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225화 (225/369)

225화

“당신이 만일 서라라면 서라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 서라는 어떤 여자냐?”

“아잉! 스스로 그걸 말하라고 하다니여 행님도 참 가혹하고 잔인하시네여! 따, 딱히 큐티큐티하지는 않지만은! 러브리 엔젤하진 않을까란 생각이 스멀스멀 드는 그런 아이 아닐까여!”

“이럴 수가. 이런 등신 같은 드립을 하는 걸 보면 서라가 맞는 것 같은데.”

보통 여자라면 결코 따라하지 못할 어마무지한 드립에 민국은 넋을 잃었다. 그의 각양각색으로 변모하는 표정에 옆에서 지켜보던 예나가 ‘민국아…?’하면서 의문을 품는다. 민국은 고개를 돌려 예나에게 물었다.

“예나야. 네가 대신 받아볼래? 정말 서라인지 아닌지 네가 한 번 측별해봐줘.”

“…으응? …응.”

서라인지 아닌 지라니. 그리고 휴대전화로 들려온 목소리로 볼 때 서라는 아닌 게 분명했는데 말이었다. 이윽고 민국이를 대신해서 전화를 받은 예나였다. 두 손으로 휴대폰을 꼬옥 잡은 예나가 입을 연다.

“여보세요….”

“으이잉 이 목소리는 예나 언니찡이시네여! 오순도순 현모양처 양처양처!”

“…….”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 반가웠는지 서라의 억양이 들떠졌다. 하지만 예나는 그에 반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민국과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웠다. 이 목소리가 과연 서라가 맞는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혹시 휴대폰을 누군가에게 탈취당한 건 아닌가 염려까지….

“진짜… 서라예요?”

“서라 맞당깨여 언니찡!”

결국 예나도 갈피를 못 잡자 다시 휴대폰을 잡는 민국이었다. 민국은 다소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네가 서라가 맞다고 하면, 왜 갑자기 목소리가 그렇게 바뀌었냐?”

“나도 모르겠심. 모기약을 머리맡에 두고 자서 그런 건가염?”

그것 말곤 납득할 만한 설명도 없었고, 심지어 모기약만으로 목이 이렇게 변조된다는 것도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당최 모르겠구만.’

결국 민국도 갈피 잡는 걸 포기하고 말했다.

“뭐 그건 이따 가보면 알겠지. 방송은?”

일단 목소리가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민국은 그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서라는 곧장 대답했다.

“실은 그거 때문에 연락한 거예유! 어떡해야 하나여 온니찡!”

“오냐, 그럼 이따 기말고사 공부 도와줄 때 의논해보자. 너 학교지? 휴대폰 갖고 있는 거 들키면 빼앗기는 거로 아니까 조심해라.”

“오킹오킹!”

그렇게 연락을 마친 민국과 서라였다. 예나가 옆에서 묻는다.

“뭐라고… 해?”

“뭐 때문에 목소리가 바뀐 건지는 모른다고 하네. 근데 진짜 서라가 맞다고 하면 큰일일 텐데.”

서라의 목소리는 단순 파뿌리 TV 방송과 연관만 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 민국의 친구인 쿠왁부터 비롯해서, 주변 비제이들까지 모조리 서라와 연관되어 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서라를 남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일 이 목소리로 말미암아 여자라는 사실이 어쩔 수 없이 밝혀지면…!

‘여파가 장난 아닐 거다.’

어쩌면 수습이 불가능할 지도 몰랐다. 민국은 지하철에 탑승하면서 머리가 이래저래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예나는 다소 진지해진 민국의 얼굴을 보면서 걱정했다.

* *

“학교에선 어떻게 했냐?”

“나뭇잎 마을의 기를 이어받아 은신을 했지여. 이름하여 은따 스킬.”

그나마 학교에서 친구가 없는 게 다행(?)인 서라였다. 아니, 목소리가 급작스레 변한 것쯤이야 학교생활에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테지만… 방송이랑 연관되어 있다 보니까 현실에서도 조심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민국은 현재 서라의 집에 도착해 있었다.

서라는 몇 번이고 목을 다듬으면서 원래의 목소리를 내보려고 노력했다.

“엇흠흠여!”

“나오냐?”

“안 나옴여.”

이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섹시한 목소리. 도무지 서라와는 매치가 안 되는 목소리였다. 아니, 뭐 얼굴도 예쁘장하고 귀여움이 두드러지니 매치가 영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전의 그 개구쟁이스러운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민국도 많이 어색했다.

