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서라 대위기>
예전에 달리는 남자라는 프로가 있었다. 코믹 리얼버라이티쇼라는 장르 하에 진행되었던 프로였는데, 그 프로에서 나오는 어느 한 근육질의 남자 연예인이 말하길… 한 때 자기 목소리는 굉장히 굵직굵직했다고 한다. 그러나 학창 시절 모기약에 관련된 성분이 있는 액체를 꿀꺽 삼켰다가 문제가 생겨서 목소리가 변질되었고, 지금은 여타 남자들이 따라할 수 없는 굉장히 하이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서라의 증상은 그와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되었다.
“의이잉…!”
하지만 다소 차이점이 있다면 서라는 그 약성분을 입에 들이킨 적이 없고 그저 연기만 맡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연기를 직사광선처럼 직접적으로 맡은 탓이 컸다. 칼칼한 목을 몇 번 다듬던 서라는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 자신의 목소리에 크게 당황했다.
‘뭐시져 이게?’
‘아아’하고 몇 번 소리를 내보는 서라였다. 그러나 이전의 남성스러운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하릴없이 섹시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어찌 보면 파뿌리 TV에서 목소리로 먹고 사는 여자 비제이들과 맞먹는 목소리였는데… 기존에 없던 코맹맹이 소리도 조금씩 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도 단단히 이상함여!”
그동안 자신이 들어왔던 목소리가 아니자 서라는 혹시 큰 병이 걸린 건 아닌 가 불안해했다. 당연하다. 아무리 좋은 목소리로 향상됐다 한들 그것을 마냥 좋게 인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루 아침사이에 자신의 신체 일부중 무언가가 바뀐다면 그것을 좋아하기 보단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의 기본 정서였다.
“그런데 징말로 섹시하네유.”
스스로 말을 하고도 섹시하다 느꼈는지 서라는 왠지 신음 소리를 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개구쟁이 같은 충동은 뒷전으로 미뤄두는 게 좋을 듯싶었다.
“지, 지각잼!”
목소리 때문에 당황해서 하도 시간을 끌었던 탓에 학교 시간이 늦은 뒤였다. 서라는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집을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의 말도 안 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근데 진짜 어떡하지여? 이러면 안 되는뎅….’
서라는 자신의 목소리가 향상되었음에 여러모로 문제가 생겼다는 걸 느꼈다. 그렇다. 이건 그녀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인가? 목소리로 게임을 하면서 사는 비제이 아닌가? 취미이자 직업으로까지 생각하고 있는 그 비제이를 쉽사리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파뿌리 TV에서 콩딱지라는 비제이는 털털한 남자로 인식 받고 있었으니까. 서라가 의도한 대로의 행동이었고, 이제 와서 말을 번복하면 여파는 어마무지할 것이었다.
‘이잉 어쩐다여!’
혼란에 빠져 있던 찰나였다. 학교에 등장했던 친척 오빠(?) 민국의 등장 이후 수많은 여자들에게 인기를 받게 된 서라. 오늘도 조회 시간이 끝나자마자 쉬는 시간을 틈타 접근한 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 여학생은 서라에게 찝적대면서 민국 오빠를 만나기 위해 이리저리 호감을 주고 있었는데….
“서라야. 오늘 아침 잘 일어났어?”
“의, 의잉?”
“얼굴이 많이 당혹스러워 보인다! 어떤 심각한 일이라도 있던 거야?”
마치 진짜 걱정해주는 것처럼 치는 멘트였다. 그러나 그 멘트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음모를 모를 만큼 서라는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뒷전으로… 지금은 오로지 목소리에 대한 고민만 있었기 때문에 서라는 이 목소리를 어떻게 숨기면서 반응해야하나 고민했다. 이윽고 칼칼하게 목소리를 내뱉으면서 어떻게든 저음을 내려고 하는 서라였다.
“으, 의잉 그렇다능.”
“응? 감기 걸렸어? 목소리가 좀 느낌이 다르네?”
하지만 저음을 낸다고 해도 사람 고유의 풍부한 목소리가 숨겨질 리 없었다. 서라는 뜨끔하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느닷없는 그녀의 거친 반응에 접근했던 여학생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얼떨떨해했다. 이윽고 서라가 종이로 슥슥 무언가를 적더니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보여주다 못해 건네준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배에서 갈색 브레스 신호가!]
