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226화 (226/369)

226화

“무엇을 말이냐.”

“정부도 모르는 우리의 비밀을 말이지여.”

이 나라의 정부조차! 콩딱지라는 남자 비제이가 사실은 여자라는 것을 모른다! 오로지 민국과 관련된 이들만이 알고 있는 어마어마한 비밀. 하지만 그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터질 여파는 장난이 아닐 것이었다.

“마땅한 방법이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반대하고 싶은데. 애초에 그 여파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클 텐데 너 혼자 감당하기도 무리일 거야.”

“의잉. 그럼 어쩌다 보니 TS 되어서 여자가 되었다고 하는 건 어떨까요?”

TS는 성별의 변화를 의미했다. 민국은 ‘어이쿠 자식아’하면서 서라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민국이 말한다.

“머리 좀 식힐 겸 물 한잔만 마시고 오마.”

“넹. 정수기 다루는 법은 아시져?”

“당연히 알지.”

부엌으로 향한 민국이 물을 몇 모금 마시는 동안 서라는 원형 의자에 앉아 가만히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진짜 말하는 수밖에 없어.’

그러나 말하게 되면 생길 여파가 자꾸만 생각나자 민국은 입을 꽉 다물게 되었다. 대체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잠깐. 만일 그 악마 여자에게 부탁을 한다면.’

악마 여자. 검은 코트의 어두운 분위기였던 흑마법사와는 다르게 깔끔한 귀족풍의 양털 코트를 입고 있던 여자였다. 그러나 그 내면은 무시무시한 악마! 미연시 세계에서 온갖 난리 부르스를 치곤 책임을 전가하는 민국의 행동이 졸렬하다면 졸렬했지만, 어쨌든 간에 민국은 그녀를 생각했다.

‘도움을 요청해보는 건 어떨까. 마법은 현대 의학으론 불가능한 것도 이루어주니 말이지.’

하지만 흑설 공주가 단순히 선량한 마음으로 도와줄 생각은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민국의 팬도 아니었고 서라의 팬도 아니었으니까. 분명 물질적으로 무언가를 바라거나 그럴 것이었다.

“야 서라야.”

“왜 그러셈?”

“여기 와봐. 얘기 좀 나누자.”

거실 소파를 가리키는 민국이었고, 서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곳으로 쫑쫑 다가왔다. 민국은 소파에 앉아 맞은편의 서라를 보면서 말했다.

“사실 그 목소리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해.”

“오오! 설마 그라목손이라도 마시라는 건가염?”

“모자르지만 착한 인석아. 그거 마시면 죽어. 어쨌든 간에.”

그라목손. 농약용 약으로 굉장히 위험한 약품이니 주의하시길. 어쨌든 민국은 흑설 공주에 대해 설명하기로 했다.

“너 전에 미연시 세계에 대해서 기억을 주입받았을 때, 흑설 공주라는 양반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게 됐지?”

“아~ 이응이응. 좀 알지여. 다는 모르지만 민국이 행님 도와주려던 분이시잖아여?”

“그렇지. 흑마법사느님은 이미 본래 세계로 돌아간 지 오래고, 지금은 그 양반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상황인데 흐음….”

좀 어렵게 입을 땐다.

“한 번 그 사람에게 도움 받아볼 생각 있냐?”

“읭? 정말 가능한 건가여?”

“가능은 할 거야. 다만 무언가를 요구할 가능성이 좀 크지.”

“어멋! 그 무언가라면 혼또니… 온니찡도 정말 엣찌한 남자시네여.”

저놈의 섹시한 목소리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민국은 서라에게 의사를 물었고, 서라는 여러모로 위기가 있는 상황이니 만큼 거절을 할 생각은 없었다. 마법이라면 확실히 서라의 목소리를 본래의 것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군.’

서라의 의사를 확실히 받아낸 민국은 다소 진지한 얼굴을 지었다. 어차피 기말고사도 끝났겠다 바로 만나서 얘기를 나눠도 될 터. 다만 흑설 공주가 어떤 조건을 달 지 모르기 때문에 민국은 그게 심각히 고민이었다.

‘어찌 됐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녀석이니까 도와주는 건 마땅하겠지.’

서라를 향한 진심은 사실이었다. 좋은 목소리를 얻은 건 좋은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로 인해 잃어버릴 것들이 무수했으니 말이다.

“가자.”

“오키도키넹.”

곧장 흑설 공주가 있는 집으로 향하는 민국이었다.

* *

“근데 어디로 가는 거예여 온니찡?”

“내 집으로 가야지.”

“헐. 온니찡 왜 온니찡의 집으로 가시는 거져? 설마 말로는 흑설느님이니 뭐시니 만나게 해주신다고 해놓곤 나를 사과나무 과일 따먹듯이 먹으려고 하시는 건가여? 그럼 최소한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달래주시면 좋겠는데여.”

