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믿어온 환상이 깨졌다. 십육여년을 믿어왔던 그 믿음이 순식간에 깨져버리고만 것이다. 유이는 도망나왔다.
'…유이야?'
또다시 그녀는 절친의 도움을 받기로 생각했다. 또 느닷없이 초인종을 누르고 당도한 유이의 모습에 절친은 할 말을 잃었다. 저번처럼 핏기가 없었고 얼굴이 새하얗게 창백해져 있었다. 이를 본 절친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유이를 붙잡으면서 추궁했다.
'유이야 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은 게 절친의 마음이었다. 유이도 결국엔 확신을 해버린 마당에 피할 겨를이 없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들어 절친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흐윽.'
천천히 눈물을 쏟아내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절친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절친의 부모님은 또다시 나타난 유이 때문에 상당히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자식 이길 부모는 없었다.
'어디도 갈 수가 없어….'
늦은 밤 시각, 절친이 잠에 들었을 때 유이는 홀로 깨어 있는 상태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불로 자기 몸을 보호해본들 자꾸만 아저씨의 짐승 같던 눈빛이 떠올라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것은 그녀가 안고 가야 할 크나큰 트라우마가 자명했다.
'어떡해야 하는 거야….'
유이는 생각했다. 고아원의 자기와 함께 방을 쓰던 친구가 이미 겁탈을 당해버렸다. 그리고 고아원 아저씨가 친구를 다루는 행동을 보았을 때 한 두 번 해본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유이는 이런 위험한 일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 해야 하는 지 알고 있었다.
'신고….'
하지만 경찰에 신고를 하려는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십년여간을 함께 해온 아저씨다. 아무리 그가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동안 쌓아온 애정과 온정이 있었기에 유이는 차마 그런 행위를 할 용기가 없었다.
'…….'
사실 아직도 그녀는 아저씨가 그러지 않는 사람이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절친의 집 창문으로 쨍쨍한 햇볕이 유이의 얼굴을 비춘다. 유이는 잠결에 그 빛을 맞게 되자 뒤척이다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오늘까지만 머물게 해주는 거야. 더 이상 쟤 집에 드리지 마렴.'
'하, 하지만.'
'저번에도 머물게 해줬으면 충분하잖니? 아니면 저런 애를 계속 우리 집에 데리고 있자고?'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 절친은 이미 방에 없다. 방 바깥에서 어머니와 말다툼을 나누는 것이리라. 유이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유이는….'
'됐어. 더 이상 얘기하기 싫단다. 저런 부모도 없는 애, 애초에 네 친구로도 어울리지 않았어.'
마지막에 들려온 그 목소리에 유이는 울컥했다. 부모도 없는 애… 부모도 없는 애…. 평소 유이는 부모가 없단 말을 들어도 크게 울컥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라고 해도 무색할 정도로 자신을 도와주는 아저씨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녀에겐 그런 보호자도 존재치 않았다.
'…….'
그랬다. 유이는 애초부터 혼자였다. 그녀에게 가족이 있는 것 같아도, 실상은 혼자였던 것이다. 그 고독함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느끼게 된 유이는 눈물이 새어 나오는 걸 참았다.
'어쨌든 내 말대로 하는 게 너의 미래에도….'
끼이익, 문이 열어젖혀진다. 절친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도렸다.
그곳에는 부스스한 머리로 서 있는 유이가 있었다. 절친의 어머니도 자신의 이야기가 혹시 새어 나간 건 아닌기 잠시 당황하는 표정이었지만, 곧 이 집에서 우위를 잡고 있는 건 자신임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고는 뻔뻔한 얼굴을 지었다.
'…….'
유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왠지 억울하고, 몹시 분하고 화가 났지만 참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다였다.
이윽고 유이는 허리를 꾸벅 숙여 그녀의 어머니에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절친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를 비껴 지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절친은 씁쓸히 계단을 내려가는 유이를 보면서 당황한 듯 소리쳤다.
