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249화 (249/369)

249화

<미래를 아는 너에게>

크라스마스란 무엇인가?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는 뜻일 뿐, 실상은 많은 커플들이 휴일을 즐거워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음란한 날이었다.

(?) 왜 오죽하면 크리스마스에만 모텔 비용이 8만원이 넘어가고, 그럼에도 사람들이 꽉 차겠는가? 돌아보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제군이여."

민국은 자신의 용감한 아랫도리를 다독이면서 중얼거렸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그 날이 찾아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남녀의 진한 합체가 이룩되는 날. 민국은 무려 두 명의 여자와 함께 할 것을 생각하니 군침이 돌았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3P라는 거지 으흐흐흐."

"3P 좋아하시네…."

은별은 민국의 침대에 걸터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었다. 도도하게 팔짱을 낀 채로 그녀는 반쯤 어이없단 얼굴로 민국을 노려보았다. 의자에 앉아있던 민국이 몸을 돌리면서 은별에게 말했다.

"은별이여! 너도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사실 누구나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크리스마스에 나와 한 몸이 되고 싶어하는 욕정을 참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너는 욕정 넘치는 여자니까!"

"…너 지금 그거 욕이지? 그렇지?!"

"우리는 하나가 되어 새로운 생명을 낳고, 결국엔 평생 동안 함께 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의 인류 보안 계획!"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 말하는 민국의 모습에 은별은 '하아….'하고 한숨을 쉬었다. 허나 평생을 책임지려 하는 그의 마음이 결코 나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기를 밴 상태에서도 절대 도망가려 하지 않았던 그였으니까. 이윽고 은별이 말을 이었다.

"…참고로 너랑 나랑 커플로 크리스마스 보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렇지요 은별양."

"그런데 거기에 여자 하나가 더 끼면 그건 커플이 아니겠지?"

은별은 예나를 일컫고 있었다. 민국은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더니 잠시 곰곰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보통 커플은 아니고 하렘 커플이겠네."

"맞고 싶지?"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이놈의 관계…. 정말이지 아스트랄한 구조였다. 예나도 공식적으로 선언만 되지 않았을 뿐 거의 연인 관계라 해도 다름이 없었다. 그만큼 민국도 요즘 은별이뿐만 아니라 예나에게도 성심성의껏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말이었다.

'애인 사이면 잘 해주는 건 정말 좋은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생각으로 그리 곱씹는 은별이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에 그 여자도 같이 동행하는 건 좀 이상하다 생각이 들거든?'

"하지만 은별아, 두 사람 모두를 책임지고 싶어 하는 내 입장에선 어쩔 수가 없어."

은별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기라도 한 것처럼 민국이 그렇게 종용했다. 은별은 잠시 팔짱을 끼고 곰곰히 생각에 들린 모습이었다. 어차피… 예나보고 물러나라고 한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날에 물러날 것 같진 않았다.

"정말… 양심도 없지…."

"으헤헤헤."

"웃지마, 정드니까."

'넵'하고 입을 다무는 민국이었고, 은별은 또다시 한숨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났다. 민국이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집. 부모님이랑 식사해야 하니까."

민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충성 소리를 외치며 경례 자세를 표명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

정말 저런 장난이 좋게 다가올 때도 있고 안 좋게 다가올 때도 있는 법이다. 불편한 심정으로 은별은 자기 집으로 향할 따름이었다. 덜커덩.

"……."

"……."

그런데 그 찰나였다. 막 자기 방으로 넘어가는 원형 통로 앞에 도착했을 때, 옆쪽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젠 익숙한 얼굴의… 어쩌면 라이벌이라 해도 다름이 없는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

양손을 다소곳히 모으고 은별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예나였다. 하지만 은별은 차마 받아주기도 뭐해서 그냥 고개를 돌려 원형 통로로 기어들어갈 따름이었다. 은별이가 서서히 원형 통로로 기어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예나. 그때 방안에 있던 민국이 소리를 들었는지 거실로 나오면서 말했다.

"언제 왔어 예나야?"

"응… 민국아. 많이 바빠…?"

고개를 젓는 민국이었다.

"아니, 바쁘기는커녕 널럴한 참인데?"

"그렇구나…. 잠깐 이야기해도 될까?"

반문하는 예나였고 민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제안을 승낙했다. 자기 집으로 넘어온 은별은 원형 통로로 들어오는 두 사람의 미세한 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 농담 말고 자고 있을 때 입안에 바퀴벌레 넣고 싶네.'

어찌 됐든 은별은 복잡한 심정으로 방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실상 은별은 두 사람의 교제를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의 방관하는 수준으로 지켜보고만 있었으니까. 본래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누구한테 여우질이냐면서 시비를 털털 털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러기도 지쳤을뿐더러… 무엇보다 민국도 이젠 예나를 받아주고 있었으니까.

'…내가 잘못된 거겠지.'

부모님과 식사를 하면서 은별은 그런 잡념에 휩싸여 있었다. 흘긋 부모님을 곁눈질하는 은별. 어머니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묻는다.

"은별이 왜 그러니?"

"아, 아니에요."

상냥 나긋하게 묻는 은별 어머니의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 뒤에는 항상 뾰족한 장미의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어찌 보면 은별이보다 훨씬 내공이 깊은 인물이었기에… 은별도 어머니 곁에선 항상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그래, 내가 잘못된 게 맞을 거야.'

그것을 이젠 얌전히 방관하다 못해 여태껏 헤어지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은별은 크리스마스가 문제가 아니란 걸 직감했다. 민국을 좋아하고, 그가 자기 잘잘못도 이해해주고 봐주었지만, 그건 돌이켜보면 은별도 다름없었다.

