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플래그가 꽂히다.avi.>
흑설 공주에겐 이미 보조 역할로 채용된 직원이 두 명 남짓 있었다. 두 사람의 도움을 통해 일을 하기 시작한 민국과 서라였고, 어느 분야든 노력하는 두 사람답게 능수능란하게 수행해가는 모습이었다.
사실 보조라고 해봤자 그리 어려운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손님들이 오면 테이블에 접시들을 놓는다든가, 먹은 그릇은 주방으로 가서 설거지를 한다던가… 불편한 점이 있으면 대응해주는 등, 생각보다 크게 어려운 것은 없었다.
물론 실전으로 돌입하면 머릿속처럼 쉬운 일은 아닐 지도 몰랐다. 인간 관계라는 게 여간 다루기 어려운 것이니 말이다.
"너 진짜 잘할 수 있겠냐? 아니다 싶으면 그냥 나한테 도와달라고 해라."
"오키도킹. 그런데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 같은데여? 데헷."
손님들이 오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됐다. 거실의 커다란 현관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머에선 웅성웅성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게, 손님이 한 두 명이 아닌 모양이었다.
'다들 성공한 사업가들이라고 했었지.'
흑설 공주는 그런 성공한 사업가들을 자기 재주껏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애초에 마법을 다룬다는 점부터 어떤 사업가들보다도 훨씬 대단할 수밖에 없었고, 성공률도 사기적으로 올려줄 게 뻔할 뻔자였지만 말이었다.
"흑설님. 손님분들 오셨습니다."
"열어주거라."
흑설 공주는 거실의 알록달록 고풍스러운 무늬가 달린 소파에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여유롭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보조 직원들이 현관문을 열었고, 그러자 큼지막한 현관문 너머에 있던 양복 차림의 사업가들이 허허실실 서로에게 웃음을 보이다가 거실의 흑설 공주를 보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이군요. 흑설 씨."
다들 소파에 앉아있는 흑설 공주를 보며 조금도 불량하다고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앉아있는 그녀에게로 다가와 악수를 건네는 모습이었고, 흑설 공주는 부채질을 하면서 나머지 손으로 악수들을 받아주었다.
'그런데 저 양반은 실명은 안 쓰나 보네.'
흑설 공주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네임명이었다. 예나의 친구 삼촌이 운영하는 주점에서 사용되는 별명이기도 했고, 사업가들의 자리에서도 별명으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실명을 알고 있다면 분명 이름으로 부를 텐데, 부르지 않는 거로 보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어흠. 덥구만."
보조 직원들을 향해 헛기침을 하면서 소파에 앉는 남자 사업가 한 명. 목에 매고 있는 넥타이가 거슬렸는지 고쳐 매는 그의 모습에 민국은 신호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눈치 하나는 다른 이들보다 빠른 그였으니까. 민국은 그 사람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목이 답답해서 그러는데 물 좀 한 잔만 떠와주게."
"알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도 민국은 비제이를 하기 전에 아르바이트를 여럿 해본 경험이 있었다. 능수능란하게 해결하는 민국의 모습에 일인용 소파에 앉아있던 흑설 공주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주방으로 가 정수기에서 물을 뜨는 민국을 보면서 음식을 대접할 준비를 하던 서라가 물었다.
"행님 손님들 오셨음여?"
"그런 거 같더라. 너도 음식 돌린 다음에 가서 인사하면 될 듯."
"이응."
하녀 복장의 서라는 누가 봐도 귀염둥이 그 자체였다. 이윽고 냉수를 들고 먼저 테이블로 향한 민국이 그것을 자리에 내려놓았고, 뒤이어 서라가 테이블에 당도했다.
"실례합니다~. 음식 내려놓을게요~."
"오."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면서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던 서라였다. 그녀를 보던 사업가 몇몇이 탄성을 내질렀고, 이윽고 민국에게 물을 요구했던 사업가가 서라를 보면서 눈웃음지었다.
"예쁜 아이구나. 신입이니?"
"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허, 기특하구나."