'유, 유이야!'
'어머 어머, 뭐 저런 애가 다 있대.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안 하네.'
'엄마…!'
어머니의 막말에 절친이 말렸지만, 유이의 귓속엔 이미 그 대사가 파고든지 오래였다. 그리고 가슴이 저릿저릿해지는 것도 당연지사. 하지만 유이는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유이에게 보호자라는 건 존재치 않았으니까. 그녀는 늘 혼자였으니까.
'외로워.'
그녀는 처음으로 그 감정을 느꼈다.
고아원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그녀가 머물 수 있는 집도 없다. 결국 근처의 공터에서 그네를 타면서 오랜 시간을 있었다. 교내로 가고 싶어도 아저씨가 찾아올까봐 차마 갈 수가 없었고, 간다 한들 정상적인 모습으로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유이야!'
'…….'
그런 그녀에게 찾아온 건, 절친에게서 소식을 들은 유이의 남자 친구였다. 그의 음성에 유이는 고개를 들었다. 잔뜩 걱정 어린 얼굴로 공터에 찾아온 그녀의 남자 친구는 허리를 숙이고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헉! 헉!'
'…….'
'유이야! …집에서 나왔다며? 무슨 일이야?'
집. 그녀가 살던 고아원. 남자 친구는 유이를 배려해서 그것을 집으로 표현했다. 유이는 돌연 그 고아원에서의 모든 추억들이 뇌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그만 울컥하는 감정을 느낀 그녀는… 천천히 그네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벅저벅 남자 친구에게로 다가가 그를 꽈악 껴안았다.
'유, 유이야?'
이제 막 사춘기 시절을 겪느라 혼란에 빠져 있던 그는, 급작스런 포옹과 더불어 가슴의 말랑말랑함이 느껴지자 얼굴을 되게 붉혔다. 하지만 유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를 꽈악 안고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남자 친구는 한참을 난감해하며 얼굴을 붉혔지만, 결국 그녀의 스킨쉽을 마다하지 않고 똑같이 포옹해주었다.
* *
교내 교문 앞에는 한 아저씨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는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대할 때와 비슷한, 거짓의 탈을 쓰고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순수한 학생들 입장에선 그냥 착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지나가던 학생 무리를 향해 다가가는 아저씨였다. 모자를 벗으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애들아, 혹시 최유이라는 애 아니?'
'아저씨 누구…? 근데 최유이요?'
다들 최유이에 대해서는 모를 리 없다. 교내에서 워낙 유명하고 예쁜 아이였으니까.
'그래. 최유이를 돌보는 보호자거든. 그런데 유이가 어제 갑자기 집에 나간 뒤로 들어오질 않아서 말이다.'
'아….'
참 기가 막히게도, 아저씨가 말을 건 무리는 유이와 같은 반인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유이의 잘 나가는 장점들에 은근 질투를 하고 시샘을 하던 여학생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갑자기 요즘 들어 학교 안 나오고 그러던데요? 설마 어디로 엇나간 거 아니야?'
그녀들의 질투심을 오랫동안 삶을 살아온 아저씨 입장에서 모를 리 없다. 단숨에 그 속내를 꿰뚫은 그는 잘 됐다는 듯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를 곧 인자한 미소로 대체하며….
'그렇구나. 후우… 사실 유이가 말이다. 요즘 들어 외박하는 일도 잦아지고 해서 말이야.'
'네?'
'외박이요?'
'그래. 어딜 다녀왔는지 물어도 도통 대답도 안 하고, 가끔은 옷을 줄인 불량한 모습으로 밤 늦게 나가곤 해서 말이다.'
웅성웅성.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서로 간에 수근거리기 시작하는 학생들이었다. 본래 여자들이란 이야기에 거짓을 붙이고 거짓을 붙여서, 막장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걸 좋아하니까…. 그 요소만 곧잘 이용한다면 원하는대로 이야기가 잘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
학생들의 웅성거림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드, 들어와 유이야.'