대충 그렇게 핑계를 대고 일단 자리를 벗어나는 서라였다.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간 서라는 곧장 1인 변기에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았다. 정말 일을 보려고 온 건 아니었고… 우선 혼자가 되어야 제대로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선택을 한 것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서라는 고심했다.
‘어쩌지여! 어쩌지여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발을 동동 구르길 한참, 서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 파뿌리 TV와 연관되어 있으며 자신과 친한 친분이 있고, 현재 기말고사 시험공부를 도와주고 있으며, 의지하기에 충분히 능력이 되는 사람!
‘병의 신!’
서민국을 떠올리면서 서라는 휴대폰을 들었다.
* *
쨍쨍한 햇볕이 눈을 비춘다. 창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면면에 쨍쨍함이 다가오자 민국은 인상을 사뿐히 찡그리다가 몸을 뒤척였다. 이윽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움직이길 반복, 시계가 시끄럽게 울려대자 손을 움직여 꺼버린다.
“어우씨.”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민국이었다. 하지만 개운하지는 않았다.
“어제 야동을 보면서 심하게 절규를 한 게 잘못이로군.”
야동을 향한 열정은 어떤 또래 남자 애들보다 강렬했다. 그랬기 때문에 민국은 야동을 보고 잔 날이라면 항상 몸이 극도로 피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은별이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민국은 머리를 박박 긁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으로 다가가 열어젖히고 바람을 한 번 환하게 맡아보는 민국.
“흐음! 바람의 스멜!”
문을 닫는 민국이었다.
“존나 춥네 으어어.”
바들바들 떨면서 민국은 곧장 보일러 쪽으로 향했다. 난방을 키고 온수를 조절한 민국이 곧장 화장실로 향한다. 오늘은 수업 때문에 일찍 나가봐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샤워를 하자마자 곧장 끼니를 챙기고 집에서 나가야 했다.
“아차차차. 그리고 하나 더 있지.”
뜨거운 물이 나올 때까지 샤워기를 미리 틀어두고 민국은 거실로 다시 나왔다. 그리고 거실의 뻥 뚫려 있는 원형 구멍 두 개를 보았다. 흑설 공주의 인테리어를 통해 나름 깔끔하긴 했으나 역시 구멍은 구멍이었다. 민국은 자기 몸둥아리도 들어갈 수 있는 그 구멍으로 얼굴을 내밀어 보았다.
“은별아. 자고 있니?”
“…….”
대답은 없다. 아무래도 자고 있는 모양이다. 하기사 어제 물어본 결과로 그녀는 오늘 수업이 늦게 있다고 했으니까.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서 장난이라도 조금 치고 나올까 생각한 민국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시간이 없는 관계로 민국은 곧장 자기 거실에서 옷을 탈의했다. 그리고 후다닥 화장실로 향해 몸을 씻었다.
“민국아…?”
그리고 그때 예나가 깨어나서 한창 준비를 마치고 민국의 집으로 넘어가려는 상황이었다. 예나는 똑똑 구멍 앞에서 노크를 했지만 민국은 화장실에 가 있는 터라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예나가 구멍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재차 민국을 부른다. 설마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왠지 챙겨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예나는 ‘그쪽으로 넘어갈게….’라고 하면서 구멍을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
또다시 엉덩이가 끼는 불상사는 주의하기 위해 조심하면서 구멍을 넘어온 예나는 거실을 돌아보았다. 옷들이 탈의되어 널브러져 있었고, 막 샤워를 마친 화장실에선 민국이… 끼이익.
“어? 예나야?”
“……!”
“으억?!”
저도 모르게 나신을 보여준 민국이었다. 예나는 얼굴이 화악 붉어져서는 몸을 홱 돌려버렸다. 그리고는 몹시 부끄러움을 타는 얼굴로 고개를 내리고 어쩔 줄 몰라하면서 말했다.
“미, 미안해 민국아…! 샤, 샤, 샤, 샤샤샤워하는 줄도 모르고!!”
“아, 아니야 괜찮아! 어차피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뭐.”
