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애초에 유명한 사업가들에게 비싼 제안까지 받을 만큼 몸값이 높은 흑설 공주였다. 상식적으로 민국의 좁디좁은(?) 집에서 생활할 리 전무했던 것이다. 마법으로 화장실을 자기 집 거실로 바꾸는 그녀의 모습에 은별은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할 생각이었으면….
‘그럼 저건….’
은별이 고개를 돌려 가방을 보았다. 두 개의 커다란 가방. 이삿짐이라도 들어 있을 듯한 그 가방에 흑설 공주가 은별의 생각을 눈치 챈 듯 설명해주었다. 또각또각 가방의 곁으로 다가가 가방 문을 열어 물품들을 보여주며 말이었다.
“오늘 사업가들에게서 받은 선물들이야. 각자 해달라는 요구가 많아서 말이란다.”
“…….”
가방의 물품들은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양주부터 온갖 고급스러워 보이는 물건들이 한 가득이었다. 얼추 측정을 해도 몇백만원은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을 그저 선물로 받을 정도라니, 기본적으로 수준이 다르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넓네요….’
예나 역시도 흑설 공주의 드러난 거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널찍하고 우아한 내부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단순히 돈만 많은 게 아니라 마법까지 굉장하다.
물론 흑설 공주가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말하길, 이런 고급 마법들은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있어서 사용 빈도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무거운 가방을 이끌고 여기까지 당도했다는 것이었다. 민국의 집에 들려 방도 연결시킬 겸.
“직접 와본 곳이어야만 이 마법도 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어디서 또 꺼낸 것인지 그녀의 손엔 어느 덧 부채가 들려 있었다. 화려한 무늬가 장식된 그 부채를 여유롭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 은별은 꾸욱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흑설 공주가 물었다.
“어떠느냐? 이런 식으로 너의 방도 연결시켜준다면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동거긴 동거되, 집과 집이 연결되는 것이었으니 어떤 면에선 예전의 생활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곧장 만나러 올 수 있다는 게 크나큰 차이점일 터.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은별은 사실상 동거보다 흑설 공주라는 또 다른 여자가 등장해 민국에게 흥미를 보인다는 게 불안한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동거를 진행한다 한들 결코 안심할 수가 없었고, 그건 자기가 함께 한다 한들 매한가지일 것이었다.
“…….”
예나는 그런 은별의 옆얼굴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내심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흑설 공주라는 여자가 너무나도 수준이 달랐기 때문에, 그 포스에서 와닿는 심정을 예나도 확실히 전달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국을 향한 예나의 의지가 끊어질 리 전무했다.
“저….”
“…….”
“저는 안 될까요…?”
은별이 망설이고 있자 먼저 선수치는 예나였다. 은별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예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민국과 흑설 공주의 시선도 일제히 예나에게로 돌아갔다. 예나는 자신의 가슴에 한 손을 얹고 진심으로 부탁하고 있었다.
“민국이랑 집이 가깝긴 하지만… 그래도 연결이 되어 있으면 방문하기도 좀 더 수월할 테고….”
우물쭈물거리지만 용기를 내고 있다. 이전에 미연시 세계에서 민국이 또 다른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답답한 여자.’
부드럽고, 조화롭고, 상냥하고, 예쁘지만, 때때로는 말이 너무도 없고 표현도 없다 보니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일이 즐비했다. 민국의 그때 그 말이 자꾸만 기억에 거슬렸던 예나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예나의 고개가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안 될까… 민국아…?”
“어, 엇흠….”
예나의 떨리는 눈동자가 민국을 마주한다. 그렇게 쳐다보면 차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게 남자라는 것이다. 민국은 어색하게 기침을 몇 번이고 하다가 대답했다.
“예나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엇흠….”
“서민국… 너어!”
“진정하게 은별 낭자! 나는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위험할 때 언제든지 튀어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슈퍼맨이 되고 싶은 것뿐이오!”
슈퍼맨은 무슨…. 하지만 임신을 늦춰주는 약을 먹었다 한들 결과적으로 예나는 임신을 한 상태다. 어떤 타박상이나 넘어지는 것으로 아이가 지워지는 일도 없겠다지만, 그래도 역시 민국이 책임져야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 책임감을 민국은 잊지 않았기에 예나의 제안을 받아주는 거겠지.
“어떠느냐?”
“…….”
흑설 공주가 다시금 미소 지으면서 은별에게 물었다. 은별은 왜 민국이 한 순간 이 여자를 사디스트라고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건 아니었지만, 의도치 않게 괴롭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별 역시 지고만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승부욕 하난 강한 그녀였으니까!