지하철을 타기 위해 개찰구를 지나는 즈음이었다. 남녀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민국과 서라를 흘긋 쳐다보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끝내주는 비주얼의 두 남녀가 지나가고 있으니 하나같이 눈길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너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없다. 자고로 여자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없이 덮쳐야만 하는 법이지.”

“우왕, 19금 동인지에서 나오는 젊은 악당을 보는 거 같음여. 무시무시하네여.”

“그리고 너 잡아먹으려고 집에 가는 게 아니라 그 집이랑 흑설 공주 집이랑 연결돼있어서 그래. 마법으로 연결해뒀거든.”

“이잉?”

민국의 설명에 서라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 집에 도착하면 몰라도 알게 될 터이니 민국은 굳이 그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이윽고 서라와 잡다한 수다를 떨면서 집에 당도한 민국이었다.

“옛다. 들어와라.”

“오랜만에 느끼는 고향의 냄새네여! 아앗!”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집으로 폴짝 뛰어 들어왔던 서라가 돌연 코를 틀어막는다. 민국을 짐승 쳐다보듯 놀란 토끼 눈으로 말하는 서라였다.

“온니찡. 밤꽃냄새가 너무나도 심각해여! 아무리 여자들이 밤꽃 냄새에 면역력이 높다고 해도 이리 심각하면 머리 어질어질거림여.”

“밤꽃냄새의 주 근원지에 얼굴 들이밀게 해서 빨게 하고 싶다.”

“허얼.”

벽에 나 있는 구멍으로 시선을 돌리는 서라였다.

“그런데 이건 뭐심여? 못 보던 것들이 있네여.”

오랜만에 민국의 집에 들렀던 서라는 못 보는 방문을 비롯해서 구멍 두 개가 있자 의문을 품었다. 민국은 굳이 피하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저 구멍 두 개는 은별이 집이랑 예나 집이랑 연결된 구멍이야. 저 구멍으로 들어가면 바로 그 집으로 이동할 수 있지.”

“허헐! 왜 이런 음란한 걸 만들어둠여?”

“훗. 넌 아직 모르겠지만 원래 인기 있는 남자는 여자들에게 항상 불타는 경쟁심으로 갈구당하는 법이란다. 저 두 개의 구멍 역시 나를 갈구하는 여자들의 욕망과 마찬가지인 셈이지.”

“이응이응. 엇! 그런데 형 얼굴에 김 묻음여.”

“잘 생김 말하는 거냐? 진부한 자식.”

“노노 제정신인가여? 행님 얼굴에 묻은 건 못 생김이에여!”

“이놈이?”

“데헷. 화내지 말고 봐주세염~.”

눈 한 쪽을 찡긋거리며 두 검지 손가락을 민국에게 총알 날리듯 움직이는 서라. 그 귀여운 애교에 로리콘으로 각성할 뻔한 자신의 정체성을 절제하고, 민국은 화장실 옆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거기가 흑설 공주라는 분이 계신 곳인가여?”

“그래. 저기 구멍 두 개랑 이 문도 전부 그 양반이 만든 거시지.”

“그런데 흑설탕 맛나는 그분은 왜 그런 문을 만드신 건데여?”

“흐음. 하는 말로는 그냥 내게 흥미가 있어서라니 하면서 만들었다는데, 실은 날 좋아해서 나와 같이 지내고 싶어 만든 게 아닌가 생각 중이다.”

“행님! 잘난 체도 정도를 넘어서면 진심으로 때리고 싶어짐!”

흑설 공주가 무슨 연유로 민국에게 접근한 건지 모른다. 실은 민국도 그 이유에 대해서 심히 의문을 표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추궁한다 한들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라면 이렇게 필요할 때 바로 바로 만날 수 있다는 거겠지. 흑마법사처럼 갑작스레 나타나 갑작스레 사라지는 타입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는 민국이었다. 똑똑.

“흑설 양반. 계십니까.”

반응은 없었다.

“안 계신 듯한데여?”

“이 양반은 무슨 문만 만들어두고 오가는 일이 없냐. 열어봐도 되나.”

“주거침입 허가도 안 받고 하면 법적으로 고소당해도 할 말 없음! 공권력 앞에 무릎 꿇고 싶으신 건가여?”

“법보단 주먹이 빠르단 말이 있지. 그 말은 즉 슨 법보단 도둑질이 빠르다는 소리기도 하다.”

