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방송을 하기 위해 은별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이내 홀로 남게 된 민국이었다.
“흐암, 오늘은 방송 좀 쉴까?”
그동안 열심히 방송을 했다. 아무래도 방학을 한 뒤로 할 게 없다 보니 오로지 방송에만 매달리면서 열중했던 민국이었다. 때문에 현대왕의 시청자들도 더 늘어난 상태였고 랭킹 1위이다 못해 매우 독보적인 인기까지 얻고 있는 추세였다. 민국도 한 편으론 자신이 이렇게 인기를 얻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 막장성이 그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건가? 후훗, 그 누구에게도 막장성만큼은 지고 싶지 않군.’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내던 민국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휴식을 하는 날이니 만큼 할 일도 없겠다, 민국은 간만에 친구나 만나서 노가리나 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전화기록부를 뒤적이는데.
“쿠왁… 민철이라.”
실제 이름 민철. 비제이로서 활동하는 닉네임은 쿠왁이었다. 요즘은 예전처럼 합동 방송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연락을 주고 받지 않았는데, 그래도 한 때는 불알친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로 방송을 같이 하곤 했다.
‘이놈 아직도 서라 포기 안했나.’
서라도 민철에 관해서 더 이상 언급이 없는 거로 보면 포기한 것 같긴 한데 말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더 이상 민국에게 서라를 만나게 해달라고 제안을 하지 않는걸로 볼 때 반쯤은 포기한 모양 같았다.
‘뭐 다행이지. 민철아 미안하다. 아무리 그래도 서라는 5천명의 아리아잖니. 네가 넘볼 수 없는 아이란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민철이랑 서라가 사귄다고 할 때 누가 더 아깝겠는가? 당연히 서라 아니겠는가! 여자에다가 영계에다가 심지어 배려도 있고 눈치도 있고 성격도 활발하고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다. 비주얼도 대한민국 1위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쁘고 말이었다.
친 여동생이었으면 핏줄이 원수지 하면서 부모님을 원망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그녀.
“흐음, 생각해보니 만일 서라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대박이었겠네.”
그러하다. 서라의 성별이 밝혀졌으면 민철은 민국이 자신을 속인 건 둘째치고 엄청나게 들이댔을 것이다.
이미 여자인 것도 알았겠다, 그렇게 예쁜 아이라면 놓치지 않을 터였으니까. 그리고 필시 시상식에서 서라를 보았던 무수한 비제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녀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게 들키는 이상 들이대는 사람들은 엄청 많았을 테고 아마 그건 넷상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
‘사적인 부분으론 접촉 받고 싶지 않아하는 서라를 생각하면 오히려 사건을 해결한 게 다행이라고 보아야 하려나.’
뭐, 둘 다 장단점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윽고 서라를 생각하자니 은별의 방송이 떠오르는 민국이었다. 예전에 한 번 은별의 방송을 몰래 눈팅한 적이 있었는데….
“와이 슈밤? 은별이에게도 들이대는 놈들 엄청 많았었지? 이놈의 여편네들… 철벽은 치지 않고 남자들이랑 쌍쌍바하면서 즐겁게 수다나 떨어? 나중에 육봉으로 혼내줄 테다.”
물론 의도치 않게 양다리를 걸친 민국 입장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 다소 이상했지만 말이었다. 어찌 됐든 할 일도 없다! 은별이는 방송을 하러 갔고, 예나도 오늘은 예슬이와 놀아준다고 하였고… 민국은 민철이와 연락을 할까 고민했다.
“…….”
그러다가 전화기록부에서 이번엔 서라의 번호를 발견하는 민국이었다.
‘참 이상한 꿈을 꿨는데 말이야.’
낮잠을 잤을 때 꾸었던 신기한 꿈…. 지금은 비록 아까 전처럼 새록새록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참 요상한 꿈이었다.
‘술버릇으로 나에게 고백을 하고 서라와 사귀게 된 뒤에 이러쿵저러쿵 으쌰으쌰라니 말이지.’
꿈은 그 사람의 욕망을 일컫는 것이라 했다.
‘설마 내가 무의식적으로 서라에게 욕정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 자문에 대해서 쉽게 부정할 수도 없는 게, 민국은 꿈속에서 서라와 사귀게 된 뒤 그 이후의 일도 어렴풋이는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서라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났지만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건 역시….
‘AT필드 파괴!’
