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240화 (240/369)

240화

유이는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사실상 유이에게는 아저씨가 세상의 전부였다.

그 때문에 살아가게 되었고 그 때문에 삶의 방식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은 전부 거짓이었음에 그동안 안고 있던 신념이 산산조각나버린 것이다. 유이의 남자 친구는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팔이 떨리는 걸 느꼈다.

'뭐 그런 나쁜 새끼가 다 있어? 무슨 그런!

'흐윽….'

격노하던 것도 잠시였다. 눈물을 흘리는 유이를 달래는 남자 친구였다.

'유이야,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어떻게든….'

슬퍼하는 그녀에게 다가가 안아주는 그였다. 유이도 인간의 따뜻함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은 마음에 주저없이 그를 껴안았다. 동시에 느껴지는 뭉클한 감촉에 남자 친구는 또다시 야한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애써 그것을 물리치는 그였다.

다음 날이었다. 유이는 남자 친구의 위로를 통해 그나마 안정된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 비록 남자 친구인 그가 상상하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같은 일은 밤에 벌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일단 학교는 가자 유이야.'

'…….'

'그런 놈 때문에 학교까지 그만둘 필요는 없어! 어떻게든 졸업은 하자!'

그의 달램에 유이도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학교를 다니고 싶어 했던 유이였다. 설사 큰 일을 당해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굴뚝이라도, 나중에 후회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게 남자 친구의 바램이었다. 다시금 기운을 내면서 자기 손을 붙잡는 유이의 모습에 남자 친구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가자!'

학교 교복이 고아원에 있어서 유이는 결국 사복으로 교문을 향하게 되었다. 이따금씩 주변 학생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남자 친구의 굳건한 손에 의지하여 교문으로 향하게 되었다.

물론 교문을 지나가던 도중에 선도부에게 잠시 찍히는 일은 있었지만 사정을 대강대강 설명하니 풀어주는 모양새였다.

'거봐, 아무런 일도 없잖아.'

'…….'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였다. 말수가 부쩍 줄어든 그녀의 모습에 아슬아슬한 기분이 드는 그였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유이와 교실로 향했다. 아무리 고아원에서 큰 충격을 먹은 유이라 할 지라도 결국 교내의 친구들은 그녀를 반갑게 맞이해주리라. 왜냐하면 그녀는 반에서 만큼은 적어도…. 드르륵.

'…….'

'…….'

문이 열렸다. 동시에 반 학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뒷문으로 돌아갔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가 향하는 것은 학생들 대부분의 기본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뒷문을 열고 나타난 두 사람의 모습에 학생들은 일동 침묵하는 모습이었다.

'……?'

'…….'

사복 차림으로 등장했기 때문일까. 허나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게 톡 튀는 옷차림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 듯 싶었다. 다들 유이를 쳐다보는 눈길이 탐탁치 않았으니까 말이었다.

'뭐야… 니들 왜 그래?'

유이의 남자 친구가 함께 노는 동성 친구들에게 다가가서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유이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회피할 뿐, 대답은 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유이는 서서히 정서가 불안해지기 시작했음을 증명하듯,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던 이유는 간단했다. 유이에 관련되어 아침부터 급작스럽게 퍼진 어떠한 소문 때문이었다.

유이가 평소 머물던 고아원에서 벗어나 밤 늦게 외박을 자주 한다는 둥… 길거리에 이상한 남자들을 만나면서 이상한 짓을 한다는 둥… 전혀 원인을 알 수 없는 소문이 퍼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문이 퍼진 까닭에 대해서는 유이도 쉽사리 알아챌 수 있었다.

'…….'

그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유이가 그토록 믿고 좋아했던 어른이 말이었다. 그리고 그가 퍼트린 이상한 소문은 당연히 평소 유이를 질투하던 친구들의 귀에 들어가 더욱 큰 루머로 완성된 것이었다.

'무슨 소리야 이 새끼들아, 유이가 그럴 리 없잖아!'

자기 친구 무리에게 거칠게 한 마디하는 그녀의 남자 친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왕성하게 퍼진 소문이 잠잠해질 리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중간고사 날 갑작스레 학교를 나오지 않았을뿐더러, 서서히 분위기나 태도 같은 것이 암울해지고 소극적으로 변하고 있었으니까 말이었다.

유일하게 그녀를 붙잡아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애인뿐이었다.

