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너와 나, 꿈을 꾸다.>
‘…그랬구나.’
저도 모르게 씁쓸하게 속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입술에 친근한 미소가 달아올랐다. 대충 서라를 만나게 되면 어찌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 *
“도착했어. 내려와.”
택시를 타고 서라의 동네에 도착한 민국은 연락을 취했다. ‘오케바리!’하고 애써 활발하게 소리친 서라가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저택 근처에서 마주하게 된 두 사람. 서라가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오! 아까랑은 다르게 노출이 아님!”
“…민망하니까 그 이야기는 하지 마 인석아.”
아침에 전신 노출을 선보였던 민국이 그리 야단치자 서라가 ‘데헷.’하고 웃음 지었다. 민국은 쓰게 미소 짓다가 곧 서라를 향해 말을 이었다.
“서라야.”
“왜 부름!”
“내가 오늘 일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았는데 말이야.”
서라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허나 다음으로 들려온 민국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없었던 일로 하자.”
“…….”
순간 경직.
“잘 생각해보았는데, 이건 내가 도무지 책임 질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
“…….”
“그리고 난 은별이랑 사귀고 있잖아? 너도 알지? …일단 지금 그 건 때문에 은별이랑 살짝 마찰이 있지만 일단 걔는 네가 있었던 거 모르니까.”
단 한 번도 이토록 무책임하게 행동한 적 없다. 허나 오늘은 달랐다. 때문에 서라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결정한 거야. 그냥 오늘 일은 서로 없었던 걸로 치자. 알았지 서라야?”
“아….”
잠시 벙찌는 서라였다. 마치 큰 충격을 먹었다는 얼굴. 허나 머지않아 애써 납득한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음!”
“알아들었어?”
“…응! 형 말대로 하겠음!”
여전히 웃는 척이다.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음! 형은 은별이 누나랑도 사귀고 있으니까, 내가 거기에 끼어들면 두 사람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는 거 아님?”
“그렇지.”
“그러니까 형 말대로 하겠음! 그게 나에게도 좋을 것 같고!”
웃으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주하며 서라가 웃자 민국도 덩달아 웃는다. 그 모습에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싶었는지 서라가 곧장 뒤로 몸을 돌렸다. 얼굴을 안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나 먼저 들어 가볼게! 부모님이 집에 라면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어서….”
“라면? 맛있는 건 안 해 주시고?”
“우리 엄마가 해준 라면은 초특급 라면이라서 제일 맛있음!”
말도 안 되는 조크에 민국이 살짝 웃어준다. 마주하길 꺼려하는 서라는 그대로 손을 들어 인사하며 저택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어, 그래.”
그리고 민국도 마찬가지로 인사하고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척하면서 다시 서라를 바라보았다. 저택의 현관으로 차츰 이동하는 그녀의 뒷모습에, 민국은 머지않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야.”
“…….”
“너 왜 거짓말 치냐?”
품에 안긴 채로 뜸을 뜰이던 서라가 밝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님이 무슨….”
“어제 기억 다 떠올랐거든? 네가 술 취해서 나한테 했던 소리도 다 떠올랐어.”
서라는 그때 술에 잔뜩 달아 올라있던 상태라 모르겠지만, 민국은 전부 기억한 상태였다. 어제 그녀가 진심을 담아 내뱉었던 고백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너 나 좋아한다며.”
“…….”
“좋아하는데 왜 자기 맘을 모르냐고 막 울었잖아.”
“…….”
그런 적 없다고 시치미 때려 했다. 하지만 민국의 따뜻한 품에 계속 안겨 있자니 서라는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당사자에겐 기억나지 않는 취중진담이었지만, 그 소리가 결코 거짓이 아님은 서라 입장에서도 느꼈다.
“다 기억했어 자식아. 그러니까 모른 척 시치미 때는 것도 끝났어.”
고등학생이고 뭐고,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나이 불문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서라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윽고 그녀가 ‘핫!’하고 살짝 웃음 짓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형! 무슨 소릴 하는 거임? 내가 왜 형을….”
“자꾸 거짓말 치네. 그럼 여기서 놔줄까?”
“…….”
“놔주길 바란다면 놔줄게.”
여기서 놓는다면 서라와 민국은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친근한 남매 사이는 무리일 터였다. 처음엔 아무 일 없던 듯 친근하게 굴겠지만, 결국은 오늘을 떠올리며 사이가 멀어지리라. 그것을 직감했는지 서라 또한 언뜻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민국은 얄밉게 재촉했다.
