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232화 (232/369)

232화

<유이와 민국>

‘크큭, 역시 인간은 재밌어.’

경찰을 불렀으니 당연히 더 이상 민국이 장난을 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강철남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그것만으로도 민국은 큰 건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다음번에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 있으면 강철남에게 대신 화풀이를 하러 와야겠다고 민국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 *

추운 겨울이 찾아왔다. 12월이 찾아온 끝에 대학교도 방학을 시작했고, 민국 일행도 이제 각자 집에서 취미 생활을 하는 나날에 이르렀다.

물론 지나가는 시간과 관계없이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여인도 있었다. 마음처럼 풍만한 가슴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이 많지 않아 다소 차가워 보일 수 있는 인상의 그녀. 최유이였다.

“…….”

타닥 타닥. 오늘도 그녀는 불이 꺼진 방안에서 말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화면에 드러나는 C언어 관련 문자들을 둘러보면서 최유이는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었는데….

“…….”

돌연 머리가 핑하고 어지러워지는 걸 느낀 최유이였다. 하지만 결코 무리를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 현상이 알려주는 사실이 있던 것이다.

‘약….’

참으로 형언하기 부담스러운 물건이지만, 민국의 액체가 담겨 있는 약을 찾기 시작했다. 요 몇 개월간 액체를 마셔야 살 수 있는 조건을 갖게 된 이후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약의 효과가 줄어드는 시간이 되면 조금씩 현기증이 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이는 지금이 그때라는 것을 알고 약을 찾기 위해 서랍 속을 뒤적였다.

“…….”

그러다가 약을 발견하고 그것을 들어 보이다가, 얼마지 않아 행동을 중지하고 만다. 약을 들어 보인 채로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유이였다.

‘없어….’

오래 갈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 다 써버린 모양이었다. 하긴 그래도 2개월간은 이 병 하나로 버틴 셈이었다. 이젠 채우러 갈 때가 되기도 했지.

“…….”

민국을 다시 찾아뵈러 가는 것도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다만 방문하고 싶은 맘은 크게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이는 가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그녀는 휴대폰을 두들겼다. 차마 전화 통화를 하면 또 장난을 칠까봐 문자를 전송하는 유이였다.

[약이 없어요]

그래도 문자로 하니까 실제로 말을 할 때보단 다소 편리했다. 민국의 반응은 어떠할지 말없이 휴대폰을 지켜보던 유이. 그러자 그때였다.

우우우웅! 문자를 보낸 지 수초도 되지 않아 발신음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유이는 다소 침묵했다.

그냥 문자로 얘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민국은 연락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유이는 그것은 차마 피하고 싶어서 연락을 거부한 뒤 문자 메시지를 다시 보내려고 했다.

우우우웅! 그러자 또다시 울리는 휴대폰의 연락!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마는 유이였다. 귀에 그것을 부착하면서 천천히 운을 띄운다.

“여보….”

“여보? 여보라고 하셨습니까? 훗. 유이 씨도 내심 저와 결혼을 하고 싶으셨던 모양이군요.”

“…….”

또 휘말리랴, 유이는 본론을 바로 얘기하려고 들었다.

“약이….”

“훗. 말로는 약약 거리면서 사실은 저의 그것을 마시고 싶어 하시는 그 음탕함을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합니까? 하~ 나참~ 유이 씨. 저 이래봬도 여자 친구가 있는 사람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여인들이 너무나도 많아 이거 하렘이라도 차려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랑스러운 남자라고요! 그런데 그 사이에 유이 씨도 끼고 싶으신 겁니까? 끼고 싶으면 말씀을 하시지요! 저는 당신을 제 자리에 끼워주고 저는 당신의 가슴에 그것을 끼우고…! 이야, 이것이 말로만 듣던 진정한 합체인가?”

“약….”

“아차차차! 약을 마시고 싶으시단 말씀입니까? 설마 그 약이 병의 약이 아니라 제 소중한 부위의 약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후후, 유이 씨 이 음탕한 여자!”

“…….”

