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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38화 (238/369)

238화

그리고 다음 날, 절친의 집에서 취침을 한 유이는 중간고사를 앞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차마 갈 수가 없었다. 어제 고아원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일로 말미암아 공부에 대해선 아예 신경을 쓸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유이야….’

절친은 유이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게 생각했다.

‘제발 한 번만요! 좀만 있게 해주세요!’

‘애가 진짜….’

절친은 제정신이 아닌 유이를 위해서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맞벌이를 하는 집안이라서 절친이 집을 나가면 유이는 이 집에 혼자 남게 된다. 절친은 어디 오갈 데 없는 유이를 부디 이 집안에 오늘까지는 계속 들이길 바랐다.

‘고아에다가 보호자도 없어.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할 거니?’

‘제가 책임질게요! 그러니까 한 번만요!’

절친의 애원 어린 부탁에 결국 어머니도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부여 잡았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결국엔 들어주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난 진짜 쟤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그리 알아라.’

‘네!’

그렇게 유이는 절친의 도움으로 홀로 집에 남게 되었다. 중간고사를 보러 교내에 가기 전, 가방을 멘 절친이 유이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유이야. 나 학교 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야해? 엄마한테 간신히 부탁해서 허락해주신 거야.’

‘…응.’

어제 밤에 보단 정신이 돌아온 유이였다. 그녀의 단답형 대답에 그래도 안심한 듯 절친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유이를 뒤로하고 교내로 향하는 절친이었다. …얼마지 않아 절친의 부모님도 맞벌이를 위해 직장으로 출근하였고, 결국 절친의 방에는 유이 혼자만 남게 되었다.

‘…….’

유이는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아니, 그것은 고뇌라기 보단 내적 갈등과 더불어 혼란에 가까웠다. 아저씨가 정말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하려고 한 것일까? 설마 자신을 어릴 때부터 키워준 건 이 날을 위해서였을까? 어쩌면 어떤 병에 걸려서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크게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유이였다.

‘…….’

결국 일말의 희망을 붙잡고 싶던 유이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곧장 방문을 박차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칠게 헐떡이면서 현관문의 잠금을 해제하고 밖으로 나왔다.

‘허억, 허억!’

제발… 제발 아니길… 제발 아니었길…! 그 마음을 가지고 유이는 곧장 고아원으로 뛰어갔다. 폭우가 내리던 어제 새벽과는 다르게 지극히 화창한 아침. 햇볕이 쨍쨍한 가운데 땀을 흘리면서 고아원까지 전력 질주한 유이는, 대문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그리고 자신의 한 줄기 희망이었자,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주던 그 문 앞에 당도했다. 유이는 허리를 천천히 세우면서 정면의 대문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대문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유이가 가까이 하기 어려운 감정을 주고 있었다.

‘…아닐 거야.’

하지만 마음을 다잡은 유이는 결국 대문을 열기로 결심했다. 끼이이익… 웅장한 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열리는 대문이었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수풀의 마당으로 발길을 들이는 유이…. 저벅 저벅…. 물이 잔뜩 들어간 신발을 신고 초라한 몰골로 고아원의 건물 근처에 도착했을 때였다. 유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마치 어제 일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그곳에는 유이가 평상시에 보던 점잖은 인상의 아저씨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저씨와 함께 동행해서 열심히 수풀들을 가꾸고 있는 고아원의 아이들이 보였다. 걔 중에는 유이와 같은 방을 쓰는 동성 친구도 있었다.

‘응?’

이윽고 아저씨가 몸을 돌려서 유이를 바라본다. 유이는 그의 눈길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초라한 그녀의 몰골에 아저씨는 잠시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곧 인자한 미소를 피웠다. 유이는 벌벌 떨리는 손을 어찌해야 할 지 몰라하면서도, 아저씨를 향한 두려움의 시선은 내리지 않았다.

이내 저벅저벅 유이에게로 다가온 아저씨였다. 그의 손이 천천히 유이를 덮쳐온다.