서라의 외모가 워낙 특출나다 보니 사업가들에게도 눈길이 상당히 끌릴 수밖에 없었다. 흑설 공주와 맞먹는 미모였지만, 흑설 공주는 워낙 급이 높은 인물이다 보니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으니까. 민국은 서라의 여유로운 대처에 기특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어느 찰나였을까.
"꿀꺽 꿀꺽."
"……."
어디선가 물을 삼키는 소리에 민국의 눈길이 잠시나마 돌아갔다. 흑설 공주와 가장 근처의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였다. 왁스로 머리를 떡칠하고, 딱 봐도 이 사업가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남자였는데 굉장히 눈매가 불량스러웠다. 그리고 무슨 연유에선지 서라를 쳐다보는 눈빛도 상당히 심상치 않았다.
'조심해야겠는데.'
민국은 본능적인 감각을 느끼고는 그리 생각했다. 다른 사업가들은 서라를 그저 귀여운 아이로 보는 선에서 그쳤지만 저 남자의 시선은 유독 달랐다. 이윽고 서라가 가벼운 인사 치레와 함께 주방으로 돌아가자, 물을 삼키던 남자의 고개가 흑설 공주에게로 돌아갔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 제안 한 번만 꼭 들어보시면."
"……."
아무래도 흑설 공주와 어떤 일을 동행하고 싶어서 제안을 하는 입장인 모양이었다. 아까 전의 눈매와는 다르게 사뭇 비굴해진 듯한 모습에 민국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 *
그로부터 이틀이 흘렀다. 삼일째인 지금은 두 사람 모두 곧잘 일을 수행하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주로 수다를 떠는 사업가들의 근처에서 일어나 있는 상태로 요구를 들어주었고, 서라는 주방에서 음식을 가져와 테이블에 놓는 역할을 하였다.
"아, 오늘도 고마워요 아가씨."
"헤헤, 천만해요 사장님."
눈웃음을 지으면서 사장들에게 아양을 부리는 서라. 사장님들은 그 어여쁨에 다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분위기를 활기 있게 만들어주는 서라의 언동에 지켜보던 흑설 공주도 뿌듯해했다. 민국 역시 아빠 미소를 짓고 쳐다보던 가운데.
"그럼 다른 음식도 가지고 들릴게여!"
총총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하는 서라를 보면서 참으로 귀엽다며 중얼거리는 사장들. 그리고 오늘 역시 흑설 공주에게 무언가를 제안하려던 근처의 남자가 물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오겠습니다."
'…….'
민국은 좀 찝찝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자신에겐 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말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업무에 집중하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났던 남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화장실에 가는 척… 주방으로 향했다.
"룰랄랄라!"
신명나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먹는데 사용된 식기들을 설거지하는 서라였다. 싱크대에서 설거지하랴 음식 가져오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던 그녀. 그때였다. 주방으로 누군가가 당돌하게 걸어온 것이었다. 주방에 혼자 있던 서라는 급작스런 인기척에 '읭?'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어이구, 여기서 일하나 보시네."
"어? 무슨 일로 오셨어여?"
주방으로 찾아온 남자는 민국이 별로 좋지 않게 여기던 남자였다. 사업가들 중에서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던 남자. 이윽고 그 남자가 내용물이 빈 물컵을 들어 보이면서 정수기로 향했다.
서라는 '말씀하시면 갖다드릴 텐뎅….'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나머지 설거지에 다시 집중했다. 남자는 물을 한 모금 홀짝이면서 서라의 뒷태를 스윽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섹시한 자태를 가지고 있자, 남자는 왠지 갈증이 생겨 더 물을 삼키게 되었다. 이윽고 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그가 서라에게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서라는 다가오는 그의 행동에 '읭?'하면서 돌아보았다.
"너 참 예쁘게 생겼구나. 고등학생이라고 했지?"
"어, 어엇… 저, 저기…."
"나쁜 생각은 없으니까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란다. 이야, 턱선 봐봐."
