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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46화 (246/369)

246화

‘어째서지여? 어째서일까여? 어째서 신은 지에게 이런 위기를 갖다 주신 걸까여?’

심도 있는 고뇌와 함께 물을 꿀꺽꿀꺽 목안으로 삼킨다. 가지고 온 물컵으로 화장실에서 목을 축이는 서라였다. 마치 맥주를 마신 것마냥 ‘크아아!’하고 감탄사를 내뱉은 서라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꾸었던 꿈이 똑같단 말인가여!”

그러하다…. 민국이 언급했던 그 이야기는 서라가 꾸었던 꿈과도 동일시했다. 이건 우연인가? 아니… 우연이라기에는 다소 이상했다. 너무 딱딱 알맞게 들어맞지 않는가? 어디 조금이라도 틀린 이야기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런 건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보이지 않았었다.

“이이이이잉!”

거울을 바라보면서 예쁜 얼굴의 볼을 손으로 마구마구 만지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여자 화장실 변기칸이 열리고 안에 있던 어떤 여자가 나오자 ‘잇’하면서 얼굴에 올리고 있던 손을 내리는 서라였다.

“…….”

차마 화장실 안에 누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공손히 두 손을 아래로 내리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서라.

그런 그녀가 세안대에서 비키자 물로 손을 씻는 여자. 이따금씩 고개 숙인 서라를 흘긋 쳐다보는 게 그녀가 세안대 앞에서 했던 쌩쇼를 전부 들었던 모양이었다. 끼이익, 쿵. 이윽고 변기칸에서 볼 일을 본 여성이 문을 닫고 화장실에서 사라졌을 때였다.

“이이이이잉!”

다시 기회를 노렸다는 것처럼 거울을 향해 볼을 양손으로 만지면서 괴로워하는 서라였다.

“어지간히 배가 아팠던 모양이구만.”

“헤헤, 오늘따라 스캇물의 신호가 왔었나 봐여.”

다시 아무런 일이 없던 것처럼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로 돌아온 서라였다. 민국을 바라볼 수 있는 맞은편 의자에 앉는 모습. 하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민국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다. 아무래도 오늘 꾸었던 꿈 때문에 그녀도 자꾸 민국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었다.

‘마력의 힘으로 아브라다카다브라 삐리뿅!’

의식하는 나 자신에게 지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보려고 노력하는 서라였다. 이윽고 민국이 말했다.

“그런데 너희 학교 방학식은 언제냐?”

“이제 이틀 남았음여!”

“오오, 축하한다. 이제 너도 조만간 고3이구만.”

민국은 고3때의 추억이 떠올랐는지 ‘훗’하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고3이라… 나쁘지 않은 추억이었지….”

“수능 망할 뻔했나 봐여?”

“암. 하필 수능 날에 밤 새다가 곯아떨어졌거든. 그때 예나가 나타나서 허둥지둥 깨워주지 않았으면 난 아마 이제 대학교 들어갈 준비했을 거다.”

“히이익, 예나 언니찡이 생명의 은인이었네여!”

생각해보면 예나는 정말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자기껏 챙기기도 바쁜 마당에 민국이 까먹는 일이 있으면 대신해서 도와주었고, 챙기지 못한 것들이 있으면 자기가 준비해서 늘 도와주었었다.

예전엔 그런 예나의 행동에 다소 부담스러움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녀가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신을 이성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다는 걸 알게 된 후로 크게 부담감은 없었다. 민국도 그만큼 예나에게 잘 대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그치. 그리고 그런 예나를 제2의 여자 친구로 두고 있는 나도 대단한 녀석이지. 훗….”

“이분 최소 후라이드와 양념을 갖고 있는 치킨 주인아저씨.”

치킨이란 단어를 언급하기 무섭게, 9900원짜리 반반 치킨이 두 사람의 테이블에 등장했다. 민국은 젓가락을 챙겨 서라에게 주었고, 서라는 이럴 때만큼은 ‘고맙습니다영.’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표하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방금 꿈 이야기는 어떠냐.”

“…….”

치킨을 얌전히 먹던 서라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서라가 베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꿈이라서 가능한 일임! 애초에 내 AT 필드는 행님의 성스러운 엑스칼리버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마력이 강해여!”

“허허, 이놈이 당해보지도 않고.”

