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서라의 심정은 조마조마했다. 설마 이름도 모를 어떤 낯선 사람에게 강제로 성폭행을 당할 뻔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 와중에 다행히 서민국이 나타나 도움을 주긴 했지만, 민국은 무슨 연유에선지 상당히 화가 나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생전 처음 보던 서라는 그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눈치만 볼 따름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서라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너 내가 안 구해줬으면 어떡하려고 했어?"
"의… 의잉…."
"그럴 땐 소리 질러야지 이 바보야! 왜 가만히 있던 거야?"
결국 버럭 화를 내면서 윽박 지르는 민국이었다. 그의 윽박에 어깨를 흠칫하던 서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그랬다간 모처럼 소개시켜준 온니짱에게 피해가 될까봐…."
"하아."
서라의 마음도 결코 나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적어도 일을 망치더라도 소리를 지르는 게 올바른 행위였었다. 민국은 더 이상 서라에게 화를 내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다음 번에는 이러지 마. 알았지?"
"…이응."
서라를 내려다보던 민국의 눈길이 그녀의 손으로 향한다. 이제 보니 아직도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쓰러움을 느낀 민국이 서라의 양손을 붙잡아서 떨리지 않도록 포개어주었다.
"잠시 이러고 있자."
"넹…."
"상태는 괜찮아?"
민국의 정성 가득한 질문이었다. 그 염려가 어린 질문에 서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괜찮음여…."
"괜찮긴 뭐가 괜찮냐. 손이 아직도 이렇게 떨리는데."
친한 여동생이 그런 꼴을 당할 뻔했음에 민국도 속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이가 어린 편이었고, 또래 애들처럼 순진함을 즐겨야 하는 나이였으니까.
"일단 목소리도 돌아오긴 했고, 돌아가자. 내가 집까지 배웅해줄게."
"으엉…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뎅…."
"입 다물고 오늘은 내가 하라는데로 해 인마. 겁도 집어먹은 녀석이."
본래 사복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 민국은 곧장 서라를 집으로 배웅해주었다. 그래도 목소리가 돌아왔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일을 중간에 망쳤으니 들어주지 않겠다고 하면 노발대발할 터였을 텐데.
'하지만 그것도 사실상 의도했던 말이로군.'
흑설 공주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성과를 이뤄냈음에 흡족하던 얼굴이었다. 그 악마의 본성을 민국은 미약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당연지사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한층 안 좋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목소리야 얻었다고 해도… 평생 지울 수 없는 악몽을 서라에게 안겨준 것이니까.
"지금 집에 부모님 계셔?"
"아, 아니염."
"그러냐. 에휴."
오늘 맞벌이 일이 워낙 늦어지시는지 아직 도착 못한 모양이었다. 민국은 서라의 집까지 들어가 그녀가 안정을 취할 때까지는 곁에 있어주기로 했다.
본래 이 집의 주인은 서라인지라 손님을 맞이하는 건 서라의 역할이었으나, 따뜻한 물을 떠주고 안정을 취하게 위로의 말을 해주는 건 민국이 하게 된 것이다. 서라는 민국의 오빠 같은 행위에 군말 없이 따뜻한 물만 홀짝였다.
"이제 어때? 좀 괜찮아?"
"이응 이응…."
"서라야. 어딨니?"
"어머니 오셨나 보네. 인사 드리고 그럼 나도 집에 갈게."
두 시간 동안 서라의 곁을 위로해주었으나, 그것만으로 서라의 마음이 안정화되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오셨으니 조금은 안심하고 돌아가도 되겠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서라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나서 서라의 방에서 나온 민국이었다. 서라의 어머니와 자초지종 예의삼아 얘기를 나누는 민국. 얼마지 않아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
혼자 남은 서라는 말없이 따뜻한 물만 홀짝였다. 사실 아직도 두려웠다. 자신이 혼자 있으면 정말 그런 끔찍한 일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평생 동안 이어질 정신적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정의의 기사처럼 나타난 민국 때문이었을까?
'의잉….'
서라는 그 트라우마에 대한 인상보다, 위험할 때 아무런 표현도 없었는데 자신을 찾아와서 도와준 민국에 대한 인상이 더 강렬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분명 이번 기말고사 시험을 끝으로 더 이상 서민국에게 맘을 잇지 않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는데….
끼이익, 쿵.
"으아! 열받아 죽겠네! 아오!"
곧장 벌거벗고 팬티 차림으로 보일러부터 킨 민국은 침대로 들어갔다. 내일 대학 수업이 일찍 있다 보니 일찍 자야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왠지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았다. 아까 전 그 어린 노무 사업가를 비롯해서, 자신들을 이용해먹었던 흑설 공주에 대해 여간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슈발! 맘 같아선 얼굴에 똥 뿌려버리고 싶다!'
