또다시 일반 사람들은 모르는 신비한 일을 체험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번엔 흑마법사 같은 이세계인이 아닌… 미래에서 온 미래인이었다.
"……."
여기는 커피숍.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은 서민국. 하지만 현재 은별이 알고 있는 민국과는 달랐다. 옷차림도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 조촐했고, 왠지 성숙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니… 확실히 현재의 민국에 비교당하는 게 웃길 정도로 그는 성숙하고 어른스러웠다. 입가의 주름 진 미소하며… 하얀색 머리카락이 이따금씩 삐죽삐죽 보이는 것하며…. 쪼르륵… 은별은 커피숍에서 주문한 과일 주스를 빨대로 마신 뒤에 입을 열었다.
"…진짜 서민국이…에요?"
"굳이 경어쓰지 않아도 돼 은별아."
과거의 은별은 미래의 민국에게도 초면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미래의 민국은 능숙하게 굴고 있었다.
"가슴으로 채우는 생명력, 내 씨앗으로 채우는 생명력, 흑마법사, 흑설 공주. 이렇게 네 가지만 알고 있다고 말해줘도 날 충분히 신뢰해줄 수 있지 않을까?"
"…흐응."
좀 더 여유로운 미래의 민국을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는 은별이었다. 확실히 그녀의 직관력이 말하길, 미래의 민국이 자명하다고 얘기해주고 있었다. 마시던 과일 주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은별이 물었다.
"그래도 미래에서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경어를 쓸게요."
"역시 예의 바를 땐 예의 바르구나. 은별이 다워."
"…큼! …그럼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는 민국의 얼굴이 워낙 남달라서 은별은 순간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 기침을 했다. 설사 늙었다 한들 민국의 얼굴은 여전히 잘 생겼다. 은별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민국이 대답했다.
"우선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과거의 네가 갑자기 보고 싶어져서 왔어."
"……."
"왜냐하면… 은별이 너는 나랑 또래기 때문에 나랑 비슷하게 늙어가잖아. 미래의 너는 아무리 화장을 해도 늙긴 확실히 늙어서 잔주름도 좀 생기고 피부도 좀 늙고…."
"…여기 뿅망치 없어요?"
"주먹으로 때리기는 좀 그러니까 뿅망치로 때리게?"
미래의 민국답게 은별과 어지간히 알콩달콩 살아온 모양이었다. 은별이의 말 하나 하나가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모조리 알고 있었다. 은별은 자꾸만 자신의 속내가 꿰뚫어지는 것 같아서 어색했다. 본래라면 은별이 민국의 속내를 꿰뚫는 게 정상일 텐데….
"두 번째는 뭐예요."
"두 번째는 간만에 과거의 향수가 맡고 싶어지더라고. 왜 은별이 너네 부모님도 그렇고 내 부모님도 그렇고, 가끔씩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씀하셨었잖아? 그런 과거의 향수 같은 거지."
은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확실히 납득할 수 있었다. 은별도 아직 스물 한 살이었지만 벌써부터 옛날의 추억에 대해서 이따금씩 상기하고 그리워하곤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 다시 살고 싶다는 마음은 아닌데, 그냥 한 번은 돌아가보고 싶다는 그리움 때문일 지도 몰랐다.
"세 번째는 뭐죠?"
"세 번째는…."
은별의 물음에 민국은 대답을 하다가 잠시 말미를 흐렸다. 인자한 눈웃음과 함께 말미를 흐리는 그의 모습에 은별은 순간 한 쪽 눈꺼풀을 들었다가 내리면서 의문을 품었다.
"너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할 게 있어서 말이야. 사실 그게 제일 큰 용건이긴 해."
"…뭔가요."
조금은 경계하면서, 한 편으로는 부드럽게 반응하면서, 은별은 물었다. 그러자 민국은 잠시 은별에게서 고개를 내리더니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정겨운 시선이 테이블로 향했으나 어쩐지 눈빛이 씁쓸해 보인다. 은별은 조금 이상하단 분위기만 느꼈을 뿐, 그 이유에 대해선 잘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민국이 말했다.
"조금 이따가 얘기해도 될까? 일단 나 화장실 갔다 오고 싶네."
"…네, 그러세요."
"그래, 그럼. 잠시만."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민국이 곧장 화장실로 향하기 시작한다. 커피숍의 몇몇 성인 여성들이 흘긋 지나가는 민국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었어도 얼굴이 워낙 잘 생겨서인지… 나이 불문하고 참으로 많은 여성들의 호감을 받고 있었다.
"하아…. 나이를 먹어도 저건 달라지지 않나 보네…."
여성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화장실로 향하는 민국의 뒷태를 보면서 은별은 궁시렁거렸다. 그래도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키가 조금은 작아졌다는 거? 1~2cm일 테니 잘 감지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나이를 먹으면 척추가 조금 짧아진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주름도 졌고… 피부도 꽤나 늙었고….
'그만큼… 지금의 민국이 가지지 못한 진지함도 보이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거겠지. 그게 바로 삶인 것이리라. 그러나 아까 전 민국의 말이 거슬렸는지 은별은 자신의 야들야들한 볼살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얼굴에 주름지고 피부도 늙는다고? 으으.'
아무리 나이를 먹어서 얻는 게 있어도 그렇지 은별 입장에서 그건 좀 원치 않았다. 애초에 피부가 늙는 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그래도 여자인 입장에선 더 그럴 수밖에.
'…더 많이 관리해야겠네.'