보통 사람의 멘탈이라는 게 어떤 환경에 계속 있으면 자연스레 성장하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그 환경이 아주 지독하고 인간이 적응하기 힘든 환경이라면 말이었다. 하지만 유이는 인간에게 마음을 저버렸다 한들, 기본적인 멘탈과 소양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애초에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본질은 사실상 바꾸기가 어렵기 마련이었으니까. 여튼 민국은 더 이상 건드리면 휴화산이 진짜 용암을 폭발시킬 거라 가늠했는지 적당한 타이밍에 끊었다.

“아무튼 오늘은 제 집으로 직접 오십시요! 저 추워서 집 나가기 싫습니다!”

“…….”

“푸헤헤헤헤!”

그리고 통화가 뚝 끊겼다. 유이는 통화가 끊기자마자 휴대폰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갈아입는 도중 출렁이는 그녀의 가슴은 오늘도 평화롭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추운 겨울에 맞게 옷을 두껍게 입은 유이는 검은 장갑을 손에 착용했다. 주로 손이 시릴 때 사용하는 장갑이었으나 오늘은 어쩌면 사람을 두들겨 패는데 쓰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 *

똑똑.

“아, 오셨습니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민국이 재깍 반응하고 안방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실로 향해서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마음처럼 넓은 가슴을 가진, 포근한 마음의 여자. 최유이가 가만히 서 있는 게 보였다. 민국은 첫 인상으로 유이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감탄하듯 말했다.

“이야, 오늘은 철벽 방어를 했군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두각이 나는 건 별 수 없나 봅니다.”

“…….”

“어쨌든 들어오십쇼.”

유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으로 입장했다. 민국은 그런 유이를 뒤로하고 일단 부엌으로 향해서 따뜻한 차를 가지고 왔다. 거실에 가만히 서 있는 유이를 향해서 앉으라고 말한 뒤, 따라서 자리에 앉는 민국이었다.

“웃차, 상냥한 남자답게 따뜻한 차 하나 대기해두고 있었지요. 약은 안 타두었으니 안심하고 드시기 바랍니다.”

“고마….”

“고맙다고요? 저도 제가 고마운 거 알고 있습니다.”

말 하나는 정말 줄기차게 잘 끊는다. 진짜 때리지 않으면 사람 말을 끝까지 안 듣는 타입인 걸까? 아니면 유이에게만 유독 이런 것인지! 이윽고 민국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유이 씨.”

“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못 보던 사이에 약간 공기화가 된 거 같은데.”

“…….”

공기화란, 존재감이 무라는 것을 의미했다. 확실히 유이는 민국과 특별한 사이가 아니다 보니 민국을 찾으러 올 이유가 없었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취미에 맞는 일들을 하고 있었고 말이었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은 은근히 남남인 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구라고 하기에는 유이가 한 살 많은 누나였고 말이었다.

“평안했어요….”

“그렇습니까? 허허, 다행이구만요.”

때문에 유이는 묘한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민국과 단 둘이 있는 걸 별로 좋게 여기지 못했을 뿐더러,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지독한 미숙함을 안고 있었으니까. 특히 강철남 사건 이후로 유이는 완전히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유이가 어색했는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민국이 그것을 보고는 ‘헐’하면서 놀라는 척했다.

“설마 지금 제 성스러운 그것을 마시고 싶어서 사람이 있나 없나 찾아보시는 겁니까? 유이 씨 무서운 사람이군요. 강간을 목표로 하는 게 취미였습니까?”

“…….”

“잠깐! 아직 저는 파멸 당하고 싶지 않소. 고로 지금 발언은 깊게 사죄하고 철회하도록 하지요.”

기가 막히는 타이밍에 문장을 철회하는 민국이었다. 유이도 괜히 폭력을 쓰고 싶지 않아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어찌 됐든 민국도 차를 홀짝이면서 돌연 인생의 한탄 서린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아무튼 인생 참 씁쓸하지요 유이 씨. 이놈의 여편네는 하나뿐인 남편을 두고 여행이나 가고 말입니다.”

“……?”

“아! 딱히 유이 씨에게 위로를 받고 싶다거나 막 심심해서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엇흠! 딱히 츤츤데는 남고딩 씨를 뒷담화 까기 위함에 대화의 장을 열려는 것도 아니지요!”