턱선에 감탄하는 척하면서 서라의 얼굴을 은근슬쩍 매만지는 남자였다. 서라는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느낌을 받고는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다가 그만 손에 묻은 물기를 원치 않게 그의 옷에 조금 묻히고 말았다.
"앗…!"
"아."
"죄, 죄송해여! 그러려고 하던 게 아니라…!"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그렇게 미안하면 다른 방식으로 사과해주면 되지."
"……."
서라의 안색이 급속도로 굳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쁜 맘을 먹고 접근한다는 걸 서라도 본능적으로 눈치채지 못할 리 전무했다.
"죄송한데 저… 일해야 하는데… 잉…."
"손님 옷에 물을 묻혔으면 사과를 하는 것도 일에 포함되지 않겠어? 어차피 여긴 보는 눈도 많으니까 많은 건 바라지 않고."
자수성가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맘껏 모든 것을 누리고 살던 남자였다. 어린 나이에 사업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남자. 그 와중에 독차지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보다도 강해서, 사람이 없다 싶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곧잘 채가려는 나쁜 심성이 있는 양반이었다.
"자, 그러니까 겁 먹지 말고."
"……."
손목을 부여잡고 서서히 얼굴을 들이미는 남자. 근처에서 숨결이 느껴지자 서라는 눈을 찔끔 감았다. 겁을 왈칵 집어먹은 그녀의 머릿속엔 오로지 한 사람의 얼굴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오…빠…!'
"죄송합니다만 손님. 용건이 있으면 저한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익숙한 음성의 등장에 서라가 눈을 떴다.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 있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춘 것은 믿음직한 오빠의 얼굴이었다.
"칫."
서라의 손목을 부여잡고 강제로 키스를 하려던 남자가 혀를 내두르면서 몸을 땠다. 분위기도 좋았는데 끼어든 제3자 때문에 몹시 심기가 어질러진 모양이었다. 남자가 몸을 물리자 서라도 그제야 흐트러진 옷을 제대로 단정 지었고, 고개를 들었다. 부엌으로 막 들어온 훤칠한 키의 서민국이 상업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큰 용건 아니니까 그쪽이 신경 쓸 필요 없어. 직원이면 가서 보조 역할이나 하러 돌아가."
"손님께서 불편하신 게 있다면 들어주는 게 직원으로서의 도리지요. 흑설 사장님도 그걸 바라고 계실 겁니다."
지지 않고 맞부딪히는 민국이었다. 흑설 공주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남자는 눈매를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역시 흑설 공주 앞에선 한 단계 아래였는지, 결국 혀를 차면서 민국을 비껴지나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민국에게 한 소리 늘어놓는 걸 놓치지 않았다.
"다음 번엔 눈에 띄는 일 없었으면 좋겠군."
평소의 민국이라면 귀싸대기라도 갈겼겠지만, 지금은 일을 하는 입장이었으니 그저 미소만 지으면서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이윽고 주방에 혼자 남은 서라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천천히 다가간 민국이었다.
"괜찮아?"
"아, 이, 이응."
몹시 당황한 얼굴로 옷을 터는 서라였다. 애써 평온한 척을 해보지만 겁을 먹었던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민국은 그런 서라가 겁을 먹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다가가서 손을 붙잡았다. 아까 전 남자의 강압적인 손길이 느껴졌는지 흠칫 어깨를 떨던 서라였다. 하지만 그 남자와는 다르게 민국의 손길은 한없이 따뜻했다.
서라의 손등에 자신의 또 다른 손을 올려 놓으면서, 보듬어주는 민국이었다.
"무슨 일 생기면 나에게 즉시 말해. 언제라도 도와줄 테니까."
"……."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가 서서히 잠잠해지기 시작한다. 마치 자식을 보살피는 어머니의 따뜻함 같았다. 일순간 공포를 집어먹던 서라의 감정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고, 민국은 안도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새끼.'
이윽고 반쯤 고개를 돌려 주방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사업가 남자를 떠올리는 민국이었다. 일을 하는 자리만 아니었으면 사업가고 뭐고 혼쭐을 내주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