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실물은 처음이구나. 예쁘장한 미모가 남자 애들에게 인기가 많겠다."
대충 흑설 공주와 인사를 나눈 민국 일행이었다. 서라는 그녀의 칭찬에 그저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기존이라면 '헤헤 감사합니다!'하면서 미소 짓고 반응하겠지만, 역시나 흑설 공주에겐 일반인이 엄두할 수 없는 포스라는 게 존재했다. 그것을 서라도 다소 느낀 것이었다.
"원래 이렇게 말이 없는 애였느냐?"
"제가 옆에 있어서 굳은 거니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녀석 절 너무 사랑하거든요."
"흐음, 그래보이긴 하는구나."
민국의 농담에 '온니찡 노답이시네요.'하고 귓속으로 속삭이는 서라였고, 흑설 공주는 그런 서라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그래서 용건이 무엇이느냐? 특별한 볼 일이 없는 게 아니라면 찾아올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우선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십니까? 편찮으신 곳 있으면 안마라도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굳이 비위를 맞춰줄 필요는 없단다. 어차피 받는 게 있으면 줘야 하는 것도 있지 않겠느냐."
흑설 공주의 귀티나는 미소가 피어 올랐다. 민국은 '크윽'하면서 생각했다.
'역시 공짜로는 해줄 생각이 전혀 없군!'
하긴 공짜 심보를 더 이상 바라는 것도 거지 근성이겠지. 민국도 그렇게 거지 근성만 부리는 타입은 아니었으니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갔다.
"일단 아실 지 모르겠지만 서라 이 녀석도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들어보긴 한 것 같다."
"예. 그런데 얘 목소리가 갑자기 바뀌어서 방송을 중단한 상태지요. 서라야, 말해봐."
슬슬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는지 서라가 '안녕하세여.'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예의 바르게 인사한다. 흑설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목소리에 대해 평가했다.
"외모도 충만하고 목소리도 예쁜데 무엇이 문제이느냐? 이전에 다른 세계에서 들었던 목소리하고는 딴판이고 오히려 그보다 훨씬 나은 목소리지 않느냐?"
"하아, 그렇긴 합니다만. 서라야. 이 부분부턴 네가 좀 설명해줘라."
"아, 알겠습니다여. 안녕하십니까… 하지메마시떼…."
"너무 굳을 필요 없단다. 말해보거라."
흑설 공주의 여유로운 말에 서라가 이응이응하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어떻게 갑자기 목소리를 잃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전에 어떤 목소리였는지 설명함과 동시에 자신이 왜 방송을 하려고 하는지를 설명하였다.
사실상… 어찌 보면 목숨이 달린 일도 아니니 방송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고 볼 수도 있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서라는 방송으로 노닥거리는 것을 취미로 가진 여자였고, 요즘은 민국을 따라서 진짜 직업 비제이를 해볼까 골두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젠 그녀에게 비제이라는 것은 때놓을 수 없는 게 되었단 의미였다.
"그럼 결과적으로 네가 원하는 것은 본래 목소리를 찾는 것이느냐?"
"하잇!"
"그렇구나. 하지만 그 좋은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것도 영 좋은 일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드는구나. 이참에 그 목소리로 방송을 하는 건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이잉… 그, 그렇게 되면 생길 문제가 너무 많음여. 감당하기 힘들 수가 있음여!"
"예, 대충 그렇습니다. 방송에선 서라가 남자 비제이인 줄 알고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구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흑설 공주의 만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까짓것 마법만 부리면 언제든지 본래 목소리로 확! 돌아오게 할 수 있는 능력의 인물이었다. 그것이 자신감의 상징임을 알았기에 민국은 물었다.
"도와주실 겁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지 않느냐."
"크흠! 그렇지요. 공짜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주는 게 있으면 받아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현대 사회의 등가 교환 법칙을 만만히 보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흑설 공주는 잠시 고개를 돌려 화장대의 달력을 보았다. 멀리 있었으나 그녀의 눈엔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동안 손님들이 집에 찾아올 것 같구나."
"……."
"하나같이 재력이 있는 양반들이다 보니 나 혼자 다루기는 버겁지. 곁에서 도와줄 수 있는 역할이 있으면 좋겠구나."
"뭐 하녀나 집사 같은 거 말하는 겁니까?"
"그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단다."
"흠, 그런 건 당신이면 직원으로 전부 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굳이 할 일을 따진다면 이거 말곤 할 게 없다는 걸 말하는 거란다. 아가야."