유이는 본능적으로 눈을 찔끔 감아버렸다. 어제의 일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녀를….

‘왔구나 유이야.’

‘…….’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하지만 감아버렸던 눈도 그 상냥한 음성에 결국 다시 뜨고 말았다. 유이는 차마 믿을 수 없단 얼굴로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어제의 그 사악하고 어떤 충동에 미칠 듯이 발광하던… 그런 모습은 없었다. 오로지 그곳에는 늘 유이를 반겨주고 아껴주던 그 인자한 미소만이 떠올라 있었다.

‘미안하다 유이야, 어제는 내가 정신이 아니었어. 너무 힘든 일이 쌓이고 쌓여서 말이다.’

‘…….’

‘너에게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해.’

아저씨의 사과에 유이는 파들파들 떨리던 팔이 서서히 잠잠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 역시 뭔가 오해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아저씨는 결코 사람의 마음을 무시하는 행위를 쉽게 할 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나랑 대화하기 싫니 유이야?’

‘아, 아니에요….’

그제야 입을 때는 유이의 모습에 아저씨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일단 옷이 더러우니 씻어야하지 않겠니. 얼른 가서 씻고, 그 다음에 다시 대화하자꾸나.’

‘네….’

그리고 유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고아원 건물의 화장실로 홀로 향했다. 두근두근 거리던 가슴이 서서히 안도하고 있음에, 유이는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결국 중간고사 시험은 못 보고 말았다. 다만 그래도 자신이 알던 아저씨와 다시 행복하게 지내게 되었음에 유이는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걱정이 들어 연락 온 절친에게도 고맙다고 인사한 유이였다.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이제 어떤 행동에도 오해는 하지 않겠다고, 아저씨를 신뢰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 유이는 다시 평소의 생활로 돌아왔다. 중간고사 시험은 못 봤지만 그래도 선생님에게 부탁하여 양호실에서 따로 선생님과 일대일로 시험을 볼 수 있게끔 허가되었다. 그건 교내에서 평소 성실하게 행동하던 유이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

마저 못한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유이는 열심히 노고를 치렀다. 근데 그러던 도중 똑똑하고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이는 흠칫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유이야, 선생님이란다.’

‘…네.’

계속 꺼림칙한 감정이 들었지만 유이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선생님이 문을 열고, 유이가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고.’

유이에게 볼 일이 있어 찾아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선생님의 시선이 침대에 누워 있는 한 아이에게로 향했다. 막 잠에 들기 위해 이불을 덮어 썼던 그 아이는, 선생님의 등장에 천천히 뒤집어썼던 이불을 벗어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대화 좀 나눌 게 있어서 그러는 거니 유이 너는 신경 안 쓰고 공부만 열심히 하렴.’

‘네….’

아저씨의 말에 유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던 와중, 유이와 잠시 눈을 마주쳤던 같은 방의 친구의 모습에 잠시 가슴이 저릿하는 걸 느꼈다. 뭔진 모르겠지만… 친구의 눈이 죽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쿵. 문이 닫히고 홀로 방에 남게 된 유이. 꺼림칙한 기분이 계속 마음 한 곳에 남았지만, 그래도 별 거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유이는 마저 공부에 집중했다.

그렇게 못 보았던 중간고사 시험을 양호실에서 홀로 보게 된 유이였다. 친구들은 왜 중간고사 시험 날 오지 못한 것인지 유이에게 질문을 했지만, 유이는 아파서 그랬다는 이유로 대강 둘러댔다. 어찌 됐든 시험도 무사히 잘 보고… 모든 게 다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싶었다. 그 날이 오기까지 말이었다.

‘허억, 허억.’

유이는 늦은 밤 화장실을 가기 위해 고아원의 로비로 나온 참이었다.

‘허억, 허억.’

중간고사 시험도 이제 끝났겠다, 그나마 좀 안심한 마음으로 다시 현재의 생활을 즐기려던 유이. 하지만 어느 순간이었을까.

‘……?’