‘A, AT 필드 파괴로 가버려엿!’
AT필드부터 조국 통일 등등… 참으로 잡다한 드립이 샘솟던 야한 장면. 만일 실제로도 민국과 서라가 하나가 된다면 그런 소리가 나오진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그렇게 생생했던 오늘의 꿈 때문에 민국은 자꾸 의도치 않게 서라를 의식하게 되었다.
“이것 참 큰일이야. 이러다가 세 다리 되게 생겼어. 자제하자 서민국.”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서라에게 연락을 하는 민국이었다. 결코 자기 욕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래는 민철과 간만에 술 마시자면서 약속을 정할 예정이었지만, 돌이켜보니 남자보단 여자가 낫지 않겠는가? 얼굴을 마주해도 이성과 마주하는 게 수명에도 좋다고 과학 논문으로 나온 결과가 있었다. 뚜루루루… 이윽고 서라에게 연락을 건 민국이 신호를 기다린다.
‘얼레? 바쁜가?’
그러나 한참을 신호를 기다려도 그녀가 받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민국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자기가 전화를 걸면 곧장 전화를 받은 다음에 요상한 장난을 치거나 하는 서라였는데 말이었다. 정말 오늘은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생각을 하고 하는 수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였다.
전화를 받은 서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 요시!”
“오. 받았구나. 근데 뭐하느라 그렇게 늦게 받았냐? 설마 딸이라도 치고 있었냐?”
“허헠! 들켰네염! 시, 실은여… 온니짱 상상하면서 딸치고 있었어여! 온니짱의 성스럽고 굵고 아름다운 그것을 상상하면서 가버리고 있었는데 막 연락이 왔네여! …아앗! 온니찡과 전화하면서 가버려엇!”
“와… 너 그거 예전에 바뀐 목소리로 말했으면 진짜 나 욕정했겠다.”
이럴 때는 참으로 바뀐 목소리가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그것과는 별개로 곧장 본론을 내놓는 민국이었다.
“심심하다.”
“심심하세여.”
“놀자.”
“노세여.”
“너랑 놀자고.”
“어멋! 지금 데이트 신청하시는 건가여? 행님! 지 이래봬도 슈퍼슈퍼 울트라 아메리카노한 연예인들도 감히 엄두를 못 내는 인물이에여! 그런 인물을 고작 놀자는 명분으로 만나고 싶으신 건가여? 면봉으로 확 귀 파버릴 거예여!”
“치킨 사줄게.”
“곧장 나감여.”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옷을 갈아입는 민국이었다. 역시 치킨의 위력은 어느 곳에서든 강대하고 굉장하다.
* *
“민철이 그 녀석은 이제 좀 포기했나 보더라.”
“민철? 아, 쿠왁느님이여?”
“그래. 너에게도 쪽지 안 오지?”
고개를 끄덕이는 서라였다. 참으로 안도가 되는 결과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것은 사실상 서라가 자기 관리를 잘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보통 서라 또래 아이라면 연상의 남자가 다가오면 어찌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을 텐데 말이야.’
그러다가 얽혀서 의도치 않게 사귀게 되고 말이었다. 하지만 서라는 이럴 때만큼은 강단 있게 나가는 모습이었고, 싫은 건 싫은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면으로 볼 때 참으로 줏대도 있고 뭐 하나 단점 없는 아이였다.
“앗! 행님! 저기 15000원 치킨점으로 가지여! 구수하고 향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맛나 보이는 곳이네여!”
“야 인마. 저기 보기보다 맛별로야. 내가 아는 9900원짜리 치킨점 있다. 맛도 더 좋고 양도 더 많으니까 거기로 가자.”
“힝… 행님은 지금 사랑스럽고 아리땁고 사랑스럽고 큐티하고 사랑스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15000원 치킨이 아닌 9900원짜리 치킨을 소개시켜주려는 건가여? 너무해서 배춧잎을 넣어드리고 싶네여!”
“너의 그 사랑스럽고 아리땁고 사랑스럽고 욕정스럽고 사랑스럽고 색기 있고 사랑스럽고 덮치고 싶은 하나뿐인 모습에 15000원짜리 치킨을 사주고 싶지만 9900원의 치킨이 더 맛있다는 나의 정성스러운 설득을 신뢰하지 못하는거니?”
“이응이응!”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팔짱을 끼면서 대범하게 몸을 돌려 서라를 쳐다보는 민국이었다.
