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
"하핫, 아하하핫…."
민국은 생각했다. 사스가 최유이!
"이야, 새삼스럽게 유이 씨의 손놀림이 대단… 아니 그전에 같이 넘어질 뻔했는데 그걸 용케 저 혼자 넘어지게 하는군요 하하하하하!"
"……."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민국을 말없이 쳐다보는 유이였다. 분명히 방금 전의 손길은 민국이 무언가를 의도하고 행한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진짜 삐끗해서 넘어졌단 증거를 얻어내기가 어려운 실정이었고, 고로 유이는 추측으로만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으흠, 손바닥 밀치기는 너무 위험한군요. 다른 게임합시다."
"……."
결국 의도대로 될 것 같지 않으니 계획을 변경하는 민국이었다. 그런 민국이의 꿍꿍이를 조금은 의심하는 눈빛으로 유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뼉을 치면서 민국이 다른 게임을 제안했다.
"다리 찢기 합시다! 누가 더 다리 많이 찢나!"
"……"
"가위바위보 진 사람이 다리 찢기!"
"……"
"아! 그리고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게 원하는 걸 하나 요구할 수 있는 겁니다!"
"그건…."
"후후, 겁나십니까? 겁나요? 최유이 겁나냐?"
"……."
사실상 겁날 이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다리 찢기 같이 몸으로 하는 건 유이가 질 가능성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일 유이가 이긴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에게 한 가지 요구할 수 있으니까… 그걸 이용하자고 생각했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 가위바위보를 시작하는 민국이었고 유이도 가위바위보 중 하나를 냈다. 그러자…
"우훗!"
"……"
이긴 것은 민국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에서 일자로 다리를 하고 있던 유이는 뒤에 뺴고 있던 다리를 조금 물러나게 하면서 다리 양 사이를 벌렸다. 그런 유이를 보면서 민국은 '후후후후'하고 음탕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 날을 위해서 나는 그동안 다리 찢기를 해왔다. 이래봬도 유연성 제로인 남자애들에 비해서 조금은 넓게 다리를 찢을 수 있단 말이지. 고로 이 게임은 무조건 나의 승리!'
그리고 이미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내기가 허가된 이상! 민국은 유이에게 어마무지한 짓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민국이었다.
"후후후후."
"……."
"자! 가위바위보!"
그렇게 가위바위보가 반복되었고 참으로 기가 막히게도 민국의 연승이 이어졌다. 유이도 순간 자신의 운빨에 대해 내심 불안하게 될 정도로 말이었다.
무려 일곱 번이나 승리한 민국! 그러자 결국엔 다리를 완전히 찢게 될 상황이 되어버렸다. 민국은 그래도 유연함 때문에 다리를 상당히 많이 찢은 유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포기하시지요 유이 씨. 아무리 그쪽이 다리 찢기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이쯤되면…!'
생각을 하기 무섭게 유이의 다리가 아주 일자로 정확하게 뻗어졌다. 지켜보던 민국이 '허억'하고 소리를 낼 정도였다.
"사스가… 무슨 유연성 물고기입니까?"
"……."
유연성 물고기가 무슨 표현인지도 모를뿐더러, 유이는 자기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유연성을 발휘했다. 이제 여기서 가위바위보를 진다면 유이의 패배가 분명했다. 민국도 이번 가위바위보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주먹에 구멍을 만들고 눈으로 쳐다보는 둥, 별의별 짓을 다 했다.
"자! 마지막이다! 가위바위!"
"……."
"보!"
혼신을 다한 민국의 일격이었고, 그 일격에 유이도 맞받아치듯 가위바위보 중 하나를 내놓았다. 그러자 결과는…!
"뜨악!"
"……."
민국의 패배였다. 유이는 무표정이었지만 속으로 크게 안심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절규하면서 머리를 박박 긁던 민국. 하지만 곧 침착하게 숨을 내쉬더니 자기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린다.
"훗, 그래도 두 번만 이기면 된다. 두 번만 이기면 유이 씨에게 이러쿵 저러쿵 짓을 할 수 있다."