3일째가 되었다. 사그라 들 줄 알았던 소문은 이미 교내로 퍼지고 있었고, 유이는 결국 학교를 나가지 않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그의 집에 여전히 머물고 있던 유이는 남자 친구의 설득을 듣게 되었다.

'하, 하지만 유이야. 그래도 학교는 나가야….'

'교복도 없잖아….'

'교복은 어떻게든 구하면 돼! 선생님에게 말씀만 드리면 구해주실 거야.'

'…….'

유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상 원인은 그게 아니었다. 그건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

하지만 유이의 그런 방어적인 행동에 이제 슬슬 지칠 기미를 보이던 그였다. 결국엔 맘속으로 조금은 갖고 있었던 의문을 입속에 올리게 되었다.

'설마 유이야… 그 소문대로 너 그런 짓을 한 건….'

'…….'

'아니지? …아닐 거야. 그래도 유이인데….'

유이는 천천히 고개를 올려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게 된 남자 친구는 어깨를 흠칫하더니 곧 시선을 피하면서 몸을 돌렸다.

'그, 그럼 나라도 갖다올게! 혹시라도 오고 싶은 맘이 생기면… 그때라도 꼭 찾아와!'

'…….'

끼이익, 쿵. 문이 닫혔고 작은 방안에 유이는 홀로 남게 되었다. 하나뿐인 창문에선 햇볕이 쨍쨍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유이는 그 햇볕을 피하고 싶은 맘에 구석진 그늘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무릎을 끌어 모으고 눈을 그냥 멍하니 뜬 채로 시간을 죽일 따름이었다.

또다시 오후가 찾아왔다. 결국 학교를 결석한 유이는 구석진 곳에서 혼자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학교를 다녀와서 유이를 보게 된 남자 친구는 그녀의 씁쓸한 뒷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유이야.'

'…….'

'많이 힘들어? 나 좀 봐봐.'

결국 그도 참지 못하고 유이와의 대화를 단도직입적으로 시도하려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유이는 뒤척일 뿐 그에게로 몸을 돌리진 않았다. 그 모습에 그도 그만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나 좀 봐봐 유이야. 나 좀 보라고!'

홧김에 강하게 그녀의 몸을 돌리면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였다. 하지만 마주하게 된 유이의 눈길엔 이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순간 울컥하는 맘이 든 그가 그녀의 눈길을 마주하면서 추궁한다.

'아니지? 학교에 퍼진 소문들… 다 거짓말이지?'

'…….'

'왜 대답을 못해…. 아니라고만 하면 되잖아. 왜 나랑 대화를 안 해줘… 응?'

그럴 거면 왜 자기 방에서 이토록 머물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자신이 투명 인간도 아니고 왜 일 년 동안 함께 했던 사이를 무시하듯 이렇게 변해버렸단 말인가. 하지만 유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위에 올라 타는 그였다.

'말해 유이야. 아니지? 너 그런 애 아니잖아. 적어도 내가 일 년 동안 보았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은 없었어.'

'…….'

'아니면 설마 숨기고 있던 거야? 숨기고 있었는데 설마 들켜서….'

애초에 중학생 3학년이었다. 참을성을 가질 수 있는 큰 그릇이 되기에는 역부족인 나이였다. 결국 며칠 채 되지 않아 그도 맘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학교에 퍼진 소문들이 너무나도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이는 그녀의 분노에도 멍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말 안한다 이거지? 그럼 내가 여기서 무슨 짓을 저질러도 다 상관없다 이거지?'

그동안 많이 참아왔다, 하지만 이젠 무리다. 사춘기의 성욕을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던 그였다.

결국엔 거친 숨결과 함께 유이의 몸을 탐닉할 맘을 먹는 그였다. 천천히 그의 손길이 유이의 풍만한 가슴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물컹하고 그의 손길이 가슴에 닿는다. 얼굴을 들이밀면서 모든 것을 범하려고 하는 행세에 유이는 그냥 막연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삶이란 게 이토록 씁쓸한 거일까?

사람의 믿음이란 것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마련이고, 자신이 믿어왔던 신념도 결국 돌이켜보면 모두 거짓이란 것일까?

'유이야… 유이야, 하아….'

'…….'

그녀의 몸을 거칠게 애무하던 그였다. 그의 얼굴이 유이의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욕정에 굶주린, 한 어른의 모습이 그에게서 비추었다. 그와 닮은 눈빛을 지니고 있는 남자 친구의 모습에 유이는 그제야 눈을 크게 뜨면서 정신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저도 모르게 그를 강렬하게 밀쳐내는 유이였다.