“뒤늦게 법에 당하고 싶어 하는 패기! 말릴 수가 없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짜로 문을 열어도 되는지 한참을 고민한 민국이었다. 하지만 노크를 해도 반응이 없으니 별 수 있으랴? 민국은 결국엔 문손잡이를 잡아보았다. 그러자 철컥하는 소리도 없이 아주 부드럽게 문이 열리는 감촉이 들었다. 이윽고 문을 당겨서 열어젖혀보자….

“우와아…!”

방문이 열리자 서라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감탄했다. 민국 역시도 저번에 보았지만 참으로 넓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방이란 생각이 들었다.

‘근데 저번이랑 방이 달라진 것 같은데?’

그땐 굉장히 넓은 거실이었던 거로 아는데, 지금은 굉장히 넓은 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귀족풍이 느껴지는 침대와 함께 큼지막한 화장대 거울. 붉고 따뜻한 가죽 장판부터 시작해서… 무슨 영화 속에서 볼 법한 호화로운 귀족 집을 떠올리게 했다.

“온니찡! 흑설탕느님 설마 대부자 아닐까여? 어찌 이렇게 호화로운 방이 있을 수가 있져.”

“그러게 말이다. 여기 방 면적만 따지면 60평은 넘을 것 같네.”

절대 한국에선 보기 드문 방이었다. 민국은 끄트머리에 있는 방문을 보았다.

아무래도 저 방문을 열고 나가면 거실이 있는 모양이었다. 서라는 호화로운 내부의 모습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가정교육을 잘 받은 아이답게 불법주거침입이라는 명분이 떠올라 ‘의잉 주거침입 주거침입 아노됨….’하면서 자신을 절제하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이 정도는 신경 안 써 이놈아. 그냥 들어가.”

“아앗! 두려울 게 없는 긍지! 때때로는 부럽슴다!”

졸지에 민국의 손길에 떠밀려 방안으로 들어온 서라였다. 민국 역시도 방안으로 들어온 다음에 자기 집 쪽 방문을 굳건히 닫았다. 끼이익. 쿵. 온화한 분위기에 커다란 샹들리에가 달린 방. 민국과 서라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말 없으신가 봐여. 그냥 나중에 오는 게 어떨까여?”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 보면 조만간 오겠지. 내가 알기로 이 양반은 아홉시 전까지는 그닥 바쁜 게 없는 거로 알거든.”

서라는 그런 민국의 대범함을 우러러보면서 말했다.

“갑자기 온니찡 인상이 달라져 보이는 건 착각인가여? 그저 시골에서 고무줄넘기 하는 아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람보르기니 하루에 한 대씩 구매하는 친구랑 사귀는 사람이란 느낌.”

“훗. 더 놀라운 사실 알려줄까?”

“뭔데여?”

“사실 이 흑설 공주라는 작자도 나 은근히 좋아한다.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이놈아. 진심이니까 제대로 들어. 애초에 이 작자가 내 집과 자기 집을 연동시키기 전에 나한테 말하길, 나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갖고 있다고 얘기했었지. 이성이 나한테 그런 흥미를 갖고 있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겠냐? 좋아한단 뜻이지. 하지만 이런 귀족풍이 나는 깔끔한 부자조차도 차마 내 얼굴의 어마어마한 스팩에 부끄러워서 솔직하게 얘기는 못하는 거다.

알겠냐 서라야?”

“의잉…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같기도 하고가 아니라 맞아 인마. 애초에 흑설 공주에 대해서 넌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이 사람과 내 관계에 대해서도 넌 자세히 모르겠지. 하지만 이따가 한 번 봐라. 흑설 공주가 얼마나 나를 갑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그때였다. 끼이익, 하고 구석 끄트머리에 있던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굉장히 예쁜 미모를 가진 여인, 흑설 공주가 등장했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 있는 익숙한 사람 둘의 모습에 운을 띄었다.

“잠시 거실에 나와 있는 동안 찾아왔던 모양이구나. 무슨 일이느냐?”

흑설 공주의 외모에 대해선 하나도 몰랐던 서라였다. 굉장히 화사한 외모를 자랑하는 흑설 공주의 얼굴에 서라는 순간 넋을 잃고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자기 자신을 거울로 쳐다보는 느낌의 외모이리라. 이윽고 옆에 있던 민국이 한 번 보란 듯이 당당하게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낯선 입장이었던 서라가 그냥 굳어서 가만히 있는 가운데, 민국은 흑설 공주 앞에 당당히 당도하여 고개를 내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서라에게 말했던 만큼, 자신이 얼마나 갑의 위치에 있는지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요즘 겨울이라 날씨가 많이 추울 텐데 손 안 시리십니까? 빨리 침대에 가서 누우십시오. 제가 차라도 끓여오겠습니다.”

“괜찮다. 무슨 일이느냐?”

갑의 위력을 손수 보여주는 민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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