"……."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자고 유이는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가위바위보!
"뜨악!"
이번엔 민국에게 있던 제우스 신이 유이에게 옮겨간 듯하다. 그토록 연승 기록을 쌓고 있던 민국이 무참하게 패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절규하는 민국을 보면서 유이는 서서히 자신의 연승 기록이 높아지고 있음을 눈으로 보았다. 어느 덧 민국은 다섯 번이나 패배해서, 대신해서 다리 찢기를 열렬히 하고 있는 상태였다.
"으어어어…."
"……."
어중간하게 찢은 다리로 버티던 민국이었다. 가위바위보를 하기 위해 한 손을 바닥에서 때는 순간 그만 바닥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으악!"
"……."
"슈밤!"
엄연히 민국의 패배였다. 민국은 이렇게 어이없게 진 게 억울한지 바닥으로 주먹을 치고 있었다. 유이는 그런 민국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민국이 소리쳤다.
"훗… 좋습니다. 어차피 나의 완연한 패배! 어떤 요구든 다 들어드리지요! 발을 핥으라고 하던가 가슴 마사지를 해달라고 하던가 얼굴에 뽀뽀를 해달라고 하던가! 그 무엇이든 다 들어줄 테니 말씀하십시오!"
분명히 지금 언급된 소원들은 하나같이 민국이 갈망하고 간절히 여기는 것들이 자명했다. 유이는 잠시 침묵하면서 민국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용히…."
"……."
"있어주세요…"
"……."
그리하여 민국은 더 이상 유이에게 아무런 게임도 제안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유이도 어차피 한 시간 동안만 그와 놀아주기로 했기 때문에 그냥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낼 따름이었다.
"끄으응."
"……."
"유이 씨, 아무리 그래도 그 소원은 영 아니지 않습니까? 비제이 맞아요? 어떻게 소원을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가 있습니까. 나에 대해 무엇이든 파헤칠 수 있는, 70억분의 1 확률로 나타날 수 있는 굉장한 기회인데! 나를 좋아하는 무수한 여자들은 이 순간을 얻고 싶어도 얻지를 못한다구요!"
그건 사실이었다. 분명히 민국에게 호감이 있는 몇몇 여자들은 민국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기회가 한 번이라도 생기길 간절히 바라고 바랄 따름이었다. 하지만 유이는 달랐다.
"조용히…."
"…옙."
그녀는 그저 혼자 있는 게 좋았다. 상대방이 잘 생기든 키가 크든 상관없다. 이젠 그저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혼자서 생활을 하는 게 하염없이 좋았다. 어찌 보면 외로움에 익숙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더 이상 사람들에겐 상처 받는 일은 없을 테니까….
"요즘은 뭐하고 지내십니까?"
"……."
지루하게 지나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던 유이였다. 그녀의 고개가 아주 조금이나마 흘끗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민국도 어차피 조용히 있으란 요구를 받은 만큼, 조용히 대화나 하자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 요 몇 개월 동안 얼굴도 못 보고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도 모르잖아요. 궁금해서 질문하는 겁니다."
"……."
특별한 사이도 아닌데 왜 그걸 궁금해하는 것일까? 유이는 별로 탐탁치 않았다.
"그냥…."
"이 사람 나랑 대화하기 싫구만!"
"……."
정곡을 찌르는 듯한 민국의 말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따지면 민국과 대화를 하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그녀가 힘들 때 조금이나마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었다.
민국처럼 방방 뛰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까 같이 있다 보면 조금 지루한 감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뭔가 마음이 닿는 건 있었다.
"조용히…."
하지만 유이는 자신의 그런 속마음조차 끝까지 외면하려고 들었다. 어찌 보면 그건 중증이었다. 육체적인 병이 아닌 마음의 병으로서, 그동안 쌓이고 쌓인 절망과 원한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래도 너무 그렇게 모든 걸 외면해선 좋을 거 없을 겁니다 유이 씨."
"……."
