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어차피 일을 끝낼 날은 앞으로 4일 안팎인 실정. 흑설 공주와 관련된 사업가였고, 괜히 얽혀서 일이 불거졌다간 서라도 크게 피해를 볼 게 자명했다. 고로 민국은 항상 서라의 곁에서 그녀를 신경 써주면서 있다 보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민국이 안 보는 곳에서 몇 번이고 서라를 건드리고 있었는지, 6일째가 되어가는 날 서라의 안색은 급속도로 창백해지고 있었다.
민국은 그런 서라를 보면서 질문했다.
"너 정말 괜찮아? 그냥 내가 흑설 양반한테 말할 테니까 방법을…."
"으아! 온니찡, 그런 짓은 위험함여. 반대반대! 결사반대!"
모처럼 민국이 만들어준 기회를 날려먹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다. 조금 답답할 수도 있지만, 서라는 나름대로 옳은 선택을 한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래, 어차피 이틀밖에 안 남은 실정이니 자기만 곧잘 참는다면….
"그래. 알겠어."
"……."
그렇게 또다시 사업가들 간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흑설 공주를 만나러 오는 사업가들은 매번 바뀌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단 한 사람만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6일째 찾아오고 있었는데… 바로 서라를 맘에 들어하던 그 어린 노무 사업가였다.
어지간히 서라의 몸을 탐닉하고 싶었는지 몇 번이고 기회를 노리는 눈빛이었다. 민국은 그런 서라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주방을 자주 왔다갔다 하길 반복했다.
"칫."
남자 사업가는 민국이 굉장히 방해 요소로 느껴지자 혀를 찼다. 짜증이 솟구칠 지경이었다. 보통은 어떤 사내 놈들도 자기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지내기 일쑤였다. 그러나 저 서민국이란 놈은 서라와 어지간히 친분이 있는 녀석이었는지… 절대 기세에도 지지 않고 물러나지 않는 모양새였다.
'짜증나는군.'
혼자 있는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려는 남자였다. 하지만 주방은 절대로 되지 않음을 직감한 남자는, 이참에 서라가 혼자 있을 만한 곳으로 들어가서 노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어차피 돈 몇 푼 주면 입 다물고 받아주기 일쑤니까. 크크.'
그동안 이 사업가 남자는 조금이라도 맘에 끌리는 여자가 있으면, 항상 돈을 주면서 입을 다물게 하고 몸을 건드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면 아버지의 힘을 이용해 위협을 해왔었다.
그게 그에겐 일상이었기 때문에 죄악감은 없었다. 어차피 자기 쾌락만 존중 받으면 되지 않는가? 그는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흑설 공주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소파에서 일어난 남자는 화장실로 향했다. 남자가 가는 방향을 눈으로 쫓던 민국은 주방이 아니자 안심하고 손님들을 대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의 생각은 달랐다.
"으으. 뭔가 오한이 드는 게 신호네여 신호."
식기들을 정리하던 서라가 일순간 부르르르 떨었다. 볼 일 신호가 온 것이었다.
일을 하는 동안은 거의 화장실도 못 가기 때문에 서라는 한참동안 참다가 결국 가는 모양새였다. 서둘러 갖다올 생각에 민국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화장실로 후다닥 향하는 서라.
남자 여자 화장실 중에서 여자 화장실에 들어간 서라는 곧장 옷을 벗으려고 했다. 끼이익, 쿵.
"읭?"
그때 또다시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변기만 있는 좁디 좁은 화장실에 갑자기 들어온 상대는 전혀 의외의 상대. 얼굴을 마주한 서라의 눈이 커다래질 수밖에 없었다.
"크크."
"엇, 저, 저기…!"
"가만히 있어봐. 이년아."
외치려는 서라의 입술을 손으로 틀어막고 벽으로 밀어붙이는 남자. 남자는 이제 못 참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얼마 원해? 아니, 얼마 줄까? 야, 말하는 액수대로 불러. 다 줄 테니까."
"우웁! 읍읍!"
"어차피 끝나는 거 금방이잖아? 5분도 안 걸려. 내가 원하는데로만 해주면 순식간에 끝내고 돈도 많이 받는다고. 너도 나도 윈윈하는 거잖아 그게?"
또 그때처럼 몸이 바르르르 떨리는 서라였다. 차마 흑설 공주와 관련된 사업가라서 말은 못하고 잠잠히 있었는데… 어쩌면 그게 크나큰 참사를 불러 일으키는 행위였을 지도 몰랐다.
"왜 바지를 내리려다 말아. 창피하면 도와줄게. 응?"
"……."