“…변태짓하게 가만두진 않을 거야! 저도 차려줘요!”
“그래. 잘 생각했단다.”
흑설 공주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딱히 화장실을 거실로 바꿀 필요는 없었다. 굳이 방문이 아니더라도, 벽면을 향해서도 가능했다.
단지 시범을 보이려고 선보였던 것뿐이고 말이다. 어찌 됐든 흑설 공주는 민국의 집에 예나와 은별이 오갈 수 있도록 방을 연결시켜주었다.
(은별과 예나의 허가 하에 그녀들의 집에 몰래 침투해서 둘러보는 걸 잊지 않았다.) 민국의 화장실 문 옆에는 은별이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생겼고, 창고 옆에는 예나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생겼다. 다만 문제점이 있다면 은별과 예나의 가족이었다. 가족들이 혹시나 자기 방을 훑어보다가 민국의 방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찾는다면 놀랄 노자일 것이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흑설 공주는 방문이 아닌 구멍으로 바꿔주었다. 각자의 방으로 오갈 수 있는, 사람 몸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원형 구멍.
‘…좁아.’
들어갈 때 엉덩이가 살짝 낄 뻔한 은별이었다. 하지만 운동을 했기 때문에 날렵한 몸놀림으로 곧장 방을 통과하는 은별이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은별은 이마의 땀을 닦은 다음에 자기 옷들이 걸려 있는 옷걸이 바퀴를 움직여 구멍 쪽을 가리는데 사용했다.
예나 역시 자기 방으로 이동되는 구멍을 건너가 본 뒤 어떤 것으로 가릴까 고민하다가 하얀 천수건을 달아두기로 결심했다.
“다 된 셈이구나.”
“…….”
그리고 다시 민국의 집으로 원위치. 또다시 모이게 된 네 사람. 민국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튀어나오는지 ‘음하하하’ 미소를 그렸다.
“이제 진짜 하렘이 실현되는구나!”
“족쇄로 입을 콱 다물게 하고 싶네.”
궁시렁대는 은별이었고, 예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흑설 공주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민국의 화장실 문 옆에 만든 또 다른 문손잡이를 열어젖혔다. 그러자 흑설 공주의 거실이 생겼다.
“오늘은 마나를 과소비해서 몹시 피곤하구나.”
“…….”
“어차피 만날 일은 앞으로도 많을 테니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다들 수고했단다.”
마치 누구보다도 어른인 것처럼 중얼거리면서 흑설 공주는 방문을 닫기 시작했다. 예나는 도중에 예의를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정신을 차리듯 ‘아’하고 탄성 지었다. 그리고 ‘안녕히….’하면서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서 인사하는 모습이었다.
은별은 못 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도 보지 않았고 말이었다. 이윽고 민국 역시 손을 흔들어 흑설 공주의 뒷모습을 향해 인사를 해준 뒤 은별에게로 다가갔다.
“은별아 왜 그래?”
“…몰라서 묻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네요.”
여러모로 심정이 복잡한 은별이었다. 민국은 그런 은별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말했다.
“그래도 오히려 난 이렇게 하니까 안심되는데? 나중에 무슨 일 생기면 곧장 달려가서 도와줄 수 있잖아.”
“…….”
그리 말하니까 갑자기 스토커 건이 떠오른다. 칼을 들고 설치던 스토커. 하마터면 진짜로 위험할 뻔했다.
“…팔은.”
“응?”
“팔은 어때….”
은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민국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씨익 미소 짓더니 손을 보여주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소! 하루 사이에 너의 힐링으로 많이 나아진 편이지!”
“…후.”
지치는 모양이었다. 도리도리 고개를 젓던 은별이 구멍으로 몸을 돌렸다.
“나 갈래….”
“가려고?”
“그래. 둘이서 대화 빨리 끝내고 돌아가.”
평소 때라면 예나가 갈 때까지 붙잡고 있었을 은별이었겠지만, 이젠 이런 일도 하도 반복되다 보니 그냥 그러려니 하는 편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구멍 안으로까지 들어가 은별을 배웅해주었고, 은별이 억지로 등을 밀고 나서야 민국은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무릎을 툭툭 털은 민국이 ‘휘유’하고 숨을 내쉬었다. 예나가 좀 미안한 얼굴로 민국에게 다가왔다.
“정말 괜찮은 거야 민국아…?”
“응?”
이런 식으로 흑설 공주가 방까지 이동하게 해주었으니, 좋다면 좋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건… 임신을 늦춰주는 약을 주는 대가로 민국이 행해야 하는 보답이었다.
“민국이 네가 이런 걸 원하지 않았을 걸 알고 있으니까….”
“…….”