“허참, 목소리는 허벌나게 섹시한데 난감하네.”

“이 목소리가 섹시한가염 행님?”

“그래. 그 목소리로 온니찡하면서 날 유혹하면 널 진짜 덮칠 지도 모르겠구나.”

“어멋! 실험해보고 싶어지네여! 오, 온니찡~!”

온니찡에서 멈췄으나 민국은 순간 꿈틀하는 걸 느꼈다. 어디까지나 드립으로 내던진 것이었지만 말이다.

‘큰일이군.’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민국은 꽤나 심각했다. 일단 쿠왁에게 남자라고 거짓말을 쳤기 때문에 사실을 들키게 되면 어지간히 갈등이 일어날 태세였다. 그리고 서라를 그간 남자로 믿고 있던 방송 시청자들 간에도 논란이 있을 터였고, 그동안 민국과 얽혀 있던 스폰서 중에 서라에게 제안을 하고 싶어 하던 스폰서들이 무지 많았는데… 사실이 밝혀지는 즉시 민국에게 또한 추궁이 따를 것이었다.

‘나에 대한 문제도 있겠지만 서라가 서라에 대한 문제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거지.’

서라의 멘탈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은별보다 더 강한 편이라서 괜찮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혼자 감당하기에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일단 목소리가 바뀐 이유에 대해서 찾아보자.”

“이응이응.”

민국은 서라의 방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머리맡에다가 모기약을 두고 잤고, 보일러를 키고 잤다. 그리고 이불을 쓰고 있었고, 잠은 새우 자세로 잤냐?”

“세우 자세에 귀여운 얼굴로 잤음여!”

“뻔뻔하기 짝이 없지만 귀여운 얼굴은 맞으니 부인하지 않으마.”

서라가 ‘고맙고맙여!’하고 인사를 하는 가운데, 민국은 과연 여기에서 어떤 것이 영향을 줬을지 곰곰이 고민해보았다.

“설마 진짜 모기약인가?”

“그러고 보니 예전에 모기약 때문에 목소리가 변했던 가수나 사람이 있던 거로 알긴 함여!”

“허 참. 병원에는 갔다 왔다고 했지?”

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학교에서 하교를 하면서 병원은 한 차례 들린 상태였다.

“뭐라냐?”

“문제 없다는데여?”

“목소리엔 큰 문제가 없다라.”

민국은 ‘설마’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설마 가랑이 사이에 그거 달려 있냐?”

“어멋?”

“그래서 목소리가 바뀐 건지도 모르지. 변성기니까.”

서라는 쓸데없이 양볼에 두 손을 올리면서 부끄러운 척 몸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어떻게 섹시한 목소리까지 갖게 된 여인한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음여? 그, 그것도 변성기라닝… 안성기도 아니공!”

“흐음… 하기사 네 알몸은 예전에 본 적이 있으니.”

“히이익!”

진심으로 얼굴이 붉어진 서라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파뿌리 TV 시상식을 하면서 서라의 알몸을 의도치 않게 본 경험이 있었다. 잊을 만 하니까 언급된 그 소리에 서라는 옛날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걸 느꼈다. 민국은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럼 대체 뭐란 말이지.’

“그럼 오늘 방송은 관두는 게 좋을까여.”

“안 하는 게 낫겠지. 그 목소리로 했다간 네가 남자라고 해도 다들 여자라면서 이상하다고 느낄 텐데. 일단 하루 동안은 지켜봐봐.”

“으헝헝헝… 알겠으염.”

“에휴, 일단 기말고사 공부나 하자.”

방송 한 번 쉰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하여 서라는 오늘 하루 방송을 쉬게 되었다. 부디 내일 일어나면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오길 빌었다.

* *

하지만 다음 날이 찾아왔을 때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본래의 것은 더 이상 없다는 듯 서라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성스러움 그 자체였고, 민국은 어찌 보면 완벽하지만 그 완벽함 때문에 찾아올 문제에 심각히 염려하고 있었다. 결국 오늘도 방송을 쉬기로 결심. 그렇게 또 하루가 흘렀다.

“…….”

또 하루가 흐르고 또 하루가 흘러 마침내 기말고사. 시험이라는 명분하에 방송을 무려 일주일간 쉬게 된 서라였으나 목소리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민국은 이제 기말고사 시험도 끝났으니 볼 일도 없지만, 일부러 서라의 집에 들려서 물었다.