입이 틀어막힌 채로 말도 못하는 상태. 서라의 바지 쪽으로 은근슬쩍 손을 옮기던 그때였다. 똑똑.
"서라야."
"씨발."
또다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라의 공포로 감겨 있던 눈이 다시 떠졌다. 뒤척이려는 찰나 남자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한다. 또다시 몸이 굳어버렸다.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눈빛 속에 점철되어 있어… 서라는 화장실 너머 민국의 실루엣만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흐음."
그리고 서라를 찾고 있던 민국은 여자 화장실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라는 부디 민국이 자신의 기척을 느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신의 바램이라는 듯이….
"없나 보네."
그렇게 운을 띄우면서 몸을 돌리는 민국이었다. 저벅 저벅. 서서히 사라지는 그의 인기척에 서라는 떴던 눈을 찔끔 감았다.
평소 요상한 드립도 잘 쳤고 행동거지도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맘 약한 여자였다. 특히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기적임을 강요하는 남자 앞에서는 한없이 굳을 수밖에 없는 약자…. 혹여나 소리를 질러 문제를 만들었다가 민국에게 폐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답답함까지 갖는 서라였다.
"흐흐흐흐."
남자는 서라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꼼짝없이 포기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5분 동안 자기 즐길 거만 다 즐기면 되었기 때문에… 남자는 급급한 마음으로 서둘러 자기 바지부터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옷 차림으로 서라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잘 안 흘러내리네. 아씹."
서라는 눈을 찔끔 감고 있었다. 결국엔 애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선 꼼짝없이 굳을 수밖에 없는… 아직 그녀에겐 의지해야 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씨발 상관없어. 그냥 꽂아넣기만 하면 되니까.
이윽고 속옷도 벗으려던 남자였다. 그 순간이었을까.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손이 남자의 뒷머리를 붙잡았다.
"어? 어억? 아악!"
남자의 비명 소리에 포기하고 있던 서라가 감은 눈을 떴다. 그리고 정면을 쳐다보자….
"미친 새끼."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남자를 바깥으로 끌어낸 민국이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민국은 결국 폭력을 사용하기로 마음 먹은 모양이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이거 놔 새끼…'라고 소리치려던 남자. 퍼억! 입술보다 빠른 속도로 주먹이 그의 면면에 닿았다.쿠당탕탕! 와장창창!
"아아아악!"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립니까!"
다행히 사업가 남자는 싸움을 오지게 못했던 모양이었다. 민국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은 남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머리를 부여 잡았다.
쓰러질 때 하필이면 꽃병이 있는 서랍 모서리에 부딪혀서 말이다. 소리를 듣고 놀란 사업가들이 곧장 민국의 근처로 뛰어왔다.
민국은 졸지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 상태에서 고개를 돌려 화장실의 서라를 보았다. 서라는 굉장히 굳어버린 안색으로 민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국은 그런 서라에게로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나와."
"……."
"빨리 나오라고!"
윽박을 지르고 나서야 화들짝 놀란 서라가 민국의 손을 잡고 화장실에서 뛰쳐나왔다. 비틀비틀거리던 사업가 남자가 서랍을 부축삼아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너, 너 이… 일개 직원 주제에 나한테 무슨 짓이야!"
"……."
"내가 누구 집 자식인지 알아! 어! 이 멍청한 서민 주제에!"
차마 싸울 용기는 없어서 삿대질만 하는 졸렬한 남자였다. 민국은 한 대 더 치고 싶은 맘에 발걸음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흑설 공주가 등장했다.
"잠깐."
"……."
웅성웅성거리던 사업가들도 흑설 공주가 등장마자하자 입을 쏙 다물었다. 씩씩거리는 사업가 남자도 흑설 공주를 보자 화를 억지로 억누르는 모습이었다.
"폭력은 항상 일을 크게 부르는 법이지. 모습을 보니 뭔가 심각한 일이 있던 모양이구나."
"……."
"대화의 장소를 만들 테니 장소를 옮기자꾸나."
사업가들을 보면서 말하는 흑설 공주였다.
"나머지는 다 물러가주거라."
일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은 실정에서 이런 일이 생길 건 꿈에도 예상 못했다. 민국은 다소 진지한 눈빛으로 맞은편의 사업가 남자를 쳐다보았다.
사업가 남자는 푸르게 부은 눈을 달걀로 마사지하면서, 민국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서라는 민국의 옆에 앉아 그의 옆얼굴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가 이토록 격노하는 건 서라도 평생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어떻게 된 일이느냐?"
"…자초지종이고 뭐고 필요 없습니다! 당장 저 새끼 잘라요!"
민국을 삿대질하면서 윽박 지르는 남자였다. 흑설 공주가 말을 이었다.