민국은 최대한 여유롭게 대처했다. 어차피 흑화 소주를 통해 볼 거 다 본 사이 아니었던가? 비록 기억이 애매모호하긴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몇 가닥 있었다. 하지만 예나는 여전히 맨 정신으로는 민국의 나신을 보는 게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숙이고 몸을 돌리지 않았다.
민국은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안방으로 향해서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이윽고 안방에서 나온 민국이 자신의 옷차림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예나야, 이 옷 어때?”
“…….”
그제야 고개를 돌려서 민국을 쳐다보는 예나였다. 여전히 홍조가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민국이 옷을 입고 나니 조금은 달래지는 모양이었다. 겨울 코트를 입고 있는 민국을 보면서 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려… 민국아.”
“그렇구나. 다행이네. 예나 너도 옷 잘 입었어. 충분히 예뻐.”
“고, 고마워….”
얼굴을 붉히면서 칭찬에 몸둘바를 몰라 하는 예나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코트는 하얀색 코트. 비율이 좋다 보니까 코트가 무릎 선에서 멈추면서 알맞게 들어갔다. 민국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긴 머리를 바라보다가 씨익 미소 지었다.
“자, 학교가자.”
“으응….”
예나와 민국의 방이 이어짐으로서 좋아진 게 한 가지 있다면, 같이 집에서 동시에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예나의 집에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했다. 혹시나 들키기라도 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으니까. 고로 예나는 예슬이가 유치원 버스를 타고, 부모님이 출근하시는 것을 지켜본 뒤 방으로 올라와서 준비하는 실정이었다.
‘좀 늦지만 괜찮아… 민국이랑 같이 갈 수만 있다면….’
날씨가 워낙 춥다 보니까 바깥에 나오자마자 얼굴이 붉어진다. 민국은 그녀가 목에 매고 있는 목도리를 깊게 돌돌 매준 다음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추운 겨울을 알리듯 공기가 매우 차갑다. 몸이 얼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정도로, 끔찍하게 춥자 예나의 눈도 조금 가늘어졌다.
민국은 그런 예나가 혹시라도 넘어 질까봐 손을 꼭 잡고 가주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전철역에 도착한 후, 민국은 예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어후, 날씨 장난 아니게 춥네. 그치 예나야?”
“으응…. 민국이 너도 목덜미 많이 춥지 않아?”
목도리를 하지 않은 민국의 목이 걱정되어 묻는 예나였으나, 민국은 가볍게 웃으며 끄덕없다고 말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오붓하게 전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우우우웅. 느닷없는 휴대폰의 울림. 이런 아침 시각부터 누구인가 의문을 갖고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민국은 강서라임을 확인했다.
“이 녀석이 왜 이때 연락을 하지?”
“누구야?”
“서라야 서라.”
조금 견제하는 듯한 목소리에 민국이 발신자를 보여주었고 예나가 ‘아’하면서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이 아침부터 서라가 무슨 이유로 연락을 건 것일까? 민국은 곧장 전화를 받아 보였다.
“여보세요.”
“아앙. 온니찡. 이쿠이쿠이쿠요!”
“…….”
“……?”
왠지 전화를 하자마자 극도로 장난을 치고 싶어진 서라였다. 매사에 개구쟁이 스타일이 타고났기에 별 수 없는 사실.
“나카니 다시떼요! 온니찡!”
“와 이, 누군데 목소리가 이렇게 섹시하냐.”
“…….”
옆에서 휴대폰의 음성 소리가 들려오던 예나는 민국의 그 소감에 입을 다물고 쳐다볼 따름이었다. 예나의 감정이 없는 듯 있는 그 시선에 민국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장난은 그만하고. 누구십니까? 딱 봐도 서라 목소리는 아닌데.”
“헐! 대 충격! 행님과 지의 의지는 고작 그 수준밖에 안 되는 거였나여! 몹시 실망!”
‘뭐야 이거? 말투는 서라 같은데?’
말투나 개성 같은 거로 볼 땐 딱 봐도 서라 같았으나, 그래도 목소리가 너무나도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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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2시에 올렸던 전편은 잘못 올렸던 편입니다. 못 보신 분들은 다시 봐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