피부 관리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는 찰나, 볼 일을 마치고 커피숍으로 돌아온 민국이었다. 은별은 언제 망상에 빠져서 이런저런 표정을 보였냐는 것처럼 다시 정색을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던 민국은 가볍게 미소를 머금다가 맞은편 제자리로 돌아와 착석했다.
"근데 정말 과일 주스 한 잔 가지고 괜찮니? 나는 음식 대접해주고 싶었는데."
"…괜찮아요. 아까 전에 식사하고 바로 나온 거라서요."
"그래? 그러면 밖에 나가서 좀 걸을까?"
'대체 뭐길래 이렇게 오래 끄는 거지?'
세 번째 요구가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얘기를 질질 끄는 것인지 은별은 심히 의문이었다. 하지만 결코 은별에게 산뜻한 요구는 아니란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물론 그 요구의 내용을 보고 듣는 순간, 그것이 산뜻한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은별이가 상대적으로 판별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요 그럼."
"역시 지금이나 이때나 넌 도도하구나."
"…별로예요 그게?"
미래의 민국인 만큼 혹시나 솔직한 속내를 알 수 있을까 물음을 던져본 은별이었다. 지그시 미소 지으면서 민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너무 좋지."
"……."
"나는 은별이를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했어. 지금도 변함이 없고."
커피숍을 나가기 전, 사람이 지나가는 창문 너머를 응시하는 민국. 어쩐지 그 표정이 기쁨과 함께 씁쓸함으로 넘쳐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민국을 한참동안 주시하던 은별.
"일어나자."
"아, 네."
자리에서 일어나는 민국의 모습에 은별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주 소복하게 쌓이기 시작한 하얀 눈에 지나가는 커플들이 어깨를 두루고 웃음을 지으면서 좋아라 하고 있었다. 은별은 그런 커플들을 흘긋 보면서 지금쯤 집에 있을 민국이 떠올랐다. 동시에 아까 전 예나의 모습도 기억 속에 어른거린다.
"미래가 궁금하진 않니? 너와 내가 함께 했던 미래인데 어떤 일이 있었을 지."
"…글쎄요."
옆에서 걷던 미래의 민국이 정면을 쳐다보면서 물어왔다. 하얗게 눈이 쌓이기 시작한 눈밭을 가볍게 걸어가는 두 사람. 민국이 속내가 다 보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충 뭐가 궁금할 지 난 다 아는데."
"……."
"말해줄까?"
마치 놀리듯이 묻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순간 울컥했지만 차마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민국에게 화는 내지 못했다. 한숨도 쉬려다가 삼키면서 은별이 물었다.
"…어떻게 살았는데요. 그거 한 번 말씀해주세요 그럼."
"후훗."
은별의 물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살포기 미소 짓던 민국. 하지만 잠시 후 튀어나온 이야기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일단 은별이 너랑 결혼하자마자 xx해서 xx도 하고 xx로 xx도 하고 xx는 xxxx로 해서 xx한 다음에 xx를 해버렸어. 그러니까 네가 갑자기 xxxx하고 싶어! 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줬는데 하필이면 맛이 들려버려가지고 우리는 신혼 첫날부터 100일 동안 쉬지도 않고…."
"…야 이 변태 새끼야!"
결국 참지 못하고 민국이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버리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으악!'하면서 비명 소리를 내지르고는 정강이를 부여 잡고 동동 뛰어다녔다. 음담패설을 코앞에서 들은 은별이 씩씩거리면서 민국을 노려보자, 민국은 어설픈 미소와 함께 손사래를 쳤다.
"미안 미안. 그런데 네가 너무 나랑 어색하게 있길래 한 번 장난친 거야."
"……."
"오랜만에 이 정강이 고통도 느껴보고 싶기도 했지만."
은별은 어이없었다. 하지만 이로써 미래에서 온 민국이 정확함을 확실히 직감하였다. 조금은 긴장이 풀린 은별이 팔짱을 꼈다.
"대체 나를 만나서 뭘 하고 싶은 거예요? 왜 내 집까지 찾아오고 있었는데요."
"음… 그건."
머리를 긁적이는 민국이다.
"일단 아까 말한 것처럼 과거 향기도 맡고 싶었고, 어린 은별이 너랑 대화 나누는 것도 좋으니까."
"…그 말은 늙은 은별은 찬밥 취급한단 뜻인가요?"
살기 듬뿍 담긴 눈빛에 민국이 어색한 미소를 흘린다.
"그 눈빛은 언제 보아도 정말 감당하기 어렵구나…."
"…흥."
민국의 말에 세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은별이었다. 이윽고 가벼운 미소와 함께 민국이 손바닥을 들어 은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대뜸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순간 흠칫했지만, 곧 그 손길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가만히 있게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따지면 미래인인 민국이라 해도 남남인 것인데….
"사실 미래라는 게 한정된 것만 있는 게 아니야. 하나의 인물이 있어도 여러가지 방식으로 다른 결과를 맞이하기도 하고 말이지."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은별은 그냥 들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 무수한 미래들도 결과적으로 변하지 않는 몇 가지라는 게 존재해. …나는 그 몇 가지 중에 하나를 바꾸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드디어, 세 번째 요구를 말할 때가 왔다. 은별도 드디어 본래 용건을 들을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터벅. 소복하게 쌓인 눈길에서 걸음을 멈춘 민국. 은별의 몸도 자연스레 그에게로 돌아갔다. …하얀 눈이 바람에 휘날려서 흩날리는 가운데,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현재의 은별과, 미래의 민국. 현재의 민국과, 과거의 은별.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은별아."
그리고, 이미 미래를 알고 있는 민국으로선 더욱더.
"나랑 헤어져줘."
"……."
"그게 너의 행복을 위한 길이야."
민국의 부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