"어떤 이유로 이런 다툼이 있었는지부터 알아야 하는 게 먼저 아니겠느냐?"
"그런 게 뭐가 필요합니까!"
얘기를 들으면 자기가 불리하다고 생각했는지 크게 성질을 내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진솔하게 입을 열었다.
"서라에게 손지겁을 하려고 했습니다."
"개 같은 소리하네! 내가 저 년이 뭐가 좋다고 손지겁을 하냐!"
흑설 공주가 고개를 돌려 사업가 남자를 쳐다보았다.
"손지겁을 하지 않았다면 왜 맞은 것이느냐?"
"그냥 제가 잘 나가니까 맘에 안 들어서 때린 거겠죠! 자르라고 할 때 빨리 잘라요! 아버지한테 이르기 전에!"
강압적인 태세로 나온다. 확실히 사업가들과 연줄이 있는 상태에선 자기 이득을 위해서라도 직원을 자르는 게 옳았다. 하지만 애초에 흑설 공주는….
"이걸 보거라."
"…뭡니까 이건! 자르라는데 또 뭔 쓰잘데기 없는!"
"소형 카메라에 장착된 내용물 테이프지."
그 말에 소리치던 사업가 남자가 말문을 콱 닫았다. 흑설 공주가 그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이 테이프에는 자네가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이미 그 화장실에는 내 직원인 서라가 들어가 있었는데 말이지. 이에 대해 얘기해줄 수가 있나?"
"그, 그건… 잘못 들어간 겁니다! 잘못 들어간 거!"
"잘못 들어간 거라면 어떻게 그 화장실에서 곧장 나오지 않았으며, 서민국이 문을 열었을 때 서라를 붙잡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는지 영문을 모르겠구나."
요 며칠 사이에 집 곳곳에 소형 카메라를 달아두었던 흑설 공주였다. 물론 그 이유는 한 가지였는데….
"자, 자꾸 이런 식으로 저를 이상하게 모시면 아버지에게…!"
"혹시 갑을 관계에 대해서 아느냐?"
그의 말을 끊으며 흑설 공주는 말을 이었다.
"갑을 관계라는 건 갑이 을을 돕는 관계를 뜻하는 것이지. 하지만 간혹 을을 귀중하게 대하는 갑의 행동이 있는데, 그 행동 때문에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끔 이런 오해를 많이 하더구나."
"……."
"갑은 을이 없으면 꼼짝도 못하는 관계다. 갑은 을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관계다."
와인잔에 와인을 쪼르르 따라 홀짝 입가에 갖다 댄 흑설 공주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아직도 내가 을로 보이나?"
"……."
"실수했구나."
애초에 흑설 공주는 항상 귀찮게 자신에게 찝적대던 이 남자를 처리하고 싶었다. 다만 사업가들과 연관되어 있는 어린 사업가이니 만큼 처리할 수 있는 어떤 명분이란 게 필요했고, 마침 그 명분을 찾고 있던 참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자네 아버지의 회사는 내일 무너질 테니 가서 미리 소식을 들려주게."
"……."
그리고 흑설 공주의 가벼운 손짓에 보조 직원 두 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현관문 쪽으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사업가 남자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잠깐 해명할 기회를 달라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은 건 늦은 것이었다.
끼이익, 쿵. 문이 닫히고 조용해진 거실. 와인을 다시금 홀짝이는 흑설 공주의 모습에 민국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서라를 채용했던 게 저 남자 때문입니까?"
"어느 정도 그런 생각은 있었지만, 사실 그걸 노린 건 아니란다. 쥐를 잡으려고 만든 쥐덫에 벌레가 죽었을 뿐."
확실히 흑설 공주는 흑마법사와는 다르게, 악마 같은 면이 있었다. 민국은 그런 흑설 공주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이윽고 흑설 공주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서라에게 상처를 남긴 것도 있으니 요 이틀간 일은 할 필요가 없단다. 바로 목소리를 돌려주도록 하마."
그리고 가벼운 손짓과 함께 서라의 목소리를 원상태로 되돌리는 흑설 공주였다. 서라는 몇 번 말을 해보면서 자기 목을 더듬었다. 진짜 돌아왔다.
"그럼 돌아가보겠습니다."
민국은 이제 자기 용무도 끝났겠다, 곧장 서라의 손을 잡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서라는 진지한 민국의 모습을 보면서 굳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흑설 공주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잘 가게.'라고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 끼이익 쿠웅! 그렇게 민국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 두 사람이었다.
============================ 작품 후기 ============================
가라 비호감 히로인 흑설 공주 ㄱ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