'…….'
유이의 남자 친구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자기 방을 보여주었다. 정말이지 조촐하고 평범한 방이었지만… 다른 친구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일찍이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부모님도 맞벌이에 지방에서 생활하셨고, 그만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생활하고 있던 것이었다.
'마, 많이 춥지? 보일러라도 켜야겠다.'
'…….'
'어디 남자 옷이긴 한데… 갈아입을 옷이라도 줄까?'
초라한 그녀의 몰골을 보면서 남자 친구는 성심성의껏 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유이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뒤늦게서야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자각하게 되었으니까. 그녀는 혼자였다.
'…….'
'자, 자려고?'
땅바닥 구석진 곳에 드러눕는 유이를 보면서 남자 친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이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무슨 상상이 든 건지 얼굴을 붉히던 남자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면서 서랍의 옷을 꺼내 바닥에 둔다.
'여, 여기 혹시 입을 일 있으면 이거 입어….'
'…….'
유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면서 남자 친구는 뭔가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차마 추궁할 분위기가 아님에 그저 똑같이 따라누울 따름이었다.
깊은 밤이 찾아왔다. 유이는 시름시름 앓기를 몇 시간, 소등을 하고 나서도 잠에 빠질 수가 없었다.
유이의 남자 친구 역시 자취방에 여자를 들인 건 처음인지라 가슴이 많이 떨리고 흥분될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씩 흘긋 흘긋 유이를 곁눈질할 때마다, 그녀의 살아 있는 라인과 더불어 툭 튀어나온 엉덩이가 자꾸만 남성의 성욕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킨 남자 친구가 이윽고 용기를 내서 운을 띄운다.
'유, 유이야.'
'…….'
'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유이가 입을 열었다.
'안 자….'
'그, 그래? 그렇구나….'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남자 친구는 이대로 있기도 좀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짐짓 웃음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지, 집이 많이 좁지? 남자 방이라서 많이 더럽기도 하고.'
'…….'
'하하….'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다. 결코 웃음이 날 유이가 아니었다. 오바하던 남자 친구도 그제야 생각이 바뀌었는지 다소 진지한 얼굴을 짓다가 말했다.
'유이야.'
'…….'
'말하기 어려우면 얘기하라고는 안하겠지만… 그래도 남자 친구인 나에겐 사정을 말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면 내가 널 도울 방법이라거나… 그런 것도 다 생각할 수 있을 텐데….'
'…….'
설득을 하면서도 자꾸만 그녀의 엉덩이로 시선이 간다. 흥분하려는 아랫 도리를 잠재우려고 노력하면서 남자 친구는 천천히 유이의 등으로 은근슬쩍 다가갔다.
'응? 유이야….'
'…….'
'조금만 얘기해줘. 가끔은 나한테 기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그때만 해도 유이는 아직 사람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고로 맘이 약해져 있는 그녀에게 그런 다가옴은,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결국 유이도 그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몸을 돌리게 되었다. 남자 친구인 입장에선 가슴이 쿵하고 울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녀의 우아한 자태가… 그녀의 예쁜 얼굴이… 정말이지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것이다. 꿀꺽하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는 그였다.
'정말…?'
'그, 그래! 정말이지! 무엇이든 말해줘. 내가 다 도와줄 테니까!'
마치 남자 친구인 자신밖에 도와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펑펑 치는 그였다. 그것이 믿음직해보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갑작스레 마음의 자리가 비어져 버린 유이는 그 자리를 채워줄 또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
유이는 다시 한 번 사람을 믿어보고 싶단 줄기를 잡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날 도와주던 아저씨….'
'…….'
'그 아저씨는 사실….'
흘러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며, 유이는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유이 에피소드는 앞으로 2편이면 끝이 납니다.
으헠헠허컿커헠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