예나는 민국의 심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아무리 민국이라도 집에 또 다른 여자를 들이고 싶었겠는가? 동거라는 명분하에 또 다른 여자, 이번엔 마법사의 등장이었다.
심란해하고 있던 은별과 책임져야 하는 예나. 두 사람을 이제야 좀 자리 잡고 도와주던 찰나에 이런 일이 생기니 당연지사 민국도 지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민국은 자신의 속내를 용케 파악한 예나가 기특했는지 기쁜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그래도 이렇게 방도 이어지고. 어쩌면 이게 더 우리에게 좋은 걸 수도 있잖아? 원할 때 언제든지 만나러 올 수도 있고.”
“응… 그건 그래….”
예나가 다시 한 번 진솔하게 용기 내서 대답하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짓다가 곧 웃음 지으면서 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쓰다듬을 한동안 받고 있던 예나가 민국에게 말했다.
“이제 가볼게…. 계속 이러고 있으면 은별 씨가 또 화낼 테니까.”
“응. 가서 잘 쉬고.”
“응… 고마워 민국아.”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정답게 얘기를 끝낸 뒤 방으로 가려는 예나였다. 하지만 방으로 이동하기 위한 자세는 어찌 보면 추태스럽게 보일 수도 있었다. 구멍에 엉금엉금 기어서 들어가는 것이었으니까 말이었다. 이윽고 예나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면서 떨떠름하게 구멍으로 들어간 찰나였다. 푹.
“응…?”
“? 왜 그래 예나야?”
구멍에 들어가다 말고 도중에 멈추는 예나였다. 그녀의 엉덩이만 보이던 민국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리 반문했다. 그러자 예나가 몇 번이고 몸을 움직여보는가 싶더니 ‘미, 민국아….’하고 부끄러운 얼굴을 지었다. 민국은 단 번에 예나의 그 모습에서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껴, 꼈니?”
“…….”
예나는 극도로 붉어진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이래봬도 골반이 상당히 큰 예나였다. 그러다 보니 엉덩이도 컸고…. 다시 한 번 낑낑거리면서 힘을 줘보는 예나였다.
‘왜… 왜 이러는 거지… 아까 전엔 잘만 들어갔는데….’
힘을 내도 되지 않자 울상을 짓는 예나였다. 민국은 ‘구멍을 좀 더 늘려달라고 부탁을 해야겠네.’하고 흑설 공주를 떠올렸다. 하지만 마나 과소비로 어차피 방문하기도 버거울 테고, 이 정도야 민국이 도와주면 금방 들어갈 수 있을 터. 민국이 예나의 엉덩이 앞에 당도하면서 말했다.
“예나야. 좀 미안하지만 엉덩이 좀 만질게.”
“어…? 미, 민국아… 그런….”
아무리 흑화 소주로 그런 짓을 한 번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맨 정신에서 그런 짓은…. 그리 중얼거리려던 예나는 자신의 엉덩이로 느껴지는 감촉에 소스라치게 질겁했다.
“히익….”
“예나야, 괜찮아? 좀만 더 힘줘봐.”
“으, 으응… 민국아… 근데 엉덩이엔 역시 좀….”
“흡!”
있는 힘껏 엉덩이를 미는 민국이었고, 예나는 그 힘의 탄력으로 졸지에 앞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쿠당탕! 그대로 자기 방에 떨어진 예나를 향해 구멍으로 쳐다보면서 민국이 물었다.
“괜찮아 예나야? 다치지 않았어?”
“으응… 민국아… 괜찮아. 고마워….”
이마가 바닥에 부딪혔는지 붉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마를 만지면서 예나는 빠르게 천으로 구멍을 가렸다. 엉덩이를 손으로 만지게 해줬다는 게 몹시도 부끄러웠던 것이다. 민국은 그런 예나의 귀여운 행동에 피식 웃음 짓다가 말했다.
“잘 쉬어.”
“으응….”
“무슨 일 있으면 찾아오고.”
“으응… 고마워 민국아….”
그렇게 예나와 대화를 끝낸 뒤 구멍에서 몸을 물린 민국이었다. 그러자 또 다른 구멍의 진한 시선이 느껴졌다. 순간 무엇인가 의문을 품던 민국이 ‘응?’하면서 고개를 돌리자 은별이 매섭게 노려보는 게 보였다.
“으억.”
“…….”
구멍에서 얼굴만 내밀고 독수리 같은 눈매로 쏘아보던 은별이 중얼거린다.
“잘들 놀고 있네.”
“은별아 그러니까 이건…!”
“수고해.”
그리고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 옷걸이로 완전히 방을 가려버리는 은별이었다.