18센치 서민국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된다. 다른 건 다 건드려도 서민국의 그곳만은! 어찌 됐든 그렇게 두 사람은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제3자가 보면 달달한 커플처럼 보이겠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은 친분 있는 비제이이자 친한 오빠 동생이었을 뿐이었다.

“꿀꺽 꿀꺽!”

“오오! 잘 마신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 쭉쭉!”

신명나게 대화를 하던 두 사람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자연스레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간다. 그러자 어느 모임에서 나왔는지 우르르 몰려 있는 사람들끼리 치킨점 테이블에서 술자리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술 게임을 하면서 맥주 500cc를 단숨에 꿀꺽 해치우는 것 같았다. 민국은 ‘호오’하고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술 게임인가 보네.”

“그러게여.”

“크으, 네가 로리만 아니었으면 술 마셔서 모텔 데려갈 텐데.”

“크으, 모텔 데려가는 순간 아청아청 비명 지르는 걸 텐데여.”

어쨌든 오가는 술을 보니까 다시 시상식 날의 그것이 떠오른다. 민국은 시상식 날 밤에 술에 취해서 저마다 술버릇을 내세우던 세 사람을 떠올렸다.

은별은 섹시함을 보이면서 들러붙었고, 서라는 훌쩍이면서 민국의 옷깃을 부여잡았으며, 유이는 깡패로 변모하여 민국의 멱살을 붙잡으며 그간의 앙금을 털어놓았었다. 돌이켜보면 셋 다 참으로 본래의 모습과는 다른 개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응? 근데 잠깐만.’

돌이켜보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서라가 옷깃을 붙잡으며 훌쩍였다? 그것도 민국의 옷깃을 붙잡고?

‘이거 꿈이랑 너무 비슷하게 매치가 되지 않나?’

꿈속에서는 유이의 강압에 민국도 어쩔 수 없이 술을 진탕 마셨고, 결국 꽐라가 된 상태로 모텔을 찾기 위해 길거리를 전전했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은별은 계속해서 한 판하자면서 달라붙었고, 반대로 서라는 사랑한다면서 민국에게 흐느끼며 고백을 해왔었다. 현실의 시상식 날 밤의 기억은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오늘 꾸었던 꿈의 술자리는 그 누구보다도 섬세하게 떠오르는 민국이었다.

‘…에이 아니겠지.’

무의식적으로 서라를 돌아본 민국이었다. 서라는 느닷없이 그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토끼가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깜찍한 모습과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는 꿈속에서의 술에 취한 서라….

‘…….’

그러고 보니 아까 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서라가 무진장 당황하던 것도 떠오른다. 어쩜… 어쩜 이건 설마…?

“야 서라야.”

“읭? 왜 그러셈여.”

“너 혹시 그때 시상식 날 술자리 하고 나서 나에게 기대지 않았었냐?”

순간 뜨끔할 뻔한 서라였다. 침착하게 반문하는 그녀였다.

“초고추장에 우유 말아먹는 듯한 말씀을 하시네여 행님.”

“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게 말이다…. 물론 오늘 내가 꾼 꿈이 전부 진짜 있던 일이란 생각이 들진 않지만, 그래도 뭔가 진짜로 있었던 기억도 있는 거 같아서.”

“…….”

“흐음, 예를 들어 시상식 술자리 날 말이다. 그때 내가 유이 씨에게 사로잡혀서 술 마시기 전에 기억하는 게 있는데. 너 그때 잔뜩 취해 있었거든? 그런데 그때 분명 네 술버릇이 나에게 기대서 훌쩍이는 거였는데 어쩌면 진짜로….”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혀서 ‘딱’ 소리를 내고는 서라를 검지로 가리키는 민국이었다.

“네가 진짜로 꿈속에서 했던 것처럼 흑흑 울면서 나에게 고백을 하지는 않았을까 싶은 거지!”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면서 감탄사를 내뱉는 서라. 하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 행동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매우 떨리는 실정이었다.

“훗, 어떠냐. 이것이 바로 나의 추리. 사스가 탐정이지 않냐.”

“넹. 근데 온니찡, 지는 온니찡을 좋아하고 아이시떼루하지만 그리 하다고 그런 술버릇을 보일 여자는 아니에염!”

“그래, 나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네가 술버릇으로 나에게 고백할 리 없다고 생각하거든.”

애초에 서라는 눈치 백단에 배려 백단이었다. 임자 있는 남자 친구에게 고백을 하고 들이댈 만큼 접근하는 타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로 가늠할 때….