도무지 화를 풀 방도가 없자 민국은 계속 씩씩거렸다. 말을 못한 서라의 심정도 이해되지만 한 편으론 답답하고! 일단 무사하다는 건 진심으로 안심이지만!
"크큭… 그래, 어디 한 번 당해보라고!"
민국은 음흉하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결심했다. 사실 그에겐 비장의 필살기가 있었다! 상대방의 정신과 멘탈을 박살낼 수 있는 엄청난 기술!
'오늘 너를 딸감으로 잡아주지!'
보통은 야동을 보면서 딸을 칠 테지만, 오늘 딸을 치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다. 위험한 일을 당할 뻔한 서라가 안쓰러워, 흑설 공주를 향한 분노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절대 흑설 공주가 예뻐서 한 번 범해보고 싶다는 남자의 본능적인 상상에 하는 행위가 아닌 것이었다.
"이럅! 이럅! 그 사업가 놈보다 네가 더 짜증난다 흑설 공주 자식아! 받아라 이 음탕한 년아! 푸슛푸슛!"
민국은 침대에서 혼자 허리를 들어 올리다가 내리면서 절정에 달하듯 다리에 힘을 주고 왔다리 갔다리 했다. 제3자가 보면 굉장히 추할 행동이었는데, 민국은 그러든 말든 오로지 분노에 몸을 맡기고 상상의 딸나라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민국아…."
내일도 같이 나갈 생각인지 의향을 묻기 위함에 구멍을 넘어서 민국의 집으로 찾아온 예나였다. 그녀가 민국의 방문으로 향해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크크크크! 받아라 암캐년아!"
"……."
"어? 예, 예나야! …으악! 멈추지 않아 으아아아악!"
천장을 향해 열심히 분출되는 민국의 액체! 예나는 이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그만 표정이 굳고 말았다. 정색을 하는 표정이 아니라… 희미하게 짓고 있는 미소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당황한 민국이 절정을 완전히 맞이하고 나서야 현자타임에 들어선 얼굴로 '예, 예나야! 이건 절대로!'하면서 해명을 하려고 했다.
"예, 예나야! 이건 그게 아니라…!"
"으, 으응 민국아…."
아무래도 잘못된 타이밍에 찾아왔다고 자각했는지 예나는 서서히 방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닫히는 방문 틈 사이로 예나는 짐짓 눈웃음을 짓는 걸 놓치지 않으면서 말했다.
"열심히 해…."
"……."
이미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예나는 한 번 더 치라는 듯 격려를 보내주었다. 그런 그녀의 격려와 함께 민국의 분노에 다달한 딸딸이는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콩딱지데스!"
서라는 무사히 본래의 목소리를 되찾았고, 방송에 다시 열심히 임하게 되었다. 물론… 레어한 섹시미 목소리를 잃어버렸으니 그게 아쉽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서라에겐 이전 목소리가 이미 애정 그 자체였고, 방송도 버릴 수 없는 인생과도 같았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보네.'
민국은 무슨 연유에선지는 몰라도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는 서라의 초청에 따라 그녀의 방에 당도한 상태였다. 서라는 자신의 방에 민국을 있게 한 채로 방송에 열중을 하였는데, 오랜만에 하는 방송이라 그런지 아주 시청자들과 죽이 잘 맞았다.
늘 성실하다가 방송을 갑자기 안하게 된 콩딱지 때문에 많이들 격노하던 시청자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ㅋㅋㅋㅋㅋㅋ]웃어대면서 좋아라 한다. 민국은 즐거워하는 서라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더 안정을 취해야겠지.'
아무리 겉보기로 괜찮아 보여도 그런 트라우마가 생기면 속내가 힘들 지도 모를 것이었다. 민국은 최대한 서라를 자신이 아끼는 동생답게 평생토록 보호해주고 싶었다. 이윽고 방송을 마친 서라였다. 파뿌리 TV 방송 프로그램을 끄면서 서라가 숨을 내쉬었다.
"휘유웅!"
"다 끝났냐?"
"오케바리쌤여! 이제 다시 콩딱지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온니찡! 온니찡의 랭킹 순위권이 2위로 추락할 걸 각오하세여!"
"후후후, 20위도 넘어오지 못하는 녀석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어리석구나."
"크, 크읏! 아픈 구석을 건드리시네여 냉혈한 사람! 하지만 나님의 비기 옷 벗어서 시청자들 끌어모으기만 시도한다면 지는 게이버의 메인 뉴스를 장식함과 동시에 인기 비제이가 되겠지여!"