‘허억, 허억.’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상야릇한 소리에 유이는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소리가 너무나도 미세해서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자세 미끄러지지 않게 잘 잡아 이 년아!’

‘허억, 허억, …네.’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하자 평소 청소 도구들을 집어넣는 창고였다. 창고는 3평 남짓으로 아침에 수풀들을 가꾸고 로비를 청소할 때만 사용하였는데… 자꾸 그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야릇한 소리에 유이는 천천히 문을 열어 안쪽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

그리고 얼마지 않아 눈을 크게 뜨면서 기겁하는 유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서는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음란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마냥 음란하다고만 보기도 뭐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짐승처럼 서로를 애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그렇게. 더 세게 하라고.’

‘허억.’

‘에이 씨발! 똑바로 못해!’

짜악!

‘……!’

인자한 미소는 마치 전부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아이를 힘껏 때리는 아저씨였다. 자신이 그토록 신뢰하고 믿었던 아저씨…. 하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의 탈이었고, 진짜 얼굴은 유이가 충격을 먹을 만큼 무섭고 괴리감이 넘쳤다.

심지어 그 아저씨에게 범해지고 있는 아이는… 유이와 같은 방을 쓰던 동성 친구로서, 평소 앞으로를 어떻게 살아갈 지 얘기를 나누던 좋은 친구였다.

‘제발… 제발 용서해주세요….’

‘용서는 무슨 용서야. 제대로 하라고. 여기서 퇴출당하고 싶지 않으면.’

‘흐윽, 흑….’

‘…….’

부모도 없고 보호자도 없는 십대는 약하다. 거짓의 탈을 쓴 짐승들에게 언제라도 습격을 당할 수 있단 뜻이다. 괜히 고아가 세상에 일찍 물드는 게 아니었다.

‘더 빨리… 더 빨리!’

‘흐윽…!’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하는 자신의 친구를 보면서 유이는 그 저릿했던 가슴의 아픔이 무엇인지 원인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믿지 못하겠단 얼굴로 유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쿠당탕! 그러다 얼마지 않아 발에 힘이 풀려서 그만 바닥에 주저앉는 유이였다.

‘…뭐야?’

근처에서 들려온 소리에 아저씨는 행위를 멈추고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려 있는 미세한 문틈 사이로 누군가가 주저 앉아있음에 그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이윽고 저벅저벅 유이에게로 향하는 아저씨였다. 끼이익… 문이 열어젖혀지자, 거짓의 탈을 벗은 그의 진심 어린 눈이 유이를 마주한다.

‘…….’

‘…….’

벌벌 떠는 유이를 내려다보면서 아저씨는 정색을 하고 있었다. 열어젖혀진 문 너머로 보이는 동성 친구의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친구 역시도 설마 유이에게 이런 식으로 발각 당할 줄은 몰랐다는 듯, 크게 놀란 눈을 짓고 있었다.

‘…….’

‘…….’

이윽고 아저씨가 선선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유이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거짓의 탈을 썼다. 그것은 인자한 미소였다. 하지만… 이젠 그것이 거짓임을 유이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 유이, 결국 봐선 안 될 것을 봤구나.’

‘…….’

‘그런데 어차피 이전에 한 번 봐서 알고 있지 않았니? 아저씨 이런 사람인 거.’

이미 중요한 것도 다 들킨 마당에 더 이상 숨길 생각은 없다는 것처럼, 뻔뻔스러운 얼굴로 그는 유이의 머릿결을 매만졌다.

‘너흰 어디도 도망갈 수 없어. 왜냐면 도와줄 부모도, 사람도 없거든.’

‘…….’

‘유이 너도 결국엔 나에게 의지하게 될 거야. 나에게….’

그리고 머릿결을 만지던 그의 손이 서서히 유이의 얼굴로 향하는 찰나였다. 유이는 본능적으로 이전의 공포가 새록새록 떠올랐는지, 그의 손을 그대로 내쳐버렸다. 그리고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로비를 뛰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며 공포에 젖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아저씨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 번 도망가봐… 고아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부모도 없는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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