"그러다 정작 힘들어지면 주변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그때도 또 혼자서 그렇게 시름시름 앓으실 겁니까? 때때론 기댈 사람도 있어야지요."
다소 진지해진 민국의 물음이었다. 애초에 민국도 유이의 그런 상태를 모를 리가 없었다. 강철남 사건을 제일 앞에서 본 관계자였으니까. 유이는 민국의 말에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어휴 참."
"……."
끝까지 대화를 안 하는 유이를 보면서 민국은 머리를 박박 긁었다. 더 이상 대화를 해봤자 나아질 게 없음에 민국도 걸터앉았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유이가 올려다보자 민국이 말한다.
"화장실 갔다 오려는 겁니다. 같이 가실래요?"
"……."
그냥 가벼운 농담이었다. 이윽고 화장실로 저벅저벅 향하는 민국. 그런 그의 뒤태를 잠잠히 쳐다보던 유이였다.
"……."
유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었다. 혼자만의 고뇌와 잡념은 항상 자신의 감정을 갉아먹고 힘겹게 만들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인형처럼 평생을 살아가는 게 그녀에게 올바른 해결책일 지도 몰랐다.
"으차차차! 차가워라!"
겨울답게 차가운 물이 장난 아니었다.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민국의 소리에 유이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닫혀있던 화장실 문이 열리고, 민국이 볼 일을 보고 손을 닦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에구, 벌써 30분이 지났구만요."
"……."
"이러고 있어봤자 어차피 좋을 것도 없을 거 같으니 그냥 바로 약 만들어드릴게요. 잠시 안방에서 나가 있어보셔요."
"……."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 약을 만든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단 한 가지였다. 아무리 사람과 접촉이 없는 유이라 할 지라도 성에 대한 걸 이 나이에 모를 리가 전무했다. 하지만 경험이 전무한 그녀였기 때문에,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무표정의 얼굴로 안방에서 나가려는 찰나였다.
"억!"
"……."
그런데 그 찰나였다. 갑자기 들려온 비명 같은 탄성에 유이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쓰, 쓰벌!"
"……."
"유, 유이 씨!"
가슴을 부여 잡고 극심한 통증을 하고 있는 민국이 보였다. 그는 언제 정상인처럼 행동했냐는 듯, 전신에 식은땀을 금세 뻘뻘 흘리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서서히 엎어지는 모습이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왜 그러…."
"크윽!"
유이도 그가 농담이 아닌 것 같아 질문을 하던 때였다. 민국이 더 극심하게 통증을 호소하면서 아예 엎드려 버렸다. 가슴을 부여 잡고 거칠게 숨결을 내뱉는 민국의 모습에 유이가 잠시 혼란스러운 듯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휴대폰을 꺼내들어 119에 연락하려고 했다.
"안… 돼요."
"……."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민국이 돌연 손을 가까스로 들어서 유이의 행동을 제지하는 것이었다. 원인을 모르던 유이 입장에선 민국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는데….
'젠…장!'
민국은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면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너무 일상이 되어버린 터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에게 첫 번째로 걸렸던 저주의 조건 말이었다. 숨통을 앗아가려던 희귀병을 흑마법사가 처치해주는 대신 걸었던 조건….
"크악…!"
"……."
은별이가 항상 곁에 있었고, 가슴을 만지게 해주는 게 일상이 되다 보니까 잠시 잊고 있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게 실수였다. 그만 민국의 생명력이 바닥까지 닿고만 것이었다.
"유, 유이 씨… 으아…."
"……."
극심히 통증을 호소하는 민국의 모습에 당황하던 유이가 결국엔 다가와서 한 쪽 무릎을 굽혔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조마조마해지는 유이였다. 민국은 가까스로 힘을 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렇게 어이없는 죽음은 원치 않았다.
"가…."
"……."
"가슴 만지……."
유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귀기울였다. 왠지 모르게 괴로워하는 민국의 모습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간절함을 느끼게 되는 유이였다.
"가슴 만지게 해줘요…."
"……."
"가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