"너의 알몸보다 내 알몸을 원하는 게이들이 더 많은 판국에 어림도 없지. 네가 벗는다면 나도 벗겠다!"
"히이익, 그렇게 동생에게 지고 싶지 않으신 건가여?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면 한 번쯤 후배를 위해 내려가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당!"
서로 막장 비제이로 인기도 많이 받고 있는 주제에, 유치하게 랭킹권 가지고 싸우는 두 사람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서라에게 저돌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집에 오라고 부른 거여? 별 이유도 없는 거 같은데. 네 방송 잘하는 거 봐달라고 찾아오게 한 거냐?"
"행님. 지는 파뿌리 TV에서 키라라는 별명을 가진 콩딱지예여. 내가 고작 그런 달풍선 1원도 안 되는 일 가지고 초청을 하겠나여! 행님 값은 달풍선 0원인뎅!"
"그렇군. 말은 잘 알아들었으니 일단 헤드락부터 걸자."
"으아앙! 고통도 곧 쾌락! 하지만 헤드락은 아포유!"
헤드락에 한 번 걸리자마자 탭을 치는 서라였다. 민국은 헤드락을 풀어주었고 서라가 목을 다듬으면서 말했다.
"우선 부엌에서 뜨뜻한 우유 한 잔 마시고 얘기하기로 해여!"
"오냐. 그러자."
"남자에게서 나오는 그 하얀 액체는 아니니까 의심하지 마시구여!"
"그건 네가 마시잖아?"
"히익!"
요즘은 민국의 하얀 액체를 꾸준히 챙겨 먹는 게 일상인지라, 이젠 이상하지도 않은 서라였다. 그저 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낫겠지. 이윽고 부엌으로 향한 민국은 서라와 가볍게 대화를 나누었다.
흑설 공주는 그 뒤 뭐 어땠냐는 것부터 시작해서… 서라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도 좀 얘기를 나누었고… 앞으로 방송을 다시 시작함으로서 같이 단합 방송이나 하자는, 뭐 그냥 그런 얘기였다.
'그냥 좀 더 안정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네.'
별 다른 대화 내용이 없자 민국은 그저 자신을 부른 이유가 안정을 받고 싶어서임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갈 시간이 되고, 민국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제 가시려구염?"
"가야지. 근데 너 혼자 잘 있을 수 있겠냐?"
아직도 성폭행 건으로 걱정이 되어 질문하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서라는 '읭?'하면서 말했다.
"내 멘탈은 하늘을 뚫는 천원돌파 강남라간!"
"그래 그래. 어쨌든 잘 놀고."
서라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은 민국이었다. 서라는 그런 쓰다듬을 받다가 은근슬쩍 민국을 올려다보았다. 현관문으로 나가려던 민국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향해 서라가 운을 띄었다.
"행님."
"궁금한 게 있는데여."
현관문을 열던 민국이 반쯤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뭔데 그러냐."
"행님은 내 바뀐 목소리가 좋다고 하셨는뎅, 지금 본래 목소리로 돌아왔잖아여. 좀 아쉽거나 그러지 않으세여?"
"흐음."
느닷없는 질문이었으나 민국은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확실히 그 목소리가 섹시하기도 하고 아청아청하기도 해서 따먹기에 더 좋을 거 같지만."
"히이익."
"그래도 말이지"
민국은 서라를 쳐다보면서 진심으로 말했다.
"내가 널 목소리 때문에 좋아하는 건 아니지 않냐."
"……."
"목소리 하나 내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너에게 호감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찌 보면 이성적 고백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서라는 고개를 숙였다.
나쁘게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반대로 너무 감동적으로 멘트가 가슴에 와닿았던 지라, 서라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져서 숨기려고 하는 것이었다.
민국도 스스로 얘기하고도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진다고 느꼈는지 머리를 긁적이다가 몸을 다시 돌려 현관문을 잡았다.
"아무튼, 난 간다."
"온니짱."
"응?"
반쯤 고개를 돌리면서 의아한 얼굴을 짓던 민국이었다. 그때 기습적으로 오른쪽 볼에 누군가의 입맞춤이 들어왔다. 쪽!
"?!"
"헤헤, 이건 목소리를 되돌려주신 값이에여!"
얼굴이 붉긴 했지만, 지금 놓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 생각했는지, 서라는 용기를 내서 그의 볼에 뽀뽀를 했다. 그리고 놀라는 그를 향해서 치아가 드러나도록 미소 짓는 서라. 개구쟁이 같은 그 미소에는 어느 때보다도 일어 있는 홍조가 있었다.
피하려고 했다. 어떻게든 벗어나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사람 마음이란 게 뜻대로 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오빠.'
서라는 그를 불렀다. 마음 속으로.
'역시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서라는 말했다. 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간 들리는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