“기말고사 시험은 잘 봤냐?”

“으아아앙 행님! 개망했음여! 한 개나 틀렸어여! 무려 한 개나!”

“지금 네 꼴을 보니까 마치 수능시험에서 문제 한 개 틀린 거로 옥상에서 투신자살하는 학생의 모습이 연상된다.”

“흐규흐규.”

물론 서라는 그런 건 코스프레 할 뿐 진심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애초에 어머니가 서라를 이해해주는 편이다 보니까, 서라도 공부에 얽매이면서 큰 편은 아니었다. 이윽고 울음 짓던 척하던 서라가 질문했다.

“그런데 이 목소리 어떡함여?”

“…….”

“내 목소리가 이렇게 귀여울 리 없다능여!”

서라의 목소리가 이렇게 애교틱할 리 없다! 아니, 애교는 원래부터 있었지만 그래도 목소리가 이런 식으로 예쁜 미가 넘친 적은 없던 것이다. 민국은 팔짱을 끼면서 진지한 눈빛으로 질문했다.

“목소리가 바뀐 지 얼마나 지났지?”

“일주일 넘었음.”

“그렇군.”

민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최후의 수단밖에 없었다.

“화이팅이다 서라야. 난 너를 믿는다. 수고해라!”

“우와! 형님 여기서 그대로 나가버리면 온니찡 부카게 사건 일러바칠 거임!”

“야야 인마! 그건 이제 끝난 건이잖아! 아무튼 알았어, 후으. 큰일이구만.”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재차 돌아온 민국은 자리에 앉았다. 휴대폰을 들어 서라의 방송 홈페이지에 들어 가보는 민국이었다. 시험 때문에 방송을 쉬겠다는 게시글에 벌써부터 사람들의 아우성이 쏟아지고 있었다. 서라도 워낙 막가파 비제이다 보니까 그 비제이 성향을 그대로 따라가는 시청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일났군. 일났어.’

이대로 언제까지고 버틸 수도 없었다. 민국은 결국 프로그램의 힘을 빌려보자고 생각했다.

“야, 강서라. 가서 컴퓨터 켜봐.”

“이응이응.”

후다닥 방으로 달려가서 컴퓨터를 키는 서라였고 뒤따라온 민국이 이래저래 인터넷을 뒤적이면서 프로그램을 찾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서라가 물었다.

“설마 나님의 19세 이하 시청 불가 영상을 몰래 훔쳐보시려는 건 아니져?”

“그걸 보느니 너를 덮치고 말지. 어쨌든 기다려봐라.”

이윽고 마이크도 확인해본 민국이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고 그것을 그대로 실행해 보였다. 프로그램을 처음 보던 서라가 물었다.

“그게 무슨 프로그램인가여?”

“목소리 변조 프로그램.”

“헐.”

“이거 이용해서 한 번 목소리 변조해봐라. 자, 지금 해봐.”

최대한 소리를 잘 듣기 위함에 해드셋을 착용하는 민국이었고, 마이크는 서라가 받게 되었다. 서라는 민국의 조절 하에 따라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목소리 테스트를 시작했다.

“아무 말이나 하면 됨?”

“그래.”

“이잉,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글쎄 온니찡이 예전에 어뜬 세계에서 지를 덮쳤지 뭐에유! 그것도 하얀색 블랙 버스터라는 스킬을 이용해서…!”

“에라이.”

“으아아아아! 행님 아파유!”

해드락을 한 차례 걸고 나서야 항복한다면서 정돈하는 서라였다.

“의잉…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그래. 차라리 그거로 해라. 어디 한 번 다시 말해봐.”

프로그램을 조종하면서 민국은 계속 서라의 이전 목소리를 찾으려고 했다.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흠. 이것도 아니고. 다시.”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하지만 큰일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하든 서라의 이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특히 목소리 변조 프로그램도 결국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목소리를 바꿔주는 것인데, 서라의 목소리가 이젠 너무 하이톤의 목소리라서 저음으로 내려가도 별로 예전의 느낌이 사는 게 없었다.

“하, 진짜 큰일이구만.”

“행님. 내가 진지하게 고민해봤는데유.”

오랫동안 시도했으나 결국 방도가 없었다. 이젠 서라가 결정하지 못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냥 말할까염?”

“…….”

민국을 쳐다보면서 서라는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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