'크윽…!'

그녀의 밀쳐냄에 결국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주저앉는 남자 친구였고, 유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후다닥 현관문으로 달려나갔다.

'유이야!'

그의 분노 어린 호명이 들려왔지만, 유이는 끝까지 무시했다. 이곳 역시도 그녀가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아 하아…!'

유이는 미친 듯이 뛰었다. 자신이 평생을 함께 해온 이 마을이, 이 도시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밤 하늘의 구름도 무리를 지어 지나가며 유이를 비웃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도망치고 뛰어봐도 그녀의 어둠은 달아날 생각을 안했다.

'하아, 하아…!'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로 가면 그녀가 이 고독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발버둥을 치기 위해 발을 놀렸지만 결국 그녀가 도착한 곳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였다.

'…….'

고아원. 대문 앞. 결국 그녀가 향하는 장소란 자신에게 익숙한 곳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젠 이곳이 그녀가 생각하던 그런 아름다운 장소가 아님을 알고 있다. …끼이익.

'……!'

대문 앞에 있던 유이였다. 저벅 저벅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더불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유이는 후다닥 전봇대 쪽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그리고 고개만 내밀어서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이에게 익숙한 동성 친구 한 명이 어떤 봉투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흑… 흐으윽….'

'…….'

표정은 울상이었다. 닭똥 같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그녀는 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곳으로 봉투를 옮기고 있었다.

유이는 그 모습에 심장이 쿵하는 걸 느꼈다. 따지고 보면 아저씨의 욕정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나 유이가 그 찰나에 완강히 거부하여 도망쳤고, 결국엔 그 욕정의 대상이 뒤바뀜되어 자신의 친구가 당하게 된 셈이었다.

'흐으으윽.'

'…….'

평생을 안고 가야 할 그 엄청난 트라우마에, 친구는 너무나도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주시하며 유이는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과 서글픔을 느꼈다.

차마 고아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십 분이 지나고 나서야 얼굴의 물기를 닦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혼자서 이를 지켜보던 유이는 전봇대를 붙잡은 손이 파들파들 떨리는 걸 느꼈다.

'…….'

세상은 애초부터 아름답지 않았다.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고, 신념에 맞춰 행동한들 그 신념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밖에 존재치 않았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려버린 유이는 가슴이 자꾸만 욱신욱신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

하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유이는 이제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아버린 이상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용서는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에 그녀는….

'…….'

뚝, 뚝, 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하나 꾸욱 눌러가면서 유이는 전화기를 자신의 귀에 부착하고 신호음이 가는 걸 기다렸다. 잠시 후, 한 남성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경찰서였다. 피로와 현실에 찌들어 있는 그 목소리에 유이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하지만 곧 공중전화기를 두 손으로 부여 잡고….

'무슨 일이십니까? 말씀하십시오.'

'도와…주세요….'

입을 열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                                *민국의 생명력을 채워준 다음 날이었다. 유이는 그의 생명력을 채우기 위해 민국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말고는 현재 생명력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윽고 군말없이 계단을 올라 그의 집 앞에 도착한 유이였다.

똑똑. 느리지만 정확하게 노크를 해본다.

"……?"

하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반응은 없다. 한 번 더 시도를 해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상하단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잠시… 왠지 문 너머에서 시끄러운 음악 소리 같은 게 들려오는 걸 느꼈다. 유이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붙잡아 보았고, 곧 가볍게 열리는 걸 확인하게 되었다.

"후훗! 나는야 정의의 마법소년 메들로리카 히어로!"

"……."

"전, 트윈테일이 됩니다!"

그리고 들여다보게 된 거실 내부에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여자 교복을 입고 생쇼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딱 봐도 사이즈가 안 맞아서 이런저러한 부분이 꽉 끼는 모습이었는데… 어디서 구해온 건지는 둘째치고….

"허억!"

"……."

컴퓨터의 BGM이 너무나도 시끄럽다. 전신 거울을 보면서 BGM 장단에 맞춰서 신나게 쇼를 하고 있던 민국은 현관문의 유이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 이, 럴 수가! 결국 내 하나뿐인 유일한 취미인 여장을 들켜버리다니!"

"……."

"크읏, 어쩔 수 없군…. 이렇게 된 이상 나의 비기! 기억을 잃게 만드는 공수도 8단 키보도 8단 슈퍼 미들킥 펀…!"

투다다다닥!

"끄악!"

참 요란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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