“뭐, 자세히 내가 기억하는 것도 없고. 애초에 어디까지나 꿈이니까.”

서라의 물컵이 빈 것을 확인했다. 곧장 물병을 들어서 서라의 물잔에 물을 따라주는 민국. 그 모습에 서라가 ‘으앗’하면서 물잔을 들어서 물을 받는 모습이었다.

이내 양손으로 물을 받은 다음에 한 모금 홀짝하고 내려놓는 서라. 민국은 그런 서라를 보면서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서라는 그런 민국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온니짱의 개꿈처럼 정말로 온니짱과 내가 맺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 났을까여?”

“그러게 말이다. 일단 넌 영계에다가 섹시하기 때문에 내가 바로 잡아먹었을 건 분명하고.”

“내 소중한 곳에 온니찡의 생명이 넘쳐흐르고 있엉!”

“그래, 우선 그게 1순위였겠지. 그리고 흠… 뭐 서로 비제이도 하고 너나 나나 맞는 취향도 많으니까 잘 어울렸을 거 같다.”

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잘 싸우지는 않았을 듯싶네여?”

“야, 근데 그건 또 모르는 법이야. 연인이 되면 친구였을 때랑은 또 다른 사이가 되는 법이거든. 감정 조절도 어렵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감정싸움도 생길 가능성이 높다?”

“호옹이.”

마치 연애를 글로 배우듯이 서라는 메모장을 꺼내서 그것을 볼펜에 적는 모습이었다. 그런 개그스러운 조크에 민국이 피식 웃음을 머금다가 말했다.

“뭐,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시 너라면 죽이 잘 맞았겠지.”

“그렇겠지여? 지도 실은 그렇게 생각함여!”

“그래. …크으, 생각하니까 아쉽구만. 너도 그냥 나의 하렘에 들어와라! 어차피 난 지금도 충분히 개새끼이기 때문에 더 개새끼가 되어도 아쉬울 게 없어!”

민국의 장난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서라는 그 말에 잠시 민국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웃음 지었다.

“뷁!”

“거절의 의사도 참신하구나, 이 재롱쟁이 녀석.”

“온니찡! 여자 둘에게 소비할 정력도 감당이 안 될 텐데 여자 셋은 욕심이네여! 현재로서 충실하세여!”

“쩝, 하긴 흑마법사도 없으니 정력 아이템도 더 이상 구비할 수 없겠군. 그렇다고 그 악마 같은 여인에게 부탁하자니 무슨 끔찍한 일이 또 일어날까 두렵기도 하고 말이다.”

악마 같은 여인이라면 흑설 공주를 일컫는 것이겠지. 아무튼 그렇게 두 사람의 9900원짜리 치킨점에서의 소박한 노가리 대화는 끝이 났다.

“집에 잘 들어가고 다음에 보자.”

“이응! 간만에 합동 방송이나 준비해보기로 해여!”

서라를 집 앞에 데려다준 뒤, 서라에게 머리를 쓰다듬는 민국. 그런 민국에게 합동 방송이나 한 번 하자면서 약속을 잡는 그녀. 민국은 그런 서라가 귀여웠는지 미소를 머금다가 몸을 돌렸다. 서라는 몸을 돌린 민국의 뒷모습을 향해 그저 손을 흔들 따름이었다.

귀여운 미소를 머금고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 표정을 멈추지 않았다.

“…….”

잠시 후, 민국의 자취가 사라진 뒤였다. 사라진 그의 자취를 눈으로 쫓던 서라는 얼마지 않아 웃던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말없이 사라진 길을 주시하길 한참….

“히히.”

씁쓸함과 즐거움이 묻어나는 미소로 치아를 드러내면서 현관문으로 향하는 서라였다.

서라를 배웅해준 뒤 민국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자꾸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면서 자신을 쳐다보자 민국은 ‘응?’하고 의아함을 가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훗하고 미소를 머금는다.

‘역시 난 어딜 가든 시선을 받는 존재로군.’

왠지 자신감이 넘쳐나서 가슴을 당당하게 피고 걷는 민국. 그러나 그는 차마 알지 못했다. 아까 헤어지기 전에 서라가 은근슬쩍 그의 등뒤에 테이프로 붙여놓은 종이 한 장을 말이었다. 그 종이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내일도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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