“말하지 않으면 놓는다?”
“…….”
“놓으라는 거지?”
결국 민국이 안고 있던 서라에게서 손을 회수하는 순간이었다. 덥썩하고, 서라가 민국의 옷깃을 꽉 부여잡았다. 완고하게 쥐어 잡는 그녀의 작디작은 손을 바라보던 민국이 그대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틈엔가 민국을 바라보는 서라의 얼굴은 울상이 따로 없었다.
“좋아해.”
“…….”
“오빠를… 좋아해….”
“…….”
“너무 너무… 좋아해….”
결국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서라였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서글프게 흐느끼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민국. 머지않아 포근히 그녀를 품에 안으며 중얼거린다.
“그렇게 얘기하면 좋았잖아.”
“흐윽… 흑흑!”
울고 있는 그녀를 껴안은 민국은 상냥했다. 결국엔, 두 여인이 동시에 민국을 연모하고 있던 것이다. 한 여인은 다툼을 통해 비로소 연인 관계가 되었지만, 나머지 여인은 그로 인해 버림받은 신세. 결국 민국은 숨기고 있던 또 다른 여인의 진실한 마음을 깨닫고 포옹해주었다.
‘좋아.’
두 여인의 속내를 알게 된 민국이었다. 이제 앞으로 어떡해야 될까? 하지만 어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얼마지 않아 의지가 깃든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민국은 작심했다.
‘결정했어.’
* *
“…….”
결정하긴 얼어 죽을. 민국은 떡진 머리로 눈을 뜨자마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꾼 거 맞나?”
현실인가 싶을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그딴 로리콘스러운 꿈을 꾸었단 말인가? 지금 민국이 사귀고 있는 사람은 서라가 아니라 은별인데 말이었다! 심지어 스토리 라인도 되게 이상했다.
현재에서 한참 전의 과거로 돌아가서는… 파뿌리 시상식 이후 4P 사건이 있었을 때 서라의 속마음을 알아채게 되어 고백을 하고 사귀게 되었다는… 굉장히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심지어 술을 마시고 날 좋아한다고 했다고? 허허.’
꿈속에서 아주 흐릿하게 나온 과거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어떤 내용인지는 적절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술버릇이 울상을 짓고 우는 것인 서라…. 그리고 흐느끼면서 민국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단다… 미친… 믿을 수가 있나.
“신이시여, 대체 저에게 이딴 꿈을 꾸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또 다른 세계의 이야기마냥 아주 생생하게 다가오네요.”
“…그래, 아주 생생하게 꾸더라.”
“으악!”
갑작스레 나타난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민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질겁하는 그를 보면서 은별이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리 찔리길래 그렇게 놀라시는 걸까~? 마치 꿈속에서 바람이라도 핀 것처럼.”
“꾸, 꿈속에서 바람을 피우는 건 내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일이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두는 게 좋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낭자!”
“그래. 네가 베개를 붙잡고 부비부비거리면서 ‘으응~ AT필드 파괴~.’하는 이상한 소리만 안 했으면 그냥 넘어갔을 거야.”
AT필드 파괴라….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서라와 고백을 해서 사귀게 된 이후 이야기로 아청법에 매우 어긋나는 행위를 한 것이….
“아, 아니야! 나는 네가 알고 있는 사람과 절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사람과 널 둘 다 갖기 위해 양다리를 피우진 않았다!”
“…지금은 양다리 아니고?”
꿈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양다리는 양다리다. 물론 현실에서의 양다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로… 민국 스스로도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었지만 말이었다. 그래도 이래봬도 현실 속의 민국은 나름대로 일편단심…의 남자였다. 줏대가 은근히 없었을뿐.
“사랑한다 은별아. 난 오직 너뿐이야. 왜 날 못 믿니? 왜 이렇게 잘 생긴 남자를 못 믿어! 뭐가 그리 불안해서 그래? 내가 잘 생겨서 그래? 그럼 내가 못 생기면 좋겠니!”
“어. 그냥 팍 못 생겨져라.”
“헉.”
민국은 얼굴을 만지면서 말했다.
“야, 안 돼. 그럼 하렘 건설 못하잖아.”
“…팍씨 뿔로 까버릴까 보다.”
어찌 됐든 간에 침대에 엉덩이를 걸터앉는 은별이었다. 그녀의 두 손에는 접시가 들려 있었는데, 그 접시 위에 컵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태연하게 건네면서 말하는 은별이었다.
“자, 받아.”
“뭡니까 이건? 설마 독약은 아니겠지요?”