“어디 한 번 그럼 애교를 부려 보거라. 어떤 애교를 부리느냐에 따라 너는 먹고 싶은 치킨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
“허읏!”
마치 전설의 용사가 전설의 스승에게서 ‘이 검과 이 검 중 무엇을 고를 것이냐.’라고 물음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는 서라였다. 이윽고 골똘히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만 기다리셈여! 필살기 준비해드림!”
“오냐.”
오래간만에 녀석의 애교를 볼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민국은 기대했다. 이윽고 민국에게서 몸을 돌린 서라가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엉덩이를 뒤로 툭 튀어나오게 한 다음에 가슴을 굽혔다.
목은 유연하게 들어 보였고 그 상태에서 두 뺨에 양손을 묻고 있었다. 사람들이 거닐어 다니는 길거리인지라 애교를 부린다는 게 심히 어려울 수도 있는데, 서라는 곧잘 수행하는 모습이었다.
“온니찡! 혼또니 혼또니 L!O!V!E!”
“…….”
“온니찡을 향한 나의 사랑은 L!O!V!E! 다른 말로 표현해도 L!O!V!E!”
‘와, 슈밤.’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의도적으로 껌뻑이면서 고개를 좌우로 갸웃갸웃거리는데, 그것이 마치 토끼를 연상케 하는 것 같아 귀여운 감정이 엄청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귀여움은 정의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는 거 같은데 민국은 그 사람의 말에 몹시 공감했다.
‘엇, 어엇!’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돌연 무슨 일인지, 민국은 불끈하고 샘솟는 욕정에 허리를 숙이게 되었다. 툭 튀어나오려는 무엇인가에 순간 난감해하는 민국이었다.
“이, 이런!”
“온니찡! 어디 보세여 나를 똑바로 봐주세여~ 온니찡을 위한 사랑은 오직 나 하나! LOVE~!”
“야, 야 잠깐… 타임. 이제 됐어.”
서라를 급히 말리는 민국이었다. 그러면서 곧장 건물 근처의 의자에 앉아 보이는 모습. 서라는 애교를 받다 말고 갑자기 중재하는 민국의 행동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읭?’하고 그를 보았다.
“왜 그러셈여?”
“아니, 잠깐만.”
민국은 순간 자신의 불끈 솟은 용감한 엑스칼리버를 눈길로 확인했다. 미친,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건가? 아무래도 오늘 낮잠 도중 꾸었던 꿈 때문인 것 같았다. 자꾸만 서라를 볼 때마다 그 꿈의 서라가 떠올라서 민국을 난감케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애교까지 부리는 귀여운 서라를 보았으니 더 할 뻔자….
“잠깐만 앉아있다 가자.”
“의잉… 수상하시네여! 마치 무언가 굵고 아름다운 물건을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에여!”
굵고 아름다운 물건이 맞았다…. 그저 드립으로 친 서라였지만 민국은 진심으로 난감해 했다. 이윽고 서라가 민국에게 총총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한 쪽 팔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키려 했다.
“야… 야 인마!”
“헤헤! 빨리 일어나시져! 카와이한 귀여움에 매료되었다 해도 치킨점은 가주셔야 해여! 온니짱!”
으아, 미치겠다. 안 그래도 미칠 지경인데 한 쪽 팔에다가 얼굴을 부비부비거리면서 아양을 부리니… 민국은 더욱 불끈 솟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상황에 또 억지로 일으키는 서라 때문에 민국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툭.
“읭?”
자신의 아랫도리 치마 근처로 이상한 감촉을 느낀 서라였다. 이윽고 고개를 내리 숙인 서라였다. 민국의 청바지를 뚫고 나오려는 우람한 무언가를 발견한 서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히, 히이익!’
‘야 그러니까 내가…!’
‘지, 진짜 발정나심! 소름!’
이라고 평소라면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민국도 그런 대사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서라는 민국의 그것을 보고도 크게 당황하거나 그런 리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서라도 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었다.
“서, 서라야?”
“…….”
민국의 그곳을 내려다보던 서라의 고개가 조심스레 올라간다.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떨리고 있었고,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
그런 서라의 모습을 생전 처음으로 보는 민국으로선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귀여움의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치, 치킨 맛이 얼른 보고 싶네여!”
뒤늦게서야 리액션을 취하면서 민국의 팔에 끼고 있던 팔짱을 빼고 물러나는 서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