대놓고 서민국을 아가 취급하는 흑설 공주의 패기! 서민국은 '쩝'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고개를 돌려 서라를 쳐다본다.
"어쩔래 서라야. 이건 네가 결정하면 돼."
"의잉… 호, 혼또니 목소리가 돌아올 수 있나여?"
현재의 목소리가 정말 사랑스러운 목소리긴 했지만, 그래도 기존의 목소리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서라였다. 오히려 개그필이 나는 대사나 멘트를 칠 때는 그때의 정겨운 목소리가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윽고 흑설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준다면 말이지."
"할게염! 아, 그런데여…."
서라가 우물쭈물거리면서 얘기하려고 하자 흑설 공주가 무엇이냐는 듯 한 쪽 눈꼬리를 위로 올렸다가 내린다. 민국이 돌아보면서 대신 말해주었다.
"혹시 오늘만 본래 목소리로 돌려주실 수 있습니까? 서라 이 녀석 방송을 하도 못해서 아우성을 받고 있는 상태라 말입니다."
"일하는 시간 한 시간 더 추가한다면."
"이런 악마 같은? 서라야 어떡할래."
"해야지여 별 수 있나여!"
시청자들부터 잠재우는 게 중요하다. 고로 서라는 혼쾌히 승낙했고, 흑설 공주도 아쉬움이 없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곧장 손을 들어 허공에 휘저었다.
"이제 본래 목소리가 나올 거란다. 한 번 말해보거라."
"읭? 의이이이이이잉?!"
서라는 순식간에 자기 본래 목소리로 돌아오자 깜짝 놀랐다. 온갖 수단을 사용해도 결코 돌아오지 않던 목소리가! 고작 허공의 몇 번 휘저음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서라는 그 행동거지에 대해 가볍게 소감을 표했다.
"사스가… 사기."
"후후, 오늘 12시가 넘어갈 때까지는 그 목소리가 유지될 거란다. 일은 내일부터 해주면 되겠구나. 학교가 끝나는대로 바로 이 방에서 준비해주면 된단다. 옷은 준비해둘 테니 입도록."
"예압!"
충성을 다하겠다는 듯 군대의 차렷 자세로 소리치는 서라였고, 민국은 '그럼 수고하십쇼.'하면서 방문을 열고 자기 방으로 서라를 데리고 향했다. 그렇게 본래 목소리를 하루 동안 되찾게 된 서라.
"온니찡! 흑설느님 포스가 장난이 아니네여! 진짜 이계의 느낌이 들었음여!"
"사스가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는 양반이지. 하지만 그만큼 고마운 것도 있는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민국은 내일을 걱정하면서 질문했다.
"그런데 너 내일 정말 혼자서 잘할 수 있겠냐?"
"읭? 뭘여?"
"흑설 공주 돕는 거 말이야. 혼자서 하기는 힘들 거 같은데."
"으음! 아르바이트한다는 느낌으로 해야겠지여! 나님의 사랑스런 목소리를 위해서 말이에여!"
참으로 웃긴 일이다. 제3자가 볼 때는 더 좋은 목소리를 습득했으니 그 목소리 그대로 이어가는 게 좋다고 생각할 텐데, 서라는 기존에 하던 방송에 차질이 생김과 동시에 민국에게도 문제가 갈까봐 본래의 목소리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무슨 문제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예썰 마네카썰! 온니찡 오늘따라 든든하네여! 빨아드리고 싶음요!"
"와 그래? 그럼 지금 바지 벗을 테니 빨아줄래?"
"바지를 빨아드릴게여! 물로 세탁해서여!"
그렇게 가벼운 성드립을 끝으로, 민국은 서라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이후 서라는 방송을 오랜만에 재개했고,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일단 시청자들의 불거진 논란은 간신히 잠재울 수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이 찾아왔다.
"하잇!"
"왔냐."
"예압! 처음 해보는 아르바이트!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여리여리하게 열심히 하겠슴니당!"
민국의 집에 당도한 서라는 교복에서 예의 바른 사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사복도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가린 모습이었는데, 민국은 그것을 보면서 확실히 용모단정한 애구나 피식 웃었다. 이윽고 흑설 공주의 안방으로 향할 수 있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갔을 때였다.
"아, 잠깐 기다려봐라."
"잉? 왜염?"
이윽고 민국도 준비를 다 마쳤는지 서라를 따라 흑설 공주의 안방으로 진입했다.
"나도 가려고."
끼이익, 쿵. 문을 닫고 안으로 당도한 민국. 잠시 침묵하던 서라가 눈을 크게 뜨면서 소리쳤다.