자기 감정을 시청자들 앞에서 사고팔고… 웃음거리로 만들었어도 결국엔 용서했던 게 누구였는가?

'…….'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가자 만감이 교차하게 되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은별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호명했다.

"아, 아빠…. 엄마…?"

"응?"

"왜 그러냐?"

엄마의 나긋한 반문과 아버지의 웅장한 질문이 찾아온다. 은별은 왠지 시선을 내릴 뻔했으나 꿋꿋이 참았다.

"…저기, 이건 그냥 내 친구 이야기인데."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포장한다.

"그 친구에게 남자 친구가 있거든? 그런데 그 남자 친구를 좋아하는 다른 여자가 있어…. 근데 그 남자 친구도 처음에는 자기 애인 지키기 위해서 다른 여자를 마다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겨서 결국 두 여자를 책임져야 할 문제에 쳐해버렸어. 그래서 결국 셋 다 어중간한 사이가 돼서 계속 교제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본래 그 남자 친구의 애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조심스럽게 자기 자신임을 눈치 채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은별은 질문했다. 아무래도 연애 지식에 대해서도 어른들이니 만큼 은별보다 많을 테고. 어른의 조언을 한 번 구해보기 위함이었다. 이윽고 은별이 아버지가 말했다.

"그 녀석… 축복 받은 놈이구나."

"여보."

"미안하오."

아내의 점잖은 으르렁거림에 곧장 숙이는 남편이었다. 자기 가족인 아버지에게 불쌍함을 느끼기도 잠시, 은별의 어머니가 은별을 나긋하게 쳐다보면서 상냥하게 물었다.

"본래 애인이 있는데 다른 여자를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왔다고?"

"으, 응."

"그럼 그 남자 친구는 어떻게 하고 있니?"

은별은 잠시 예나와 민국을 떠올리다가 대답했다.

"둘 다… 책임지려고 하고 있어."

"그래? 책임감이 참 강한 애구나."

의외로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예상을 못했던 대답이었기에 은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대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둘 다 포옹하려는 책임감, 그리고 욕심 때문에 본래 애인이 상처 받는 경우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

"생각을 했으면 그런 결정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

차마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어머니가 아니었으니 그런 식으로 답변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다름이 아닌 자기 어머니의 말에 은별은 깊게 공감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겠지?"

"그렇지."

나근한 웃음을 보이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남자 친구라는 애는 누구니?"

"…에?"

"설마 민국이는 아니지? 호호, 민국이면 잘 다듬어진 나무 목각이 하나 필요하겠구나."

"……."

어머니의 본래 성격을 아는 은별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민국이는 절대 그런 애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그렇지? 호호, 다행이야."

"……."

그리고 다시 오붓하게 분위기를 조성하며 식사를 하는 어머니. 은별도 어쩔 수 없이 그에 맞춰서 식사를 하는 모습이었다. 은근슬쩍 부모님의 눈치를 보면서 국을 입에 담는 은별. 하지만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니 머릿속이 더욱 착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잘못된 건 누가 봐도 틀림없어.'

은별은 그렇게 확고하게 결정을 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결코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서 모든 걸 바꾸려고 했던 건… 이미 서민국이 시도했던 행위였다. 새로운 마법사, 흑설 공주를 만나서.

'…왜 도중에 포기했던 걸까.'

은별은 민국의 그 속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회피하려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결국엔 다 책임지기로 마음 먹은 것이겠지. 그게 자신에게 가장 올바른, 선의의 행동이라 생각해서 말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찾아오는 좋은 결과도 있겠지만… 그 결과 안의 과정 속에는 부자연스러운 문제가 끼얹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아…."

이를테면 현재 은별이가 안고 있는, 혼란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은별은 생각하기 싫어도 자꾸만 생각되는 그 날의 충격에 예나에 대해서 좋게 쳐다볼 수 없었다.

요즘 들어 자기 잘잘못을 알기 때문에 은별에게 맞춰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감정은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미움이 콕 틀어박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도 이제 어쩜 좋을 지 모르겠다구!'

속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은별은 집을 나왔다. 답답한 마음이 도통 가시지 않아 가슴이 뻥 뚫리게끔 차가운 바람을 맞아야만 할 것 같았다.

"…추워."

하지만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쌀쌀한 겨울 바람이 몸에 불어닥쳤다. 결국엔 집으로 돌아와서 옷을 두껍게 입고 밖을 나가는 은별이었다.

'…그 녀석은 나 혼자 나가려는 걸 알면 또 따라 나오려고 하겠지.'

민국은 평소 아침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은별이가 혼자 외출을 하면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었다. 남자 친구로서 보디가드를 해줘야 한다나 뭐라나…. 확실히 이 어중간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민국은 최대한 은별이에게 걸맞는 남자가 되기 위해 노고를 치르고 있었다.

그 노력을 은별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이해했고, 한 편으론 고마웠지만 그래도 역시나….

"하아…."

다른 또래 애들보다 일찍 늙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연신 한숨을 쉬던 은별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결국엔 자기 자신이 새롭게 선택을 해야만 결과가 바뀔 것이다. 이 잘못된 입장에서 빠져나가려면… 은별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지 감은 잡고 있었다. 아직 마음에 결정은 내리지 못했을 뿐. 저벅.

"…응?"

그때였다. 막 집을 나와서 길을 몇 분간 걷던 은별. 자기 앞을 가로막는 누군가에 은별은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눈이 커다래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얼굴이 눈에 익었고, 그 분위기조차도 은별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은별은 저도 모르게 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못 믿겠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민국…?"

"……."

당면에 있던 서민국이 인자한 미소, 주름 진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안녕 은별아."

"……."

"미래에서 왔습니다."

============================ 작품 후기 ============================

패러디가 섞인 에피소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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