“…….”

“아무튼 이 여편네 나 혼자 두고 여행이나 가고 말이야! 으아! 아무리 가족 여행이라고 해도!”

민국은 머리를 박박 긁으면서 절규했다. 유이는 오랜만에 보게 된 그가 정말이지 이해불문인 행동을 하자 한참동안 침묵했다. 민국은 거칠게 혼자서 숨결을 내쉬다가 물었다.

“저에게 요 며칠 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유이 씨?”

“아니….”

“훗, 알고 싶어 환장하셨군요. 그 정도로 저에게 호기심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말씀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

“사실 제가 말입니다. 요 며칠 전에 강은별 이 여자가 여행을 간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때는 며칠 전으로 돌아간다. 구멍을 타고 강은별의 방으로 가게 된 민국은, 돌연 짐을 싸고 있는 강은별을 발견하고 질문하게 되었다.

“나의 여편네여. 그게 무슨 짐이오?”

“응? 뭐야 언제 넘어왔어?”

얘기도 없이 넘어오자 조금 불쾌했는지 눈빛을 날카롭게 하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사랑스러운 너의 큐티큐티한 얼굴이 보고 싶어서 참지 못하고 그만 찾아와버렸어! 미안하다 은별아!”

“…에휴.”

차마 웃는 얼굴에 침 뱉기는 싫었는지 숨결을 내뱉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은별이었다. 이윽고 가방의 지퍼를 닫으면서 말하는 은별이었다.

“어차피 이따가 가서 말하려고 했는데, 왔으니까 하는 수 없지.”

“응?”

“나 이틀 뒤에 가족이랑 제주도 여행 갔다 오기로 했어.”

“헐? 진짜?”

민국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어머니랑 아버지만 가는 여행이었는데, 아무래도 나도 같이 가길 원하셨나봐. 그래서 본래 일정이랑 달라져서… 갑작스럽게 바뀐 거라 나도 너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좀 고민을 했었거든.”

“허헝.”

민국은 잠시 당황한 얼굴로 몸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은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민국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제주도 여행을 갔다 오는 거였고 가족과 함께 갔다 오는 것이었는데, 뭐가 그리 크게 문제로 다가오는 걸까 의문을 품는 은별이었다.

“…뭐야? 내가 없는 게 그리 슬퍼? 어차피 3박 4일만 갔다 오는 건데?”

“3박 4일… 크윽!”

무릎을 꿇으면서 땅을 보면서 중얼거리는 민국이었다.

“3박 4일 동안 은별이를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이렇게 해서 아앙 그만해 더 쎄게 하지마 라는 소리 못 듣게 되는 셈인가! 크윽, 제기랄….”

“…미친놈이.”

“아니 아니! 농담입니다! 여하튼… 으아아, 은별이와 3박 4일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내 고추가 아프구나!”

“거기가 갑자기 왜 아파? 진짜 이상한 애야….”

그래도 자신과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괴로워하는 민국의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저도 모르게 뿌듯한 미소를 짓는 은별이었다. 그래… 뭐 여자친구인 은별이도 가족과 여행을 가는 것쯤이야 필요하긴 하겠지. 특히 겨울 여행이라면 좋은 추억 거리 만들기 좋을 것이었다. 하지만….

“응 민국아…. 응… 어려울 거 같아. 가족이랑 여행을 가기로 해서….”

“헐? 예나 너도?”

“으응… 오랜만에 친척들이랑도 만나고 같이 단합해서 부산 쪽 내려갔다 오기로 했어.”

친척이 부산에서 살고 있었고, 워낙 잘 사는 집안이었는지 예나 가족이 놀러가는 셈이었다. 예나 가족은 어지간히 친척들과도 사이좋은 관계였던 모양이었다. 심지어 날짜는 은별이가 제주도로 가는 날짜와 똑같았다. 혼자 있어야함에 허망함을 느낀 민국이 허탈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얼마나 가 있어야 하는데?”

“3박 4일…….”

“크윽, 여기서도 3박 4일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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