"허얼! 온니찡 혹시 18센치에서 더 커지고 싶어서 알바 똑같이 참여한 거예여?"
"너 도와주려고 함께 하는 거야 인석아."
서라의 이마를 한 대 꽁 가볍게 떄리는 민국이었다. 서라는 이마를 가볍게 잡다가 '으잉.'하면서 의문을 품었다.
"온니찡 혼또니 지 도와주시려구여?"
"그래. 예쁜 여동생이 어떤 일을 당할까 몹시 걱정되어 이 몸이 곁에서 보조해주기로 한 것이니 고맙게 여겨라."
흑설 공주에겐 이미 밤에 찾아가서 얘기를 해둔 뒤였다. 본래 서라가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은 하루 네 시간. 그리고 총 15일 동안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민국이 자신도 도와주겠으니 8일로 깎아달라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제안은 무사히 성사된 상황이었다.
"혹시 어디 관자놀이 쪽에 망치 맞으신 건 아니시져? 진심 걱정됨여!"
"나도 같이 해주기로 마음은 먹었는데 조금은 후회되는구나. 슈벌, 딸칠 시간 줄어들겠네."
심지어 일주일간은 은별과 데이트를 하거나 예나를 만나는 게 어려우리라.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두 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해두었으니 크게 신경쓰진 않겠지…? 두 여자는 서라를 귀엽게 보았으니까 말이었다.
"아무튼 감사해여. 나중에 지도 되면 보답해드릴게유!"
"보답으로 나중에 팬티나 보여줘라."
"하앍."
이윽고 침대 쪽을 돌아보는 민국이었다. 마침 침대 쪽에 민국이 입을 옷과 서라가 입을 옷이 단정히 놓여져 있었다. 거의 집사나 하녀들이 입는, 깔끔한 양복과 하녀복이었는데… 무슨 진짜 부잣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복장 같았다.
'애초에 부잣집 냄새가 나는 집이니까. 후훗, 왠지 내 집인 척 해보고 싶어지는군.'
침대로 향해서 자기 옷과 서라 옷을 집어든 민국이었다. 서라에게 옷을 건네준 민국이 일단 침대에 앉았다.
"자, 너부터 일단 입어라."
"오키도키여. 으아닛? 온니찡 왜 눈 안 감으심."
"자고로 남자는 잠잘 때도 언제든지 목이 달아날까 자객의 습격을 감안하면서 행동해야 한다. 고로 나는 항상 눈을 뜨고 있는다."
고로 서라는 민국이 볼 수 없도록 뒤통수 쪽으로 졸졸 돌아갔다.
"그럼 여기서 입어야지영."
"이럴 수가. 내 계획이 이렇게 쉽게 망해버리다니."
계획이랄 것까지야…. 어쨌든 서라와 민국은 무사히 옷을 갈아입었다. 이윽고 시간이 됐음에 흑설 공주가 방문을 열고 등장했다.
"둘 다 있구나. 나오거라.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구나."
"네압! 카미카제사마!"
"크흠."
차렷 자세로 충성을 하는 서라와, 어색한 기침과 함께 따라 나가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안방을 나와 거실에 당도했을 때 서라는 '우와아!'하면서 탄성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민국도 '오메 슈발'하면서 크게 감탄사를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총 몇 평이라 보아야 될까?
'삼백 평? 삼백 평쯤인가? 와 장난 아니네.'
거실 천장에는 아주 커다란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고, 심지어 방은 한 개가 아니라 굉장히 많았다.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도 굉장히 고급스러웠고 귀티가 났다. 모든 게 세련되어있음에 민국은 순간 흑설 공주에게 구걸을 해볼까 처음으로 생각했다.
"흑설 공주님."
민국의 태도가 급속도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흑설 공주가 여유롭게 고개를 돌려 민국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제가 집에 돌아갈 차비가 없어서 그러는데 팁으로 돈 좀 주십쇼. 한 1억만."
"아앗! 행님! 치사하시네여! 그런 건 아우인 내가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여? 헤헤 흑설공주님."
"야 인마. 난 흑설 공주를 너보다 더 일찍 알았어. 심지어 나랑 대화 나눈 거 합하면 그래도 문장으로 열 번은 넘을 거다."
"부들부들! 만남이 빠르다고 해서 인연이 질긴 것도 아님여 온니찡! 조만간 수능인데 수능생들 시험 잘 보라고 엿이나 드셈여!"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흑설 공주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몸을 돌려 정면을 쳐다보는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