“맘 같아선 독을 왕창 뿌려서 주고 싶지만, 네 얼굴 꼬라지 봐서 특별히 다른 걸 넣은 거야. 그러니까 안심하고 먹기나 해.”
까칠까칠한 은별이의 말투였지만 행동은 상냥하기 그지없다. 그런 은별이의 패턴을 감안할 때 그녀가 건네준 잔의 액체도 결코 나쁜 것은 아닐 것이리라.
민국은 잔을 들어서 안을 확인해보았다. 분홍색 빛의 액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마셔봐.”은별이의 말에 따라서 천천히 홀짝여보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앵? 헐?’하고 저도 모르게 감탄하게 되는 민국이었다.
“와, 이거 뭐냐. 맛 죽이네.”
“그치? 가족이랑 제주도 여행 갔는데 어쩌다 보니 신기한 주스가 있더라고. 그 주스 하나 사서 가지고 왔던 거야.”
“오, 설마 나 생각하면서 사신 겁니까?”
“…좀 다물고 먹어줬으면 해.”
역시 츤데레다. 그 귀염성은 어딜가나 떨어지질 않는다. 홀짝 액체를 입에 머금던 민국이 말했다.
“그런데 신경 쓰여서 그러는데, 꿈속에서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랑 으쌰으쌰했다는 게 무슨 소리지?”
“푸합!”
저도 모르게 머금던 액체를 뿜어버리는 민국이었다. 다행히 컵 안에 뿜어서 문제는 없었다. 민국이 입가에 묻은 액체를 소매로 닦으면서 뻘뻘 땀을 흘렸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오 은별 낭자? 내가 언제 꿈속에서 그대가 알고 있는 사람과 으쌰으쌰….”
“방금 전에 네 입으로 스스로 말했잖아. 내가 알고 있는 지인이랑 으쌰으쌰했다고. 그리고 그렇게 부비적부비적거리면서 좋은 얼굴을 지었던 거 보면 남자는 절대 아니고…. 애초에 예나 그 여자도 네 당황하는 표정을 보아선 결코 아닐 것 같고.”
“어, 엣흠흠! 아, 갑자기 오줌 마렸다. 은별아, 잠깐 길을 비켜줄래? 나 화장실 좀 가게.”
“못 가. 말할 때까지 절대 못 가.”
단호하게 말하는 은별이었다. 사실 볼 일도 그다지 마렵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민국은 난감했다.
“그, 그걸 꼭 알아야겠니 은별아? 어디까지나 꿈이잖아?”
“그래. 꿈이지. 하지만 내가 꿈속에서 다른 남자랑 으쌰으쌰하면 넌 궁금하겠어 안 궁금하겠어?”
“와이 없애버릴 거다 그 자식!”
분노하는 그를 보면서 피식 웃은 은별이었다. 다시 정색하며 추궁한다.
“누구야? 너랑 꿈속에서 그런 짓을 한 여자가.”
“…….”
사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꿈속에서 아는 여자가 나오면, 무의식적으로 그 여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민국은 절대 서라에게 여동생으로서의 호감만 가질 뿐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가진 적이 없다.
아니… 옛날에 아주 조금… 조금은 가졌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디까지나 이편단심 강은별 한예나로서….
‘아!’
좋은 방법을 떠올려낸 민국이었다. 이윽고 정색하면서 말하는 민국이었다.
“정말 듣고 싶어?”
“그래.”
은별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은 곧 ‘훗’하고 미소 짓더니 대범하게 말했다.
“예슬이.”
“뭐?”
“예나 여동생이야. 초등학교 다니는 로리아이 예슬이.”
“…….”
“후훗, 나도 꽤나 로리콘이었던 모양이군.”
턱에 손을 올리면서 말하는 민국의 모습에 진심으로 소름이 끼친 듯 뭐 이런 게 다 있냐하는 표정으로 물러나는 은별이었다.
“진짜 진심으로 소름 끼쳤어… 너….”
“후후, 어찌 됐든 현실에선 아청법에 어긋나는 행위는 할 생각이 없는 관계로 예슬이는 패스!”
사실 은별이가 예슬이를 잘 알고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예나의 여동생은 몇 번 이야기를 하면서 들어왔었다. 그러니 은별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조건에도 들어맞게 된다. 비록 오해를 사게 된 예슬이가 쪼매 불쌍하긴 했지만… 그래도 서라였으면 왠지 신경 썼을 것 같은 마음에 민국은 그렇게 둘러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